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탄생/ 마이클 샤머 지음 / 김소희 옮김 / 이정모 감수 / 지식갤러리 펴냄

지난해 초 북소리에서 소개한 <과학의 변경지대>를 통하여 마이클 셔머를 만난 바 있습니다. 그는 1997년 과학주의 운동의 중심이 되고 있는 회의주의 학회(Skeptics Society)를 설립하고 과학 저널 『스켑틱』(www.skeptic.com)을 창간하여 현재까지 발행인과 편집장을 맡고 있습니다. 회의주의는 아직 생소한 영역입니다만, 국내에서도 관심을 가진 분들이 조금씩 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의 저서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만, 그는 과학의 근거를 바탕으로 사이비과학, 창조론, 미신 등에 맞서왔습니다.

2008년 온 나라가 광우병으로 몸살을 앓고 있을 때 읽었던, 셔머의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의 리뷰를 이렇게 시작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성적이기 때문에 내가 믿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는 신념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물론 믿게 되기까지 자세하게 뜯어보는 과정을 지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아니고 남이 확신하고 있는 것들이 내가 보기에는 분명 황당함이 있음에도 상대가 확신하고 있을 때 답답함을 느끼게 되기도 합니다.” 광우병위험에 대한 당시의 생각을 중심으로 썼던 리뷰는 하루만에 10만 페이지뷰를 기록하고 600건이 넘는 댓글이 달렸는데, 대부분은 제 생각에 동의하지 못하는 분들이 격한 마음을 여과없이 담아낸 것들이었습니다.

셔머는 <왜 이상한 것을 믿는가>에서 사람들이 이상한 것들을 믿는 까닭을 “첫째, 희망하기를 그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일반적인 방식에서 생각이 잘못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특수한 방식에서 잘못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전제하고 그러한 믿음을 검토하여 문제점을 찾아내려 합니다. 사람들의 믿음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발전하여 <믿음의 탄생>이 탄생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저자는 ‘사람들의 믿음’이란, ‘일상적이거나 비정상적인 현상에서 나름대로의 패턴을 찾아내고, 그런 패턴은 어떤 행위자가 특정한 이유에서 일으킨 것’이라고 보는 경향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찾아낸 패턴에 따라 특정방향으로 몰고 가면서 이해하려 노력한다는 것(믿음의존적 실재론)입니다. 이런 과정은 신경생물학적 작용에 의하여 일어나는 결과물이라고 설명합니다. <믿음의 탄생>의 번역을 감수하신 이정모교수님은 이 책의 내용을 아주 잘 정리해놓으셨습니다.

“1부 ‘믿음의 여정’에서는 세 사람이 겪은 초과학적 사건을 예로 들어 믿음의 문제를 제기한다. 2부 ‘믿음의 생물학’에서는 믿음을 형성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이 실재하기보다는 우리의 뇌에서 만들어져 일정한 방식으로 패턴화되고 전파되는 것임을 지적한다. 3부 ‘보이는 것에 대한 믿음’에서는 내세와 종교적 믿음, 외계인의 존재, 음모론에 대한 믿음의 실상을 다루고 있다. 4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에서는 정치상황에서의 첨예한 음모론이나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의 대립 역시 뇌가 만들어낸 믿음에 근거한다는 점을 지적한다.(5쪽)”

저자는 “내가 회의론자를 자처하는 이유는 믿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제대로 믿고 싶기 때문이다. 진실이었으면 하는 것과 실제 진실인 것의 차이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해답은 바로 과학이다.(9쪽)”라고 적고 있습니다. 믿음이 뇌의 신경생물학적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결과라고 한다면 셔머의 회의론 역시 비과학을 믿는 사람들과 방향은 다르겠으나 역시 믿음이 만들어지는 뇌신경생물학적 작용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믿음의 여정’의 화두는 ‘존재’라고 저는 보았습니다. 어느 날 음성으로 메시지를 전해 들었다는 칙 다르피노는 메시지의 내용이 ‘그 존재와 나와의 사랑’이었다고 합니다. 의학이나 과학을 신뢰하는 입장에서는 다르피노가 들었다는 음성을 환청이라고 해석할 것입니다. 하지만 죽기 전에 ‘나는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우리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아는 존재가 외부에 있나?’하는 의문에 답을 얻고자 하는 다르피노는 그 존재가 지구 밖에 있는 외계지적생명체일 수 있다고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의사로서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면서 영적탐구를 통하여 마음의 평정을 찾던 프랜시스 콜린스는 미시시피 서부의 캐스캐이드산을 오르면서 답을 구할 수 있었다는데, “신이 창조한 피조물의 위엄과 아름다움은 도저히 저항할 수 없을 정도였다. 모퉁이를 돌자 예기치 못하게 얼어붙은 수백 피트의 아름다운 폭포가 눈에 들어왔다. 탐구가 끝났다는 것을 깨달았다.(48쪽)”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는 주장에 주목할 만한 증거가 있다고 믿는, 마이클 셔머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기독교에 빠져들었다고 합니다. 다른 종교들은 문화적으로 결정되지만 기독교의 믿음만은 진정한 종교에 근거한다고 믿었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실험심리학을 공부하던 대학원과정에서 역개종을 하게 되는데, 그 이유 악마문제였다고 합니다. 신이 전지전능하고 선하다면, 왜 좋은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 하는 의문이 생긴 것인데, 사랑하는 사람이 끔찍한 자동차사고를 당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불행을 당한 많은 이들이 이런 의문으로 고민을 하는 것 같습니다.

종교에 대한 고 이병철회장의 의문에서도 볼 수 있는 대목인데, 신학자 김용규님은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신이 악을 만든 것이 아니다. 신은 오직 선하다. 그런데 인간이 신에게 등을 돌리고 그를 떠났기 때문에 악이 발생한다는 것이 기독교 교리다.”(주간조선 2012년 7월 12일자, [백만장자의 마지막질문 24] ‘신은 왜 히틀러나 흉악범같은 악인을 만들었는가?) 즉, “자연 악이든 도덕적 악이든 간에, 악은 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이래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에 의하면, 자연 악은 자연에 주어진 ‘자연법칙’에서, 도덕적 악은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에서 나온다. 다시 말해 신은 자연에 그 스스로 ‘우연적이고 자발적으로’ 운행하는 자연법칙을, 그리고 인간에게도 역시 그 스스로 ‘우연적이고 자발적으로’ 결정하여 행동하는 자유의지를 주었는데 고통·불행·죽음과 같은 모든 악이 여기에서 나온다.”(주간조선 2012년 7월 2일자, [백만장자의 마지막질문 24]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는 것입니다.

다시 셔머의 의문으로 돌아가 보면, 니체는 셔머보다 더 극적인 답을 내놓은 바 있습니다. 선조 대대로 루터파 신도였던 집안에서 태어난 니체는 소년시절 ‘꼬마 목사’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지만, 정작 그의 저서 <반그리스도교>에서는 그리스도교를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악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나약함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이라고 설명한 니체는 “그리스도교는 ‘악’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강한 인간을 ‘악인’으로 단정 지어 놓고서 철저히 배제했다.”고 하였습니다. ‘신, 영혼, 자아, 정신, 자유의지’ 등과 같이 존재하지 않은 것을 정말 존재하는 것처럼 말했는데, 이는 그리스도교의 바탕이 되는 유대교의 사제들이 필요에 따라서 신과 도덕을 변조한 것이라 단정하고, “그들은 자기에게 편리한 쪽으로 신을 이용한다. 사제들은 자신의 바람이 실현되는 사회를 ‘신의 나라’라 이름붙이고, 그 ‘신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을 ‘신의 의지’라 이름 붙였다.(프리드리히 니체, 비극의 탄생/즐거운 지식, 동서문화사 펴냄, 481쪽)”

<믿음의 탄생>에서 믿음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2부 ‘믿음의 생물학’에서는 패턴성과 행위자성에 관한 신경생물학적 설명을 담고 있습니다. 신경생물학적 연구성과를 인용하고 있어 쉽게 읽혀지지 않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패턴성은 학습하는 뇌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진화과정을 통하여 강화되는 방향으로 발전해온 것이지만, 아직 완벽한 프로그램으로 완성되지 않은 단계에 머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패턴이 있든 없든 의미 있는 패턴을 찾으려고 하는 이유는 생존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패턴찾기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미신과 마법은 수백만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반면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믿을만한 패턴을 찾으려는 노력의 역사는 일천한 관계로 패턴의 진화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하겠습니다.

믿음이 형성되는 과정에는 대뇌의 신경세포, 뉴런과 도파민과 같은 신경전달물질이 개입하게 되는데, 특히 전대상회피질과 전전두엽피질에서 있는 오류탐지네트워크가 연합학습을 통하여 잘못된 패턴을 걸러내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행위자성이 개입된다고 추정되는 뇌의 활동은 ‘마음이론’이라는 과정인데, 다른 사람들이 믿음, 갈망, 의도를 가진다고 인식할 뿐 아니라 자신의 믿음, 갈망, 의도 역시 인식한다고 합니다. 마음이론 과정이 일어나는 뇌구역은 전대상옆피질, 상측두고랑, 양쪽 측두극 부위입니다.

3부의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은 신의 존재와 외계인의 존재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종교의 본질에 대한 앎이 많지 않아 깊게 다루지 못합니다만 종교에서 말하는 내세와 관련하여 영혼의 실재를 생각해봅니다. 영혼의 존재를 말할 때 영혼의 무게가 21그램이라는 던컨 맥두걸박사의 실험이 인용되곤 합니다. 1907년에 발표된 것인데, 임종환자 6명의 몸무게를 죽음 전후에 측정하였더니 숨을 거두는 순간 갑자기 21그램이 줄어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실험은 인간의 영혼 역시 물질이라는 가정을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당시의 기술수준으로 측정이 얼마나 정밀하게 이루어졌는지 의문을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김용규님은 영혼은 물질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볼 수 없다는 입장으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영혼은 생명을 주관할 뿐 아니라 신의 영과 만나 자기를 초월하게 하는 기능이다.”라고 하였습니다.(주간조선 2012년 9월 22일자, [백만장자의 마지막질문 24] ‘영혼이란 무엇인가?’)

하지만 셔머는 “영혼은 한 사람을 대표하는 독특한 정보패턴이다. 우리가 죽은 뒤에 개인 정보 패턴을 존속할 매개체가 없는 한, 영혼은 우리와 함께 죽는다.”는 일원론적 관점과 “의식을 가진 천상의 물질이 있어 생명체의 독특한 본질이 죽음 뒤에도 생존한다.”고 믿는 이원론적 관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원론적 관점은 역시 천상의 물질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걸림돌이 될 것 같습니다. 신의 존재에 관하여 김용규님은 역시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24]에서 “신의 존재는 증명의 문제가 아니다! 믿음의 문제다!”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신의 존재는 증명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입장으로 보입니다. “과학은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에서 작동한다. 사실 초자연적․초과학적인 것은 없다. 자연적인 것, 정상적인 것 그리고 자연적 원인으로 아직 설명하지 못한 미스터리가 있을 뿐이다.(256쪽) (…) 시공간의 외부에 존재하는 초자연적인 신은 과학을 통해서는 알 수 없다. 그는 자연계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이다.(257쪽)”라는 셔머의 설명과 대비하여 생각해보면 두 견해가 만나는 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셔머는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에 납치된 항공기를 충돌시켜 붕괴시킨 9.11사건이 통제된 계획 아래 이루어진 폭파라는 충격적인 음모론을 인용하여 음모에 대한 믿음이 확산되는 이유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우리사회에서도 대선결과에 승복하지 못하는 일부 인사들이 대선개표과정이 조작되었다는 문제제기를 하고 있습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천안함 침몰사건 등 우리 사회에서도 음모론의 뿌리가 꽤 깊은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의 이런 음모론은 진보와 보수의 대결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두드러지고 있다고 보입니다. <믿음의 탄생>에서는 우리사회의 고질병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진보와 보수의 대립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 있는 내용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에서 논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에필로그의 말미에서 정리하고 있는 것처럼 저 너머에 있는 진실은 비록 찾기 어렵지만, 과학은 진실을 발견하는데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도구라는 점에 동의합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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