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부터 응급실 당직 전문의가 전담…전공의 수련 질 하락·임상강사 업무부담 가중 우려

#서울 A대학병원 B신경외과 전문의(조교수)는 몇 달 전부터 단 하루도 안빼고 주말 근무를 하고 있다. 지난 8월 응급실 당직법이 시행된 후부터 평일이고 공휴일이고 이전보다 당직이 2~3배는 더 자주 돌아와 밀린 연구논문을 마무리짓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짬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연구는 연구대로 못하고 외래진료보랴 당직서랴 몸은 천근만근이다.  

#서울 C대학병원 응급실. 새벽에 복통을 호소하면서 병원을 찾은 40대 여성이 다짜고짜 당직전문의 D교수(산부인과)에게 진료를 받고 싶다고 한다. TV에도 명의로 소개된 D교수는 평소에도 진료 한번 받으려면 몇 달은 기다려야 한다. 응급실 당직법이 시행되면서부터 유명 교수가 당직인 날에 응급실 환자가 더 몰리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위의 상황은 현재 의료현장과는 맞지 않는다. 그러나 머지않아 현실이 될 지도 모른다. 최근 보건복지부는 전국 응급의료기관 당직의를 전문의로 규정한 ‘응급의료법 시행규칙' 개정안을 마련했다.

복지부는 지난 6월 입법예고 기간 동안 의료계의 의견수렴을 거쳐 전공의 3년차 이상 당직 규정을 삭제하고, 모든 진료과별 당직전문의 명단을 병원 홈페이지와 응급실에 게재하는 내용 등으로 개정안을 일부 수정했다.

특히 온콜(비상진료체계)을 인정하되 응급실 의사가 요청 시 명단에 올라있는 당직전문의가 직접진료를 해야 한다.

응급실 당직법 시행 한달을 앞두고 실제 응급실을 지키고 있는 젊은 의사들(주니어스텝)은 어떤 심정일까.

아직 체감은 못하지만 주니어스텝으로 업무가 몰리는 현상에 대해선 불안해 하는 입장이다.

H대학병원 신경외과 조교수는 “응급실 당직법에 대해 병원 내에서 심각하게 얘기한 적은 없다. 모두들 설마 시행되겠나 하는 분위기”라며 “비용 보상도 해주지 않으면서 의사의 일방적인 희생만 강요하는 정책”이라고 쏘아붙였다.

그는 “교수도 평일에는 수술 끝나면 밤 10시가 넘어가는데 연구할 시간이 어딨겠나. 대부분 주말에 한다. 이런 상황에서 응급실 당직도 우리에게 넘어올 가능성이 크다"며 "결국 당직표는 전문의만 넣어 원칙대로 짜고, 실제로는 기존 방식대로 응급실 근무를 설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복지부가 일일이 실태 조사해 문제를 삼는다면 그땐 의사들도 가만있진 않을 것”이라고 분개했다.

전공의 수련의 질은 떨어지고 의사와 환자 관계는 나빠질 것이라는 걱정도 높다.

K대학병원 산부인과 임상강사는 “응급실 당직법이 현행대로 시행되면 펠로우들에겐 엄청난 부담이다. 더 큰 문제는 전공의가 수련병원에서 트레이닝을 받는 기회가 박탈되는 것”이라며 “예를 들어 산부인과의 경우 복통으로 오는 환자들이 많은데 이런 환자들 중에는 자궁근종, 골반염 등이 발견된다. 전공의는 이런 환자들을 초진으로 보면서 트레이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진료과별로 모두 당직전문의가 교수인데 누가 전공의한테 진료를 받기 원하겠나. 마치 분만할 때 전공의 참관을 거부하듯이 응급실에서 환자들이 전공의 진료를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야간이나 공휴일 당직에 경증환자가 몰리는 기형적인 응급실 진료가 이뤄질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됐다.

S대학병원 외과 임상강사는 “당직전문의 명단을 게재하도록 돼 있기 때문에 환자들이 유명 교수가 당직 선 날이라든지, 아니면 교수 진료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응급실로 몰려들 것”이라며 “그럴 경우 급한 환자가 제대로 진료를 받지 못하는 상황도 발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정부는 숙련된 의사가 응급실에 있으면 의료의 질이 올라간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레벨 2~3 환자를 우선적으로 진료해야 하는 응급실에 레벨 4~5의 환자가 넘쳐난다면 제대로된 응급진료가 가능하겠냐”고 되물었다. 

병원마다 의료인력의 편차가 큰 부분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정책이라란 불만도 높다.

현재 상급종합병원급 의료기관에서는 이미 응급수술이 필요한 진료과마다 당직전문의가 언제나 대기하고 있고, 비상진료체계도 무리없이 작동되고 있는데 굳이 모든 응급의료기관에 똑같은 규칙을 적용한다는 것은 일종의 '탁상행정'이란 지적이다.K대학병원 내과 임상강사는 “지방병원도 전문의에게 당직을 더 자주 서게하려고 노력해왔지만 여건이 안돼 그렇게 못했던 것”이라며 “인력 지원 없이 말로만 하는 정책을 남발하는 꼴”이라고 말했다.  

한편 복지부는 응급실 당직법 위반과 관련, 당직전문의가 환자를 직접 진료하지 않은 경우 응급의료기관의 장에게 200만원의 과태료가 부과되도록 했다. 또 당직 전문의에게는 근무명령 성실 이행 위반으로 면허정지 처분이 가능하도록 했다.

응급실 당직법은 부내규제심사, 규개위 규제심사 및 법제처 심사를 거쳐 오는 8월 5일 공포 시행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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