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에 미친 조선의 지식인들 / 김남일 지음 / 들녘 펴냄

의과 의료기기를 한방진료에 사용할 수 있다는 주장이나 천연물신약이 한방의료영역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의료계의 반발이 고조되는 등, 최근 의료계와 한의계의 갈등의 골이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슈가 대두될 때마다 한의학의 한계를 보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합니다.

천연물신약이 이슈가 되고 있다는 뉴스를 듣고, 제가 식약청에서 근무할 때 주관했던 독성물질국가관리사업에서 하던 생약제의 독성기준을 정하는 프로그램이 생각났습니다. 생약제는 자연에서 얻을뿐더러 독성이 있더라도 법제라고 하는 가공단계를 거쳐 독성을 순화시키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전문가들마저 생각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뒷받침할 수 있는 과학적 근거는 그리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독성을 평가하는 방법마저도 막연한 것도 현실입니다.

독성물질국가관리사업은 미국정부가 주관하고 있는 National Toxicologic Program을 우리 실정에 맞게 만든 것입니다. 미국의 제도가 일반 화학물질의 독성을 규명하여 국민들에게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반면, 독성물질국가관리사업에서는 생약제의 독성관련 정보를 표준화하려는 의도를 담고 출발한 것이기도 합니다. 동아시아 국가에서는 아직 인프라가 구축되어있지 않아서, 선진국에서는 관심대상이 아니라서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생약제를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시스템을 구축하던 초기단계를 넘어 이제는 연간 시험대상 항목을 확대하여 우리나라에서 주로 사용하고 있는 생약재의 독성관련 정보 데이터 구축이 어느 정도 이루어져야 할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사업이 방향을 잃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처음 사업을 주도한 입장에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의료계와 한의계가 첨예하게 부딪히기 시작할 무렵, 해결방안을 찾기 위하여 관련 자료를 찾아 읽기도 하였습니다. 출발은 역시 뿌리를 찾는 것이 좋다는 생각에서 일본의 과학사가인 야마다 게이지씨의 <중국의학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로 시작하여 김두종교수님의 <한국의학사> 등을 거쳤습니다. 특히 의료계와 한의계를 아우를 수 있는 방안모색을 목표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1930년대에 의료계와 한의계가 신문지상을 통하여 붙었던 논전의 경과를 담은 <한의학은 부흥할 것인가>를 비롯하여 해방 이후에 진행되었던 의료일원화 움직임에 관한 다수의 서적을 찾아 읽었습니다.

제가 한의학을 전공하지 않아 한의학의 본질에 이르는 것은 어려웠습니다만, 현대의학의 주요 방법론이라고 할 과학적 방법론은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어 의학과 한의학이 오늘에 이르기까지를 비교하는 것은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자료를 찾다보니 서양의학이 발전해온 역사를 기록한 자료들이 풍부한 반면 한의학이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역사가 제대로 정리된 자료는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김남일교수님의 <한의학에 미친 조선의 지식인들>이 반갑게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유의열전’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것처럼 의학에 조예가 깊었던 유학자들에 대한 기록을 정리하고 있어 한의학의 역사를 살피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무래도 생경한 유의(儒醫)가 무엇을 한 사람인지 부터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 같습니다. 저자는 “일반적으로 유의란 유교적 사상을 바탕으로 의학의 이치를 연구한 사람, 즉 학문적으로 유학적 색채를 가지고 있는 한의사집단”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들을 세분하여 환자를 진료한 유의, 의서를 편찬한 지식인 유의, 의학적 식견으로 질병을 토론한 유의 등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9쪽). 저자가 다루고 있는 인물들이 관직에 들어오는 경로를 보면 내의원이나 혜민서와 같이 환자진료를 담당하는 사람을 뽑는 의과를 통하거나, 과거를 통하여 관직에 들어온 다음 의학을 공부하여 내의원에서 일하게 된 경우로 구분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유의라는 분들이 실제로 한의사로서 진료업무를 하기보다는 의학(물론 중국에 전해진 서양의학을 접한 실학자가 서양의학을 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리의 전통의학에 해당될 것입니다)에 관한 서적을 읽고 의학의 이론을 공부한 분으로 ‘한의사’라기보다는 ‘한의학자’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인물들이 지방관직 혹은 지방관직을 수행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어 그들이 환자진료를 행하였다기보다는 의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보건행정을 펼쳤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습니다.

조선시대에 중앙 의료기관으로는 내약방(內藥房)·전의감(全醫監)·혜민국(惠民局)·동서활인원(東西活人院 : 또는 동서대비원)·제생원(濟生院)·종약색(種藥色)·의학(醫學) 등이 있었고, 지방 의료기관으로는 의원(醫院)·의학교수원(醫學敎授院)·의학교유(醫學敎諭)·의학원(醫學院)·의학승(醫學丞)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가운데 의학(醫學)은 병(兵)·율(律)·자(字)·역(譯)·산학(算學) 등과 더불어 6학의 하나로 설치된 의학교육기관이었으며, 중앙 의료기관인 전의감·제생원·혜민서 등에서도 각각 의생방을 설치하여 의원을 양성했다고 하는데 이는 의료기관에 의사양성소를 병설한 독특한 제도라 하겠습니다. 지방에서는 의원·의학교수관·의학교유에서 의원을 양성했다고 합니다. (다음백과사전에서 인용)이와 같은 의학교육기관에서 양성한 의원들은 실제로 환자진료를 업으로 하는 자로 신분은 중인에 속하였을 것이나 특히 의술이 뛰어나 내의원에 발탁되어 왕족 혹은 중앙관료의 치료를 담당하게 되면서 고위관직에 오르는 자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내의원을 책임지는 위치에 오르는 경우도 있었지만, 내의원의 책임을 맡는 이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특히 의학에 밝은 정부고관들 가운데서 뽑아 임명하여 의관들을 관리감독하고, 특히 왕실 사람들을 진료할 때 진단과 치료의 방향을 결정하는 논의를 주관한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최근 읽고 있는 <착각의 심리학>의 저자 데이비드 맥레이니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능력과 성취 등을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자신의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부정적인 측면을 제거해버리는 ‘자기위주편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엉뚱한 이야기를 인용하는 이유는 저자가 적고 있는 다음과 같은 구절 때문이기도 합니다. “조선 전 시대를 통틀어 의학에 조예가 깊었던 유의는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다. 그들은 자신의 학문적 소양을 바탕으로 자연과학에 속하는 의학연구에 몰두 하였고, 심지어 이를 생업으로 삼는 이들조차 있었다. 유학적 자연관을 밑바탕에 깔고 의학 연구에 미진한 이들의 수준은 매우 높아서 한의학을 연구하는 계층 가운데 가장 윗자리를 차지하면서 학문 발전을 선도하였다.(10쪽)”

필자가 보기에는 조선시대 유의가 공부한 의학은 자연과학적 접근이라기보다는 서지학적 접근이라고 해석함이 옳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이를 응용과학에 속하는 현대의학의 개념을 차용하여 전통의학에 자연과학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의복을 입히려는 의도가 아닌가 싶다는 것입니다. 서양의학 역시 과거에는 경험에서 얻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환자진료가 이루어지던 시절이 있었지만, 동양의학에서는 외면하였던 사후부검을 통하여 얻은 자료들을 통계적 분석을 통하여 공통점을 찾고 이들을 환자의 병증과 연관시킴으로서 병인을 구하는 방식으로 발전해온 반면, 동양의학은 환자의 병증을 음양오행이라는 철학적 사유를 통하여 설명하고 있어, 이런 방식을 과학적이라고 정의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특히 한의계가 자랑하고 있는 <동의보감>의 바탕에 깔려있다는 도교적 논리를 과학적이라 할 수 있는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간혹 해석이 어려운 부분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저자가 인용한 김우선의 <유의소변술(儒醫笑變術)>의 한 구절입니다. “유학자가 변신하여 의사가 되니 이는 정말로 웃음살 일이로다. 비록 그러하지만 유학자는 도(道)를 다스리는 사람이고, 의사는 병을 다스리는 사람이니, 그 치료하는 기술은 서로 비슷하다. 그러므로 의사를 병공(病工)이라 하였으니 병을 치료하여 낫게  하여 그 집안사람들로 하여금 근심을 변화시켜 웃는 얼굴로 만드니 이것은 웃을 일이다.(51쪽)”는 구절의 뒷부분, 의술을 통하여 환자의 근심을 덜어준다는 의미해석보다 앞부분의 유학자가 의원이 된 것이 왜 웃음살 일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아마도 의술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중인출신 의관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며, 먹고사는데 문제가 없었을 유학자들이 의술을 행하는 경우 대부분 치료비를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즈음도 간혹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의술(醫術)은 인술(仁術)”이라는 말이 무료진료를 한 유의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한 부분입니다. 따라서 유의가 중인이나 하는 치료비를 받는 의술을 행한다면 아무래도 남들에게 웃음을 사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유의를 바라보는 조선사회의 시각이 이럴진대 유의들이 문화계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이 이들이 의술로 인하여 경제적으로 풍요로울 수 있었기 때문(170쪽)이라는 저자의 판단이 타당한가 싶기도 합니다.

한 가지 더 사족을 붙이자면, <동의보감>에 관한 저자의 입장이 오락가락하는 면이 엿보인다는 점입니다. 제가 알기로도 <동의보감>은 당시 중국이나 일본에까지 그 명성이 자자할 정도로 유명한 의서였다고 합니다. <동의보감>이 유네스코 세계 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일은 대단하고도 당연한 일이라는 점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이 한국에서 대단한 공신력이 있다(32쪽)하면서도 <의문보감><방약합편> 등 <동의보감>의 업그레이판 서적들이 출판되었다고 하였을 뿐더러(103쪽), “강명길은 1799년 왕명에 따라 <제중신편>이라는 의서를 간행하는데, 이 책은 <동의보감>의 단점을 극복하고 활용도가 높은 의서를 만들고자 하는 정조대왕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제중신편은 동의보감에서 ‘산번보루’라 하여 번잡한 것은 베어내고 빠진 것을 보충할 뿐 아니라 잘못 인용하고 있는 문장을 바로 잡았다고 적고 있습니다.(196쪽) <동의보감>이 완성도 높은 의서로서의 위치를 인정받으려면 편찬 이후에 드러난 문제점을 반영하여 보완하는 작업, 즉 개정판을 내는 작업이 이어졌어야 할 것입니다.

저자의 의도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1525년 간행되었다는 전염병 관련 의서인 <간이벽온방(簡易辟溫方)>에 서문을 보면 조선시대 의학의 수준을 알 듯도 합니다. “갑신년(甲申年, 1524년) 가을에 백성들이 죽어나가는 이들이 많았는데, 을유년(乙酉年, 1525년) 봄에 이르러서도 그치지 않았다. 임금님(중종)께서 이를 일찍부터 근심스러워하며 제사까지도 거행하셨다. 또한 의관들을 나누어 파견하여 약이(藥餌)를 가지고 와서 구제하도록 하셨지만 두루 효과가 나타나지 않음을 염려하셨다. 이에 특별히 행부호군(行副護軍) 김순몽, 예빈사주부(禮賓寺主簿) 유영정, 전내의원정(前內醫院正) 박세거 등에게 명령하셔서 모든 처방 가운데 온병(溫病)을 치료하는 법들을 모아서 일편(一篇)으로 하여 <간이벽온방)이라 이름하도록 하셨다.(248쪽)”

가을에 시작한 전염병을 겨울을 지나 봄까지 제압할 수단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당시 알고 있던 모든 처방가운데 온병치료법을 모아 골라낸 치료법을 묶어 만든 의서를 배포한 것으로 할 일을 다했다는 식은 아니었을까요? 특히 내용을 보면, “학술적인 내용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당시 유행했던 전염병의 증상을 조목조목 나열하면서 위험성을 경고하고 그 치료법을 상세하면서도 요점있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처방 내용에 있어서도 전염병의 예방법, 예방 처방, 치료법, 치료 처방 등을 기록하고 있다. 특별히 처방 약물에 있어서도 한두개의 약물로 구성되어 있는 처방들을 많이 기록하고 있어서 궁벽한 시골에 거주하고 있는 백성들을 배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249쪽)” 한 두 개의 약물로 구성된 처방으로 예방 혹은 치료될 전염병 같았으면 가을부터 다음 해 봄까지 기승을 부렸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궁벽한 시골에서 구하기 쉬운 약제를 알려 환자를 돌보는 가족들이 나름대로는 무언가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은 아닐까요?

“한의학이 백성들의 삶 속으로 깊이 파고든 조선 후기에 들어가면 활용이 간편한 의학지식들이 실생활 속에 널리 보급되었고, 더불어 이것들을 생활의학서의 형태로 간행했다.(258쪽)”는 저자의 설명은 양생(養生)에 주안점을 두었던 한의학을 치료의학으로 발전시키는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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