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병수의 가슴앓이>

오늘은 몽골에서 마지막 진료를 하게 된다. 항상 그렇듯이 떠날 때가 제일 서운한 법이다. 그런 만큼 오늘은 진료실에 앉아서 조금이라도 더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을까 생각하며 주민들을 맞았다.  

몽골에서 떠올리는 기생충의 추억

이번 몽골진료에서는 다행히 피부연고를 비롯해서 알러지 분야나 위장약 계통은 많이 준비해서 끝까지 모자라지 않았지만, 기생충약은 오전 진료 하자마자부터 5상자에 담아온 것이 바닥을 드러냈다.

진료 첫날부터 주민들에게 요충증의 전형적인 증상인 밤중에 항문이 가려워하는 아이들이 없는지, 혹시 대변을 보면 변에 간혹 회충과 같은 기생충이 보이지 않는지 꼭 물어보았다. 설사 내가 묻지 않아도 그들 스스로도 교육을 잘 받아서 그러한 것들이 기생충  질환을 의미하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먼저 얘기를 해줬다. 가족 중에 아이들이 있으면 예방적으로라도 기생충약을 주고, 기생충 질환이 의심되면 가족 모두가 두 번에 걸쳐 먹어야 한다고 설명하면서 약을 건네다 보니 진료가 마무리되기도 전에 동이 나 버렸던 것이다.

문득 어린시절 생각이 난다. 이도 많고, 기생충도 몸 속 가득 가지고 다닌다고 해서 아버지가 내 별명을 ‘동물원’이라고 했었다. 바닥에 떨어진 것을 주워 먹었거나 오염된 식수를 먹다보니 기생충 감염은 주변에 일반사였고, 냇물이나 강물에서 놀다보니 전염되기도 쉬웠다. 그 당시 우리가 가졌던 기생충도 대부분 요충과 회충이었다.

▲ 우리가 진료실 일부를 빌려서 활동하게 된 헨티 아이막(도)의 중심도시인 운드르항에 있는 종합병원 모습. 건물이 낡고 여기저기 파손된 흔적들이 보이지만 재원 부족으로 손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를 살던 사람들이라면 기억할 것이다. 학교에서 해마다 기생충 검사를 한다며 대변 봉투를 줬던 것을. 나는 어떻게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약을 먹었던 것 같다. 기생충약을 먹는 게 질리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해서 어느 날은 씹던 껌을 집어넣었는데도 유소견자라고 해서 약을 먹어야 했다. 그건 분명 검사하는 사람이 혼나보라고 일부러 검사 양성이라고 했을 것이다. 우리가 집에 가져가서는 약을 안 먹을까봐 담임선생님은 주전자와 컵을 교탁에 두시고 본인이 보는 앞에서 일일이 먹는 것을 확인하셨다.

3-40년 전 서양에서는 심근경색, 뇌경색과 같은 질환들이 흔했고, 기생충 질환들은 실제 예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드물었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그 반대였다. 몽골은 아직도 물이 깨끗하지 않은 곳이 많고, 초원에서는 고인 물을 걸러서 먹어야 하기 때문에 기생충 질환에 걸리기 쉽다. 위생 관리뿐만 아니라 식수에 대한 관리가 보건 정책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수줍어하며 구경하던 몽골 의과대학생

진료 첫날부터 끝나는 날까지 내가 사용하는 진료실에서 이것저것 계속 지켜보던 젊은 아가씨가 있었다. 강바트 어융 에르딘(r. Oyun-Erdene)이라는 스물 한 살의 의대생이다. 몽골 국립대학교 의과대학(Health Science University of Mongolia)에 다닌다는 어융 에르딘은 의과대학 3학년(한국에서 의예과 2년을 마치고 본과 1학년인 셈)인데, 지방 병원인 운드르항 종합병원에서 2주일간 실습을 나오게 됐다고 했다.

환자들을 진찰할 때는 아예 내 옆에서 환자의 목구멍까지 같이 들여다보려고 어깨를 부딪치곤 했는데, 하나라도 배우려는 녀석이 기특해 시간이 지나면서부터는 일일이 환자를 볼 때마다 상태를 얘기하고 필요한 진단 내용들을 설명해주었다. 어려운 질환을 보는 것도 아닌데 몽골말로 공책에 적어가면서 내 설명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 예뻤다.

▲ 통역사(왼쪽), 의과대학생 어융 에르딘(가운데)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

어융 에르딘 덕택에 알기 힘든 몽골의 의과대학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다. 몽골에는 10개의 의과대학이 있는데, 2개의 국립대학과 8개의 사립대학이 있다고 한다. 의과대학 과정은 예과 2년과 본과 4년으로 한국과 같은 6년제를 택하고 있으며, 의과대학 등록금은 다른 일반 대학 등록금 보다 비싸서 한 학기에 100만 투그릭이다. 다행히 각 학기마다 절반은 국가에서 보조해 주기 때문에 실제로 의과대학생들이 부담하는 금액은 50만 투그릭(한국 돈으로 45만 원 정도) 정도라고 한다.

그리고 몽골 처자 어융 에르딘이 다니는 몽골 국립대학교 의과대학의 경우에 자기와 같은 3학년의 학생 수가 400명이라고 말해서 나는 깜짝 놀라 여러 번 물어봐야 했다. 나중에 자료를 찾아서 보니 2009년 기준으로 대한민국의 의사 수가 한의사 포함하여 인구 1,000명당 1.94명이고, 영국이 2.71명으로 통계에 나오는데, 몽골은 훨씬 그 이전인 2003년 통계로 인구 1,000명당 약 2.7명의 의사를 배출하고 있었다. 몽골 전체 인구가 280만 명 정도인 것을 고려하면 상당히 많은 의사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셈이어서 의과대학생 수가 많은 것도 이해가 갔다.

문제는 그들이 의사가 되고 나서 취직자리가 없어서 힘들어 한다는 것과 의사들 중 대부분이 수도인 울란바타르에 있다 보니(2003년 기준으로 인구 1,000명당 울란바타르 4.4명, 아이막 1.7명 분포) 의사의 지역적 불균형 분포가 또 한 문제가 되고 있다고 한다. 2005년 자료에는 323개의 솜(한국의 ‘군’에 해당)지역에 우리의 보건소와 같은 병원들이 있고, 다행히 의사들이 어느 정도 근무하고 있지만, 15개 솜에는 의사가 없이 간호사들이 지역의료를 담당하고 있을 정도로 지방에는 의사들의 부족한 실정이라고 한다. 이러한 지역적 의사 수 불균형 분포를 해결하고자 몽골에서는 2006년 이후로 의과대학 졸업을 앞둔 2년 동안 지방 병원에서 전문 의사의 지도 아래 근무하게 하는 정책을 만들었다고 한다.

의사들의 보편적인 수입은 30만 투그릭 정도로 보통 직장인보다 조금 많은 수준으로 적은 편이고, 경력 많은 의사는 60만 투그릭(한국 돈으로 50만 원 안팎)을 버는데 몽골에서 의사들은 그다지 인기 있는 직업은 아니라고 한다. 그나마 수련을 마친 의사들도 직장에 자리를 잡기가 쉽지 않은 것은 마치 1950-70년대 당시, 한국의 의사들이 병원 취직이 어려워서 미국으로 대거 이민을 갔던 것과 지역마다 의료시설 부족을 겪었던 것 등 비슷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몽골을 떠나면서…

서둘러 출발을 해야 겨우 한밤중이라도 울란바타르에 도착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오전 진료만 하고 일정을 마치기로 했다. 이미 마을 전체에 공지를 한 때문인지 주민들도 오전이 지나자 더이상 찾지 않았다.

진료실의 짐을 정리하면서 어융 에르딘 학생과는 통역사를 통해서 인사를 나눴다. 열심히 배워서 몽골의 훌륭한 의사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모자라서 한국에서부터 사용하던 청진기와 몇 가지 기구들을 선물로 주었다. 진료실에 함께 있으면서 눈여겨보니까 그 친구의 실습  가운에는 청진기나 펜 라이트 등 지금쯤이면 필요할 실습 도구들이 보이지 않았던 기억이 나서 기념으로 주었던 것이다.

몽골 사람들은 손님이 올 때 마을 어귀에서 맞이하고, 갈 때는 다시 마을 어귀에 먼저 기다리면서 배웅을 하는 풍습이 있다. 우리 일행들도 아쉬움을 마지막으로 전하며 주민들과 인사를 나눈 후 버스를 타고 다시 오던 길로 돌아가게 되었다.

▲ 우리가 묵었던 숙소 가까이 살던 아이들. 해가 저물어가는 중에도 누나(왼쪽)의 설명을 들으며 공부하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6박 7일 중 오가는 시간 빼고 며칠 안 되는 진료였지만, 올해와 같은 경우에는 몽골의 의료 현황에 대해서 진지하게 알고 싶었는데, 여러 가지로 자세히 파악할 수 있어서 보람이 더 컸다. 내년에는 아이들의 A형간염 예방접종에 대해서 고민을 미리 해보려고 한다. 필요한 약품들도 더 챙겨서 오는 것도 잊지 말자.

1년 후의 계획을 이것저것 하면서 차창 밖을 보니 돌아가는 길의 절반도 안 왔는데, 해가 지고 있는데다가 억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몽고에서 비는 좋은 징조로 여기지만, 빗물에 길이 여기저기 파손되어 또 가는 여정이 평탄치 않겠구나 하는 걱정에 졸음이 싹 가신다.

 

저작권자 © 라포르시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