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디헬름 슈니츨러(삼성화재 상품R&D센터장)

삼성화재 상품R&D센터가 신설된 건 작년 이맘때쯤이다. 초대 센터장으로독일 민영보험사인 DKV의 한국지사장을 맡았던 프레드헬름 슈니츨러(Friedhelm Schnitzler)씨가 임명됐다. 슈니츨러 센터장은 독일과 네덜란드에서 건강보험전문가로 활동했고, 10년 전부터는 한국에 건너와 국내 민간보험사와 합작 사업 추진에 참여한 바도 있다.

슈니츨러 센터장은 오랫동안 한국 민간보험 시장을 겨냥한 새로운 형태의 보험 컨셉을 구상해왔다. 그가 특히 주목하는 영역은 새로운 재원조달방식의 장기요양보험을 도입해 건강보험과 민영보험의 보완적 관계를 한국 상황에 맞게 설계하는 부분이다. 삼성화재 본사 12층 사무실에서 회의를 막 마치고 나온 그를 만났다.  


- 한국에서 근무한지 10년째다. 한국이 민영의료보험 비즈니스에 적합한 나라인가. 

"10년 전 한국의 건강보험제도와 민영보험시장 조사에 착수할 당시 민영보험 비즈니스의 잠재력이 큰 국가라고 느꼈었다. 그 믿음은 지금도 변함없다. 한국은 의료 인력 및 기술 등 인프라가 우수한 나라다. 따라서 양질의 케어가 가능한 외부 조건을 모두 갖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MRI, PET 등을 활용한 정기검진상품이 잘 발달돼 있고, 한국인들의 건강에 관한 관심도 상당히 높은 편이다. 그만큼 의료서비스 구매력도 높다는 얘기다. 민영의료보험 비즈니스 측면에서 가장 매력적인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최근 한국 정부 차원에서 건강보험의 보장성 한계를 메우기 위한 대안으로 민간의료보험이 보충형 보험으로서 역할을 수행토록 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이를 두고 의료민영화 추진 논란도 거세다. 시민단체나 의료계는 여전히 민영의료보험을 도입하는데 부정적인 입장이다. 어떻게 생각하나.

"지금까지 일부 시민단체나 정치계, 의료계도 유독 민영보험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최근 몇 년동안 이러한 인식이 많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얼마전 보건복지부 임채민 장관도 연세대학교에서 있었던 한 강연에서 민영의료보험의 역할 확대가 필요하다는 점을 누차 강조하지 않았나. 한국에도 민영보험과 건강보험이 보완해나갈 수 있는 정책 분위기가 형성될 것으로 기대한다." 

- 한국에서 민영의료보험의 역할이 어떻게 확대될 수 있다는 말인가.

"중증질환이나 백혈병 같은 희귀질환 등의 경우를 보면 건강보험의 보장성이 떨어진다. 한국의 건강보험 보장성은 이제 겨우 60%를 웃돈다. 그렇다고 국내 의료비의 40% 이상(비급여와 환자본인부담금)을 차지하고 있는 민간보험의 보장성도 좋지 못하다. 특히 민영실손의료보험을 통해 보장되는 의료비는 전체의 약 7%에 불과하다. 이는 한국의 민영보험이 특정 질병과 치료를 제외하는 경우가 많고, 보장과 저축성의 일체형 상품을 선호하는 경향 때문에 의료비를 충분히 보장하지 못하는 이유가 크다. 따라서 민영의료보험은 공익성을 더 추구하면서 건강보험과 같이 발전해나가야 한다."

- 민영의료보험의 공익성 추구는 무엇을 의미하나. "건강보험은 공영이든 민영이든 사회적 부조에 기반하는 것이다. 국가 재정 여건 등으로 인해 공적의료보험으로 모든 국민을 보호하지 못한다면 민영보험의 사회연대 및 부의 재분배 기능을 활성화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 민영의료보험 가입자에게는 세제혜택을 강화하거나, 민영보험사에는 의료수가 결정 과정과 의료서비스 질 향상 등에 참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네덜란드는 민영보험체제로 빨리 갈아탔다. 공보험 재정이 흔들리고 있어 민영보험 의존도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그만큼 민영보험사도 사회적인 책임을 안고 국민에게 더 많은 혜택을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물론 네덜란드의 경우 민영보험사가 운영하는 상품의 표준급여 범위, 의료서비스의 질 등은 정부가 관리하고 있다." 

-  한국은 지금 저출산과 인구 고령화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특히 저출산과 고령화로 건강보험 수급자는 늘지만 신규 가입자는 줄고, 노인진료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건보제도 존립 자체가 위협받고 있다. 민영의료보험을 도입한다고 해서 이런 문제가 해소될 수 있겠나.

"한국의 의료비 지출 구조는 합리적이지 않은 부분도 많다. 병원과 약국에 이중으로 의료비가 지출된다.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아 약을 복용하고 있는데 이 약은 독일보다 3배 더 비싸다. CT, MRI, PET 등 의료장비를 많이 이용해서 의료비 지출이 더 늘고 있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이대로 간다면 한국의 의료비 지출은 걷잡을 수 없이 치솟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건강보험 부과 방식에 따른 보험료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겠나. 한국의 고령화는 세계적으로 가장 빠르다. 생산가능인구를 위한 건강 투자를 늘려 생산성을 유지하지 않으면 건보재정은 위험하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의 대안으로 독일에서 도입한 '적립방식의 민영장기요양보험'을 도입하면 건강보험 재정의 안정화를 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 적립방식의 민영장기요양보험이란 용어가 생소하다.

"생명보험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건강보험처럼 부과방식이 아닌 적립방식이다. 특히 장기요양비에 이를 적용하자는 것이다. 나이에 따라 위험보험료가 발생하고 고령화적립금(aging reserve)을 쌓게 된다. 고령화적립금은 나중에 상승하는 위험보험료를 상쇄하기 위해 사용된다. 독일의 경우 소득 수준에 따라 민영장기요양보험을 의무 가입토록 돼 있다. 현재 이 같은 적립금 형식의 민영장기요양보험에 가입한 인구는 전체의 10%에 해당한다. 또 민영장기요양보험 가입자에게는 보험료 상한선이란 안전장치가 있다. 그런데도 독일 국민은 월급의 18% 가까이를 사회보험료로 지불하고 있다. 한국은 건강보험료로 월급의 5~6%를 내는 것을 보면 적립방식의 장기요양보험제도를 도입할 여지가 충분해 보인다."   

- 최근 포괄수가제 전면 도입을 두고 의료계와 정부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포괄수가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얼마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주최한 포괄수가제 심포지엄에 참석했다. 친구인 독일 베를린 공대 라인하르트 부세 교수가 기조연설을 했다. 시스템 개발의 투명성, 지속적인 효과 모니터링, 개정과정에서 전문가와의 협력 등이 포괄수가제의 질을 좌우한다는 그의 의견에 공감한다. 이와 함께 포괄수가제를 산정할 때 원가 자료의 정확성과 투명성, 고비용 서비스의 별도 보상, 보상률의 주기적인 갱신 등도 주요하다. 한국에서 찬반 논란이 있긴 하지만 논의 자체는 중요하다. 보험자와 공급자가 포괄수가제 도입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부분도 이 제도를 도입하는데 있어서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네덜란드에서는 보험자와 공급자가 포괄수가제를 두고 국민 의료서비스의 질을 높이기 위한 솔루션을 찾으려 애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 독일 등에서는 민간보험사와 의료공급자단체 간 갈등은 없나.

"왜 없겠나. 병원에서는 환자에게 더 자주 오라는 식의 과잉진료도 한다. 하지만 보험사와 의사의 관계는 긴밀하다. 대화도 많이 한다. 독일이나 네덜란드, 스페인 등의 민영보험사는 경쟁체제이고 의료공급자와의 공조를 통해 윈윈해야 살아남는 구조다. 보험 가입이 어려워져 고객이 줄면 의사도 감소하는 것이다. 보험사는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공급하는 목적도 중요시한다. 만성질환, 치매 등의 환자에게 적기에 알맞은 의료서비스를 공급해주기 위해서는 적정 재원이 필요한데 이 재원을 마련하는 역할을 보험사가 하고 있다. 다만 한국의 현 부과방식의 건강보험 시스템으로는 재원 마련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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