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정신 건강 증진 종합 대책’에 의하면 내년부터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생애주기별 정신건강검진이 실시될 예정이다. 취학 전 2회, 초등생 2회, 중고들 각 1회, 20대 3회, 30대 이후 각 10년마다 2회씩 정신건강을 묻는 문답지를 개인들에게 발송한다. 이 문답지에 본인(아동의 경우 부모)이 답을 기입하여 회신을 하면, 위험군인지 아닌지를 가려내어 위험군인 경우 정신건강증진센터 등을 통한 정신건강서비스를 제공하고 정신건강의학과 등의 상담들을 적극 권장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정책은 한국의 자살률이 가장 높고, 자살시도나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이 제대로 된 정신건강서비스를 받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착안한다. 취지는 공감할 만하다. 대한민국이 자살공화국이라는 사실과 정신건강의학과에 대한 편견과 낙인에 대한 우려로 인해 꼭 필요한 사람들조차 정신건강서비스를 받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자살을 막고, 국민정신건강을 높이기 위해서 반드시 전 국민을 대상으로 정신건강 선별검사를 시행하는 게 옳은지에 대해선 찬성하기 어렵다. 전 세계에 유래가 없는 대단히 실험적인(?) 정책인데다가 과연 추후관리를 제대로 할 정도의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는지도 의문이다. 이에 대한 문제점들을 심층적으로 짚어보자.

학생정서 행동발달 선별검사가 보여주는 낭패

복지부가 시행하겠다는 생애주기별 정신건강검진 이전에 교과부가 이미 실행하고 있는 ‘학생정서 행동발달 선별 검사’가 있다. 2008년부터 작년까지 초1, 4학년과 중·고 1학년에 시범적으로 실시하던 검사였는데, 올해 학교폭력의 문제가 불거지면서, 근절대책의 일환으로 대상이 전체 학생들로 확대하였다.

올해 4월부터 전국의 702만 명의 초중고 특수학교 학생들에게 정신건강검진을 알리는 가정통신문이 배포되고, 학교에서 설문지를 나눠주고 작성하게 했다. 수거 후 1차 검사에서 높은 점수가 나온 학생들을 ‘관심군’으로 분류하고, 해당 학생의 부모에게 알린 뒤, 불안, 우울, 과잉행동증후군, 폭력성, 자살 등을 묻는 2차 검사를 상담교사와 보건교사가 실시한다. 여기서도 높은 점수를 보이는 학생을 ‘주의군’으로 분류하여 지역에 있는 정신보건센터나 위(Wee)센터 등으로 보내어 3차 검사를 받게 하고, 여기서 ‘위험군’으로 분류되면 정신건강과 등 전문기관으로 의뢰하게끔 조치한다는 것이다.

과연 이런 식의 검사가 옳은지에 대해서 논의된 바 없지만, 더 큰 문제는 교과부가 당초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엄청나게 커진 데 있다. 전체 학생 중 약 30%에 달하는 230만 명이 관심군으로 분류되어 2차 검진을 받게 되었다. 당초 6월까지 검진업무를 마칠 계획이던 교과부는 12월 말까지로 사업기간을 연장했다. 보건교사와 상담교사의 업무가 폭주하는 가운데, 무슨 검사를 했다는 건지 안내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내 아이의 정신에 문제가 있다는 통보를 받아든 학부모들은 놀라서 항의전화를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어찌나 항의전화가 빗발쳤던지, 교과부는 각 급 학교에 공문을 보내 “학부모 푸념이 길어지면, 손님이 왔다고 하며 전화를 끊어라”는 웃지 못 할 지침을 내렸다. 학생들은 대수롭지 않게 설문지를 기입했다가 2차 검진을 받아야 한다는 결과지를 받자, 교실에서 울음을 터뜨리거나 인터넷에 이제 어떻게 되는 거냐며 걱정하는 질문을 올리기도 했다. 오히려 평소에 우울 성향이 있거나 스트레스 등의 문제를 스스로 느끼는 학생들은 곧이곧대로 “매우 그렇다”에 기입하지 않고, “전혀 그렇지 않다”에 표기하여 이 난리 북새통을 피해갔다.

더 심각한 문제는 2차 검진에서도 주의군으로 판정되어 3차 검진을 받아야 할 대상자들이 35~70만 명 정도에 달할 것이란 예상이다. 전국의 이 많은 학생들에게 3차 검사를 시행할 정신보건센터와 위(Wee)센터의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각 급 학교에서는 이들 센터에 대기증이라도 발급받기를 원한다. 학교는 대기증이라도 발급받아야 이 지난한 업무를 다 수행했다는 표식이 남기 때문이다. 엄청나게 많은 업무가 행해졌지만, 실질적으로 무엇이 해결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학생들의 정신건강이 생각보다 매우 위태롭다는 흐릿한 정보(이걸 꼭 전수조사를 통해 알아야 했을까?)와 1~2차 검진을 통해 문제가 있는 것으로 나타난 학생들의 명단과, 그 학생들의 ‘나는 주의군이다’라는 뜨악한 자의식이 남았을 뿐이다.

각자 부모의 손에 이끌려 정신건강의학 클리닉을 찾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직 이들에게 공적으로 어떤 상담이 제공된 바는 거의 없다. 오히려 이들에 대한 정보 유출의 가능성이 남았다. 교과부는 1,2차 업무를 반드시 학교에서 처리하라고 지침을 내렸지만, 설문지 통계처리 등의 업무를 감당하지 못한 전국의 1000여개 학교들은 1.2차 업무를 사설용역업체에 맡겼고, 이 업체들 역시 다른 영세업체에 또 다시 하청을 준 사실이 밝혀졌다. 업체들은 학생들의 이름 대신 일련번호를 썼기 때문에, 개인정보 유출 등은 없다고 해명했지만, 과연 개인정보유출이 절대 없을 지는 의문이다.

이미 전국의 학교에서는 학생 정서행동발달 선별 검사를 통해 전국민 생애주기별 정신건강검진이 행해질 경우 어떤 후폭풍을 겪을지를 다 보여주고 있다. 생색내기용 졸속사업으로 시행했다가 수많은 문제점들을 이미 드러내고 있는데, 이에 대한 평가도 내기 전에 비슷한 사업을 전 국민을 대상으로 넓히겠다는 ‘패기와 의지’는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가. 일단은 이 사업에 대한 면밀한 평가를 통해 전 국민 정신건강검진을 시행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국가 대 개인 문제를 위험한 개인의 탓으로

전 국민 생애주기별 정신건강검진이 실효성이 있느냐 없느냐 보다 더 깊이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권력관계에 대한 담론이다. 국가는 개인의 정보를 수집하고 관리하는 것을 원한다.  푸코가 지적하였듯이 통치의 권력은 앎에서 나온다. 문제는 세세한 정보들이 집적되고, 집적된 정보가 새로운 앎을 만들고, 그 앎이 권력으로 작동하게 되었을 때, 앎의 권력을 행사하는 국가 앞의 개인들은 완전히 발가벗겨진 채 무력해진다는 사실이다.

가령 처음 학생정서행동발달선별검사의 데이터를 축적할 때, 행정당국도 ‘관심군’, ‘주의군’, ‘위험군’ 등의 분류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앞으로 어떻게 활용할지 잘 모를 수 있다. 그런데 데이터가 축적되면서 각 군이 어떤 특성을 지니는지 경향성을 감지할 수 있다. 즉 ‘주의군’의 자살율이 높다고 치자. 이에 대한 특별한 감시가 따라 붙는다. 이렇게 되면 담임교사가 휴대폰을 불시에 검문할 수 있다. 그 정당성은 그가 ‘주의군’이라는 객관적 사실에서 나온다. 또는 심각한 폭력사건이 일어났는데, 가해자가 아니나 다를까 ‘위험군’이었다 치자. 당연히 전체 ‘위험군’에 대한 관리감독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그들은 출석부와 생활기록부에 표시를 해야 한다는 조치가 생긴다. 그 정당성은 그가 ‘위험군’이라는 사실에서 나온다. 논의는 동어반복적인 폐쇄회로 속에 갇히며, 그 외의 담론은 불필요해진다.

국가는 사회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위험을 관리하고자 한다. 광범위한 앎을 바탕으로 개인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고, 감시를 통해 위험한 개인을 선별하여 배제한다. 이를 통해 위험요인을 통제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위험 관리는 전체 시스템의 잘못을 문제가 있는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효과가 있다. 나아가 정상/비정상의 이분법을 통해 소수의 위험한 개인과 다수의 위험하지 않은 개인들 간의 대립으로 문제를 이끌어간다. 시스템과 개인의 관계는 망각되고, 시민과 시민들 간의 연대는 파괴된다.

예를 들어 학생들의 자살률이 높은 것은 경쟁 위주의 교육과 폭력적인 학교문화 등에 원인이 있다. 그러나 정신건강검진을 실시해 학생들을 정상과 비정상을 나눈다. 보라! 같은 환경이지만, 누구는 정상이고, 누구는 비정상이다. 이제 문제는 비정상인 개인에게 있는 것이 된다. 비정상으로 판명된 학생에게 학교가 상담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검진의 목적이라지만, 행정당국의 진짜 목적은 그가 자살하지 않는지 잘 감시하는데 있다.

잘 감시했지만 진짜로 자살을 했다면, 그건 그 학생의 탓이다. 그간의 상담 및 감시 자료가 이를 뒷받침하는 알리바이가 된다. 비정상 판정을 받은 학생이나 정상 판정을 받은 학생이나 경쟁적인 학교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검사결과는 두 사람이 다르다는 것을 권위 있게 증명한다. 따라서 정상인 학생이 비정상인 학생의 고통에 동조할 이유가 없다. 나는 그와 다른 정상이기 때문에, 나는 그와 다름을 끊임없이 증명하면서 비정상인 그를 배제하는데 암묵적으로 동의한다. 자살이 일어나는 사회적 기전을 개선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협동하는 일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자살은 ‘심리’ 탓이고, 이제 정상인에게 중요한 것은 혹시 나도 그러한 ‘심리’에 물들지 않을까하는 ‘공포’와 싸우는 일이다.

가급적 ‘위험한 친구’를 멀리해야 하기 때문에, 개인들 간의 연대는 파괴된다. 혹시라도 비정상이 되어 사회로부터 배제되지나 않을까 하는 그 공포는 심리치료의 영역이 되어 자본주의 시장 안으로 흡수된다. 불안과 공포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좋은 ‘시장’이다.   

정신건강과와 상담전문가 시장의 프로모션 마케팅?

한동안 자기계발 등에 대한 담론이 넘쳐나더니, 이제는 ‘힐링’의 시대이다. 자기계발 담론으로 더 이상 쥐어짤 것이 남아 있지 않고, 실제로 무한경쟁체제에서 지쳐 쓰러지는 개인들이 속출하자 이제 상황은 병리학적으로 돌아간다. 한국의 자살률이 세계 최고이고, 우울증이 급증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정신건강의학과나 전문적인 상담을 받는 인구는 적다.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 등 사회적 인식이 낮은 탓이기도 하고, 밀착된 사회에서 낙인이라도 찍힐까봐 두려워하는 측면도 있다. 전혀 근거 없는 두려움이 아니다. 우울증 등으로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상담 받은 병력만으로도 민간 보험가입이나 취업 등에 실제로 불이익이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해 개선하겠다는 것이 ‘정신건강증진종합대책’의 일부이기도 하다.

연간 자살 시도로 병원을 찾은 4만 명의 사람들 중 10%만 정신건강과의 치료를 받았다는 통계가 말해주듯이 그동안 전문적인 상담을 요하는 많은 사람들이 정신건강의학과나 전문상담인력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한국사회에서 정신의학적인 증상들은 정신건강의학과가 아니라, 역술가, 종교인, 1차 의료기관, 지인 등이 맡아왔으며 최근에는 인터넷포털이나 <대국민토크쇼-안녕하세요>같은 방송을 통해서도 신경증 등 제대로 상담 받지 못한 문제 사례들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전문상담서비스에 대한 국민적 인식을 높이고, 전문상담을 이용한 경험을 축적하는 것이 필요하기는 하다.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전국민 정신건강검진을 반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문상담인력을 양성하는 기관 등에서는 상담사 등이 앞으로 엄청난 수요가 있는 직업이라며 쾌재를 부르기도 한다. 그동안 학교의 상담교사도 대부분 비정규직이었던 것 등을 감안하면, 전 국민 정신건강검진을 계기로 전문상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높이는 것은 바람직한 면이 있다.

하지만 전 국민 정신건강검진이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공공적 의미의 정신건강서비스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갈지는 의문이다. 전 국민 정신건강검진은 앞서 설명한 배제의 메커니즘을 통해, ‘정상임을 증명해야 하는 불안’으로 나아갈 공산이 크다. 즉 멀쩡한 사람까지 정상임을 입증하려는 수요가 창출될 가능성이 있으며, 이런 수요는 지금도 턱없이 부족한 정신보건센터 등에서 감당할 여력이 없다. 당연히 시장이 이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킬 것이다. 즉 정신건강의학과나 전문상담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아직까지 한국에서 미개척지나 다름없었던 블루오션이 열리는 셈이다.

결국 전 국민 정신검진은 이 시장의 프로모션 마케팅으로 기능하게 된다. 이제 전 국민 정신건강검진보다 훨씬 문항이 강화되고 복잡한 분석을 요하는 각종 인성검사 등이 진학이나 취업 등 사회의 각 분야에서 요구되면서 정신건강이 ‘엑설렌트’함을 입증하는 것이 의무이자 또 하나의 스펙이 될 가능성도 있다. 이미 입학사정관제도에서 학생의 인성을 본다고 하자, 인성검사를 통과하기 위한 정답을 가르쳐주는 학원이 생긴 것에서 보듯이, 이러한 시장의 반응에 대한 예측은 공연한 우려가 아니다. 심리치료나 정신상담 분야에서 미국의 전문성이 크게 앞서 있는 것을 생각하면, 한미FTA와 연계해 미국기관과의 국내진출의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전 국민 정신검진으로 인해 촉발된 수요를 시장이 흡수하기 시작하면, 정신검진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지만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는 기표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 상징을 둘러싼 뚜렷한 이해관계 집단이 생기기 때문에, 실제로 전 국민 정신검진이 얼마나 허술하게 이루어지든, 혹은 정보누출 등 추후에 어떤 부작용이 생기든 간에 원천적으로 없애기는 매우 힘들어질 것이다.

왜 정신건강서비스가 필요한 사람을 먼저 챙기지 않는 걸까

전 국민 정신건강검진이 국가 감시시스템의 일환으로 위험한 개인을 색출하여 문제를 개인 탓으로 돌리는 배제의 기전으로 작용할 수 있다거나, 전문상담시장의 마케팅이 될 수도 있다는 나의 주장이 완전한 오해이길 바란다. 즉 ‘순수하게’ 국민들의 정신건강을 위해 뭔가 전문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이라고 믿고 싶다.

그러나 그렇게 믿으려고 해도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의문들이 남는다. 국민의 정신건강을 위한 것이라면, 왜 정말로 정신건강서비스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제공되지 않는 것일까.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강투석 식으로 접근하여 대상자를 색출하는 것보다 긴급하게 개입을 요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정신건강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효과성은 물론, 효율성의 측면에서도 훨씬 나을 텐데 말이다.

이미 정신건강서비스의 필요성이 입증된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알려져 있다. 국내에서 재난 후 스트레스 장해(PTSD)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의 결과를 낳았던 대구지하철참사의 피해자 들을 위해 국가는 어떤 정신건강서비스를 제공했을까. 지난 3년간 쌍용차해고노동자들과 가족들이 22명이나 자살하거나 급사하는 것 역시 재난 후 스트레스 장해이지만, 이들의 정신건강을 보살피는 것은 모금과 자원봉사로 이루어진 ‘와락’이라는 민간단체와 지자체이다. 용산참사 유가족이나 강정마을주민들 역시 비슷한 증상을 앓고 있지만, 국가나 지자체의 도움은 없다. 이들은 모두 민감한 정치적인 문제가 개입되어 있어 도움을 주기가 어렵다고 치자. 그렇다면 왜 심각한 범죄피해자들에 대한 정신건강 서비스는 없는가. 살인으로 가족을 잃거나 성폭행으로 인해 심각한 정신적 외상을 입은 피해자들의 분노와 증오, 불안과 공포, 수치심 등을 치유할 수 있는 체계적인 정신건강서비스는 마련하지 않은 채 왜 엄벌주의만 외치며 가해자에 대한 증오심을 키우는가.

국민은 차치하고라도 국가나 공공기관에 종사하고 있는 직원들의 정신건강은 얼마나 책임지고 있는가. 천안함이나 연평도 포격을 경험한 해군들, 용산참사의 살인진압에 투입되어 “생지옥을 경험했다”고 말하는 경찰특공대, 전쟁 같은 화마로부터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동료의 죽음을 목격한 소방공무원들, 눈앞에서 자신이 운행하는 지하철로 뛰어들어 자살하는 사람들을 보고 얻게 된 공황장애로 자살충동을 느끼는 기관사들에 대해 왜 밀착된 정신건강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가.

전 국민을 대상으로 정신건강검진을 하느니, 실직자, 취업준비생을 위해 전철역 등에 ‘헌혈의 집’만큼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정신건강 상담센터를 만들거나 동사무소나 건강가정지원센터에서 방문상담을 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을 두어 독거노인, 한 부모 가정, 소년소녀가장 등을 위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편이 나을 텐데, 왜 예산을 그쪽으로 우선배정하지 않을까? 아니 그런 것은 돈 들어서 다 안한다 할지라도, 학교 상담교사를 반드시 정규직으로 두어야 한다는 규정조차 왜 만들지 않는 걸까.

소독차가 내뿜는 소독연기는 실제로 소독효과가 없으며, 인체에 해롭기까지 하다. 소독연기를 공중에 살포하느니, 하수구 등에 직접 소독액을 살포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그럼에도 소독차가 연기를 내뿜으며 골목을 다니는 이유는 지금 전염병에 유의할 시기라는 대국민 홍보의 효과 때문이라고 한다. 즉 정부도 소독차를 돌리고 있으니 각자 위생에 주의하라는 메시지를 주어 보건상의 기대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전시행정이다. 추후관리의 인프라도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정신건강검진을 당장 내년부터 실시하겠다는 정부를 보노라니, 소독차의 메케한 연기가 눈앞을 가리는 듯하다. 한마디로 ‘안습’이다.

황진미는? 

이화여대 의대를 졸업하고, 연세대 보건학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진단검사의학 전문의 자격도 취득했다. 2002년에는 <씨네21>을 통해 영화평론가로 데뷔했다. 현재 <한겨레21>, <시사저널>, <비타민> 등에 영화 관련 글을, <한겨레 훅>에 법정르뽀를 기고하고 있다. 현재 라포르시안의 '황진미의 라뽀&르뽀'란 고정코너를 통해 보건의료계, 혹은 의료시스템과 관련된 이슈를 진단하는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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