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의 사전적 의미는 짧고 간결하다. ‘의술로 병을 고친다’란 뜻이다. 어떤 이는 ‘인간이 인간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무언가’라고 감성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어쨌든 의료는 그 자체로 공익적이고, 또한 선한 의지를 담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자연 상태의 의료가 국가의 제도권 틀 안으로 들어가서 ‘의료제도’ 혹은 ‘의료체계’가 되면 상황은 복잡해진다. 의술로 병을 고치는 행위 자체의 의미는 퇴색되고 과정이 더 중요하게 두드러진다.  

누군가 신체 기능에 이상이 생겼다면 그 때부터 국가 의료체계의 간섭을 받게 된다. 어느 병원, 어떤 진료과를 찾을 것인가, 치료에 따른 비용은 얼마만큼, 어떻게 지불할 것인가, 어느 보험에 가입돼 있으며 얼마만큼 보험 혜택을 입을 것인가 등의 갖가지 상황에 직면한다. 고장 난 신체 기능을 고치고 회복시키는 것이 의료의 본질이지만 국가 의료체계에서는 그것보다 얼마나 적절한 절차를 거쳐 치료를 받고 비용을 지불했는가 하는 게 더 중요한 일이 돼버린다.

백혈병 환자 단체가 한 대학병원을 상대로 임의비급여 관련 진료비 과다청구 소송을 제기한 사건은 국가 의료체계가 지닌 복잡한 속성을 모두 안고 있다. 백혈병 환자는 병원에서 적절한 치료를 받았고, 병원도 환자를 위해 허가를 받지 않은 의약품이나 허가 범위를 벗어난 의약품을 사용하면서까지 최선의 진료를 했다. 하지만 최선의 진료가 문제가 된 것이다. 법이 그렇다.

한 국가의 의료체계가 어떤 형태냐에 따라 달라지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건강보험제도라는 틀 안에서 의료 행위가 이뤄져야 한다. 건강보험제도의 최우선 목표는 국민보건 향상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있다. 바로 지속가능한 건강보험제도를 위한 보험재정의 안정화가 아닐까 싶다. 위에서 언급한 임의비급여는 건강보험 재정과 무관치 않다. 임의비급여가 생긴 것도 건강보험에서 어떤 항목에 대해 급여 혜택을 줄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사실 건강보험제도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바로 급여기준이다. 어떤 질병에 얼마만큼 급여  혜택을 줄 것인가 하는 원칙이다. 현재 우리나라 국민은 누구나 건강보험에 의무 가입해야 한다. 의료기관 역시 선택의 여지없이 무조건 건강보험 요양급여를 행하는 기관으로 당연지정 된다. 그래서 건강보험 급여기준은 의료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국민과 의료서비스를 공급하는 기관 사이에 발생하는 모든 의료행위의 잣대가 된다.

이렇게 중요한 건강보험 급여기준은 어떻게 정해질까. 물론 나름의 절차와 원칙이 있다. 하지만 그 절차와 원칙이 올바른지, 혹은 적절한지 판단하기 쉽지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건강보험 재정의 범위 내에서 급여기준이 정해진다는 점이다. 재정이 넉넉하면 급여기준이 완화되고 적용 대상이 확대된다. 반대로 재정이 부족하면 급여기준이 강화되고 적용 대상이 축소된다.

국민들은 건강보험의 보장성이 낮다고 불만이 높다. 중증질환에 걸렸을 때 건강보험 적용을 받지 못하는 비급여 진료비 때문에 비명을 지른다. 실제로 그 충격은 만만치 않다. 가정경제를 붕괴시키기도 한다. 병원과 의사들도 비명을 지르긴 마찬가지다. 급여기준이 임상현장의 현실과 맞지 않고, 너무 모호해 급여비가 삭감되기 일쑤다. 급여기준에 따라 적용되는 수가가 너무 낮다보니 끊임없이 비급여 진료를 양산해 낸다. 그만큼 고가 장비 도입과 시설 투자도 늘려야 한다. 병원의 이런 경향은 또다시 환자들의 진료비 부담을 늘리는 악순환을 초래한다.  

결국 건강보험 재정이 문제다. 지속가능한 건강보험제도를 위해서라도, 환자와 병원을 위해서라도 건강보험 재정이 넉넉해져야 한다. 건강보험 재정의 상당 부분은 국민들이 다달이 내는 건강보험료로 마련된다. 보험료를 많이 내면 재정이 넉넉해지지만 국민들에게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건강보험제도는 도입 초기부터 국민들의 건강보험료 부담은 낮게, 그에 따른 건강보험 보장성도 낮게, 그리고 급여기준에 따른 수가도 낮게 책정해 놓았다. ‘저부담-저급여-저수가’로 불리는 ‘3저 시스템’이다. 1977년 건강보험 출범 이래 35년간 3저 시스템은 확고하게 이어져 왔다.

환자들의 불만과 의료계의 고민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됐다. 그래서 보험료 부담을 조금 더 지고, 건강보험 보장성을 더 확대하고, 급여기준에 따른 적정수가를 보장하자는 ‘적정부담-적정급여-적정수가’ 요구가 높다. 하지만 정부와 정치권은 요지부동이다. 국민 을 위해서라고 한다. 국민의 경제적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서 보험료를 많이 인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배려가 되레 국민들의 보험료 부담을 가중시켰다. 낮은 건강보험료와 이에 따른 낮은 보장성은 민간의료보험이 활성화되는 여지를 줬다. 건강보험 적용에서 제외된 비급여 진료비를 보장하는 각종 민간의료보험 상품 시장이 커졌다. 결과적으로 국민들은 이중으로 보험료 부담을 지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낮은 보장성과 의료수가는 영리병원을 앞세운 의료민영화의 욕구를 키웠다. 

최근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 결정에 따라 내년도 건강보험료는 1.6% 인상된다. 월평균 보험료로 치면 직장가입자가 평균 1,455원, 지역가입자가 평균 1,250원씩 오를 전망이다. 이렇게 보험료가 인상되면 소득 대비 건강보험료율은 5.89%가 된다. 이미 10%가 훨씬 넘는 OECD 주요 국가들에 비하면 한 참 낮다. 이런 기조라면 당분간 ‘저부담-저급여-저수가’가 지속될 것 같다. 환자들은 앞으로도 계속 진료비 부담에 비명을 질러야 할 테고. 반면 직장가입자와 보험료 부담을 반반씩 나눠져야 하는 기업이나 보험재정이 확대되는 만큼 국고지원을 늘려야 하는 정부는 마음이 한결 가볍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과연 누구를 위한 3저 시스템인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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