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계(Ecosystem)란 용어가 여기저기서 많이 쓰인다. 자연 생태계는 물론 문화 생태계, 기업 생태계, 지식 생태계, 경제 생태계, 인간 생태계 등 갖가지 분야에 생태계적 가치가 접목된다. 본디 생태계라 하면 ‘상호작용하는 유기체와 또 그들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주변의 무생물 환경을 묶어서 부르는’ 의미다. 살아있는 유기체 간의 상호작용이 이뤄지는 체계 쯤으로 보면 무리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의료체계도 일종의 생태계다. 의료기관부터 의료인력, 의료시설 등 수많은 의료자원이 상호 영향을 미치면서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생태계적 구조와 특성을 가장 적절하게 지닌 것이 의료체계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의료 생태계’란 말이 과하지 않다. 문제는 의료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생태계는 특정 개체가 크게 늘거나 줄어들면 균형이 무너지면서 결국 파괴된다. 지금 의료 생태계가 그렇다. 특정 의료자원이 과하게 늘거나 줄어들면서 불균형이 심각하다.

가장 뚜렷하게 균형이 무너진 것은 진료과별 의사 인력이다. 필수의료 서비스인 응급의료와 출산, 중증질환 치료 분야의 전문의 인력과 시설이 급감하고 있다. 응급의료 자원은 지역별 불균형이 심각하다. 응급환자 이송시간이 30분 이상 걸리는 읍면 단위 지역이 태반이고, 응급의료기관이 없는 군지역도 40여 곳이 넘는다. 이런 상황에서 ‘응급실 전문의 당직법’(개정 응급의료법 시행규칙)이 시행되면서 가뜩이나 취약한 응급의료 체계가 더욱 붕괴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지역응급의료센터가 센터 지정을 자진반납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출산의료체계는 고사 직전이다. 분만취약지가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올해 초 기준으로 분만실을 갖춘 산부인과 병의원이 없는 군단위 지역이 전국적으로 50여 곳에 이른다. 분만을 포기하는 산부인과가 속출하는데다 분만 의사를 희망하는 젊은 의사를 찾기도 힘들다. 최근 7년간 산부인과 전공의 지원율은 정원의 50~60% 수준에 그쳤다. 특히 지난 8월 산부인과 전공의 후기 모집에는 총 66명 모집에 단 2명만 지원하는 사상 초유의 일도 벌어졌다.

이유야 분명하다. 산부인과의 분만 관련 업무는 고된 반면 수가는 비현실적이고, 의료사고 위험 부담은 상대적으로 높다. 게다가 내년 4월부터는 무과실 분만사고 발생시 보상금의 일부를 의사가 부담해야 하는 관련 법규정이 시행에 들어간다. 젊은 의사들에게 산부인과는 일찌감치 비전이 없는 비인기과로 낙인 찍혔다. 흉부외과와 외과 쪽도 사정은 비슷하다. 흉부외과는 최근 수년간 전공의 지원자가 줄면서 2009년에는 25%의 지원율을 기록했다. 위기감을 느낀 정부가 수가를 100%를 인상하고, 또 전공의 정원을 줄인 덕분에 그나마 지원율이 30~40%대로 높아졌다.

의료 생태계의 중요한 축인 의료전달체계도 붕괴됐다. 엄밀히 따져 의료전달체계가 제대로 구축된 적도 없었다. 1~3차 의료기관으로 역할이 구분돼 있지만 뒤죽박죽이다. 1차 의료기관은 경증환자의 외래진료에 주력하며 2~3차 의료기관으로 통하는 게이트 키퍼 역할을 해야 하지만 전혀 그렇지 못하다. 의원간 치열한 환자유치경쟁과 저수가로 인한 박리다매식 진료, 경영난 해소를 위한 비급여 진료영역 확대 등으로 게이트 키퍼로서 기능을 잃었다.

중증환자의 입원중심 치료를 맡아야 하는 3차 의료기관은 경증환자 외래진료도 마다하지 않는다. 오히려 경증 외래진료 환자가 대형병원으로 쏠리고 있다. 의료전달체계의 허리나 마찬가지인 2차 의료기관은 갈수록 역할이 축소되고 환자가 줄어 폐업하는 곳이 늘어간다.  수도권으로 의료자원이 집중되는 현상도 점점 심해진다. 지방환자의 수도권 원정진료가 늘면서 유명 대형병원 인근에 ‘환자방’이라는 이상한 의료시설마저 등장했다.

의료 생태계 파괴의 주범은 정부의 근시안적 보건의료 정책이다. 모든 의료자원이 조화롭게 상호작용하며 상생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 경쟁하고 빼앗는 ‘제로섬게임’ 방식의 정책을 쏟아낸다. 한정된 재원 탓만 하면 ‘선택과 집중’이란 허울 좋은 명분 아래 경쟁적 구도를 조성했다. 특정 진료과에서 문제가 생기면 그 쪽을 지원하고, 특정 직역에서 반발하면 성급하게 달래기 위한 시혜적 정책을 반복한다. 직역간 밥그릇 싸움이니 직능 이기주의가 정부 정책에서 비롯됐다.

특히 건강보험 재정만을 고려한 땜질식 정책이 의료 생태계의 균형추를 뒤흔든다. 지난 4월부터 시행된 의원급 만성질환관리제가 대표적이다. 만성질환자와 의료기관이 능동적으로 질병 관리에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보다는 그저 의료서비스 이용 패턴을 바꾸는 쪽으로만 정책 방향이 맞춰졌다. 그러다보니 이 제도는 의료기관 기능재정립과 의료전달체계 확립이란 취지와 다르게 진료비 할인제로 전락했다. '경증질환 약제비 본인부담 종별 차등제' 역시 병원들의 편법적인 질병코드 기입 등으로 만성질환자 관리를 왜곡시키고 환자들의 비용 부담만 높인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환자들만 혼란스럽다.

 

응급의료체계를 개선하겠다고 추진한 이른바 ‘응급실 전문의 당직법’은 오히려 응급의료 현장에 극심한 혼란만 초래했다. 이것도 모자라 응급환자의 중증도에 따라 응급의료전달체계를 이원화하겠다는 방안도 꺼냈다. 기본적인 응급의료 인프라 부족과 비현실적인 응급의료 수가에서 초래된 문제를 엉뚱한 식으로 풀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이제라도 의료 생태계를 찬찬히 들여다봐야 한다. 의료자원간 상호 작용을 촉진시키고 단절된 관계를 유기적 관계로 복원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건강보험 재정 절감이란 잣대만 앞세워 단편적 정책만 남발하면 의료 생태계는 순환하지 못한다. 의료자원간 상호 작용이 끊겨 결국 어느 한 쪽이 파괴되고 만다. 자연과 마찬가지로 의료 생태계를 다시 복원하는 데는 엄청난 시간과 재원이 소모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정부가 말하는 ‘지속가능한 건강보험’ 역시 건강한 의료 생태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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