과학한다, 고로 철학한다 / 팀 르윈스 지음 / 김경숙 옮김 / MID 펴냄, 2016년

[라포르시안] 흔히 의심이 가는 사안을 논의할 때 과학자의 주장에 무게를 실어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잊혀가고 있습니다만, 2008년 광우병파동이 일었을 때, 서로 다른 주장을 내세우는 과학자들로 인하여 사람들이 갈팡질팡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미국산 쇠고기가 위험하다’라고 주장하던 소위 전문가들은 ‘위험할 수는 있지만, 이미 통제되고 있기 때문에 위험수준이 미미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전문가들을 사이비전문가라고 매도하는데 주력했던 것도 대중들의 신뢰를 얻으려는 수작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각설하고, 과학이 일반대중의 신뢰를 얻게 된 것은 그동안 과학이 이루어낸 놀라운 업적 때문입니다. 오늘 소개하는 <과학한다, 고로 철학한다>의 서문을 잠시 인용하면, “과학적인 방법은 아득한 과거나 먼 미래의 비가시적인거나 무형인 사건에 대해서도 견해의 일치를 끌어낼 수 있을 만큼 누구나 인정하는 권위를 지니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어려운 결정을 할 때마다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한지 여부를 묻게 된 것입니다.

<과학한다, 고로 철학한다>는 과학의 오늘날의 위치에 오르게 되기까지를 설명합니다. 즉, 과학이 무엇인지, 그리고 과학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말합니다. 유명한 물리학자 파인만박사도 “새에게 조류학이 도움이 안되는 것처럼 과학자에게도 과학철학이 도움되지 않는다”라고 한 것을 보면, 과학철학은 과학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과학자도 많은 모양입니다. 그런가 하면 아인슈타인박사는 “과학의 역사적․철학적 배경을 알고 있으면 대부분의 과학자가 지닌 문제인 현세대의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내 생각에는 철학적 통찰력이 가져다주는 이 자유야말로 진정으로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을 단순한 장인 혹은 전문가와 구별해주는 것 같다.”라고 말해 과학철학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합니다.

다음의 국어사전을 보면, 철학(哲學)이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중요한 인생관, 세계관 따위를 탐구하는 학문. 원래 진리 인식(眞理認識)의 학문 일반을 가리켰으나, 중세에는 종교가, 근세에는 과학이 독립하였다. 형이상학, 논리학, 윤리학, 미학 등의 하위 부문이 있다.”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과학의 뿌리가 철학에 닿고 있으니, 학문이 추구하는 근본 목표는 동일하나, 대상과 방법론에서 차이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철학이 사유를 통한 진리탐구 즉 주관적 학문이라고 한다면 과학은 객관적 자료를 바탕으로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이라는 차이가 있겠습니다. 최근에는 주관적 학문 영역까지도 과학적 접근방식을 이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과학한다, 고로 철학한다>의 저자 팀 르윈스는 케임브리지대 과학철학 교수로 과학철학뿐 아니라 생물철학과 생물윤리에 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케임브리지대 장하준교수는 추천의 글에서 ‘특히 생물학 분야의 과학이론이 가지는 사회적, 문화적 의미를 깊이 고려하는 전문가로 유명하고, 그의 명쾌한 강의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지속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라고 적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이 마음에 걸리기도 합니다. ’인기‘라는 단어에 알레르기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과학도 어려운데, 그 어렵다는 철학이 융합된 과학철학에 관한 책을 읽으려면 마음의 준비를 단단하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Book소리의 독자들이라면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그동안 이 분야의 책들을 읽어보셨을 터이니 말입니다. 이 책은 ‘과학이란 무엇인가’와 ‘과학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에 해당하는 각각 4개의 질문에 대한 설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옮긴이는 역자서문에서 친절하게 그 내용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과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철학적 접근을 시도한다. 먼저 과학이란 무엇인가? 과학과 비과학을 구분 짓는 기준은 무엇인가?(1,2장), 과학이란 시간을 통해 계속해서 발전하는 것인가, 아니면 한 시대를 풍미하는 특정 문화처럼 어떤 시대에 권위 있게 받아들여지는 어떤 사고의 유형(패러다임)인가?(3장), 과학은 우리에게 있는 세상을 그대로 보여주는가? 아니면 과학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의존해 있는 것일까?(4장), 과학이 과연 가치중립적일 수 있는가?(5장), 과학과 도덕의 관계는 어떠한가?(6장), 또 다른 도덕적 주제인 인간 본성의 문제는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7장), 마지막으로 소위 말하는 ‘과학적인’ 세계관, 즉 인간사를 포함한 모든 세계 현상이 인과관계로 설명이 돼 있을 뿐만이 아니라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입장을 받아들였을 때 과연 인간이 진정으로 자유롭다고 할 수 있는가?(8장) 등입니다.

저자는 귀납법과 연역법으로부터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논의를 시작합니다. 논리학의 대표적인 방법론들이 근대 과학적 방법론으로 차용되었던 것입니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귀납적 방법은 여러 사례들에 대한 객관적 관찰과 실험을 통해 얻은 자료로부터 공통점을 추출하여 일반적인 원리를 찾아냅니다. 반면 연역적 방법은 이미 알려진 원리로부터 수학적․논리적 추론을 통해 개별 사물의 이치를 알아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정된 표본에서 보다 확장된 개념의 일반론을 이끌어 낼 수 있는지를 규명해야 하는 경우에 귀납적 방법론을 적용할 수 있는가 하는 딜레마에 봉착하게 됩니다. 특히 과학의 영역에서 귀납법은 믿을 수 없는 추론방법이라고 칼 라이문드 포퍼는 강력하게 주장하였습니다.

포퍼는 대표저서 <추측과 논박>에서 역사를 통하여 인간이 과학적 지식을 축적해온 과정을 철학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오래 전에 Book소리에서 소개한 적이 있는 <추측과 논박1>에서는 ‘추측’이라는 표제 아래 과학적 논리를 세우는 과정에 중심을 두었고, <추측과 논박2>에서는 ‘논박’이라는 표제로 묶어 과학적 논리가 성장해가는 과정을 정리하였습니다. 과학은 베이컨 이래로 중요한 철학적 화두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분명하게 정리되지 않고 있으나, “과학은 그것의 관찰적 기초나 또는 귀납적인 방법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데 반해, 사이비 과학과 형이상학은 사변적인 방법이나 또는 베이컨이 말했듯이 ‘마음의 기대’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특징지어진다는 것(칼 라이문드 포퍼 지음, 추측과 논박 2권, 24쪽)”이라는 일반적 견해에 포퍼는 동의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과학에서 귀납적 접근방식에 동의할 수 없다는 포퍼는 일종의 연역적 방법론을 대안으로 제시하였습니다. 즉, “귀납적 추리에 의존하지 않고 과학을 한다면 과학적 일반화가 참되다는 결론은 절대로 합리적으로 내릴 수 없는 반면, 특정 일반화가 거짓이라는 결론은 내릴 수 있게 된다(40쪽)”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포퍼의 견해를 ‘반증주의’라고 합니다. 포퍼의 주장은 일견해서 타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과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가지고 있는 불확실성 때문에 다양한 상황을 맞을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그래서 저자는 중간자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 같습니다. “과학적인 자세를 지니고 있다는 말은 어떤 경우에는 증거자료에 개방적이고 창의적이고 또 예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 과학자들은 경주마처럼 눈가리개를 하고 있을 때 가장 큰 발전을 이룬다.(68쪽)” 다만 포퍼의 반증주의가 아니더라도 지적설계이론이나 동종요법이론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는 비판적 평가방법이 있다고 했습니다.

저자는 토마스 쿤을 포퍼의 대안으로 제시합니다. 흔히 과학적 이성주의와 과학적 진보주의를 제안한 포퍼와는 달리 쿤은 과학적 사고의 변화가 이성적이라거나, 과학 자체가 진보한다는 생각을 부정한 것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쿤은 분명 과학이 진보한다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과학이론의 변화가 이성적이라고 여겼다는 점을 저자는 분명하게 합니다. 과학에 대한 쿤의 새로운 철학은 <과학 혁명의 구조>에 담겨 있습니다.

과학사학을 전공한 쿤은 과학이 발전한 과정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개발된 방법에 따라 지금까지 알려져 있지 않던 사실들이 확인되면서 추론에 의하여 세워졌던 이론을 뒷받침하는 경우도 있지만, 지금까지 통용되던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실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지금까지의 이론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이론이 제기되어 자리 잡게 된다는 점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의 과학의 패러다임으로 설명되지 않는 사실들이 누적되다보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되어야 하는데, 그 과정은 혁명이라고 부르는 사회현상에 다름이 없다고 생각하고, 이런 현상을 과학혁명이라고 규정한 것입니다.

저자는 과연 ‘과학이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는가?’하는 의문에 대하여 ‘그렇다’라고 하는 ‘과학적 실재론’이 맞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학적 실재론을 정당화하려면 세 가지 작업을 선행해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첫 번째는 과학적 실재론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론인 ‘미결정성’ 이론의 도전을 막아야 하고, 두 번째는 과학적 실재론의 유일한 지지 이론인, ‘기적은 없다’ 논증을 살펴보아야 하며, 세 번째로는 ‘비관적 귀납’으로 알려진 논증을 정면 반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등입니다. 근본적으로는 과학적 실재론자들이 불리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과학사를 돌아보면 과거의 과학이 실패한 사례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과학이 틀린 것으로 판명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 대하여 저자는 과학적 통찰력에 대한 판단 자체가 회고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과학적 실재론자가 해결할 문제는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즉, 과학자의 임무는 탐구대상에 대하여 보다 정확한 지식을 제공하는 것이 옳으며, 그 이상을 요구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2부에서는 과학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다각적으로 논의합니다. 그 첫 번째로는 ‘사전예방의 원칙’의 원칙입니다. 사전예방의 원칙이 기술발전을 저해하고, ‘유령 위험’에 대해 과민하게 규제적인 반응을 보이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지만, 건강이나 환경에 잠재적으로 크게 해가 될 수 있는 위험을 다룰 때는 나중에 후회하는 것보다는 안전한 것이 낫겠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하여 저자는 안전과 관련된 정책을 결정할 때, 근거가 되는 과학적 연구성과에 대한 평가를 책임지고 있는 과학자들이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다윈의 진화론에 기반한 생명윤리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저자는 자연도태를 결정함에 있어 생물은 이타적인가 아니면 이기적인가 하는 의문에 도전합니다. 진화론을 제창한 다윈은 이타주의가 진화에 기여했을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진화론의 설명하기 위하여 어떤 형태로든지의 이기주의가 작용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내놓았습니다.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에 대한 논란을 흥미롭게 전개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으면서 집단의 특성을 담은 문화적 유전자 미멤이 실재하는 것인가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저처럼 미멤의 실재에 대한 논란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조만간 정리된 이론이 나올 것 같습니다. 마지막 주제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내용인데, 아직까지는 인간의 자유의지로 행동이 결정된다는 입장인 것으로 정리되는 것 같습니다.

과학적 제국주의를 우려하고, 과학의 본질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는 것 자체가 과학이 발전하고 있다는 반증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질문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라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말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 같습니다. 과학철학이 추구하는 목표이기도 합니다. 다만 과학적 연구결과를 해석함에 있어 신중을 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입장입니다. 그리고 ‘과학의 의미는 무엇인가?’하는 질문은 과학이 혼자서 답변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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