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한 몸집키우기 경쟁·법적기준 미비로 인력난 심화…'보건의료인력지원특별법' 제정 추진

“임신했다고 야단치고 임신한 사람은 사람 취급도 안한다. 병동 생각않고 본인 생각만 한다고.”

“밥 못먹으면서 일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시 된다. 야간에 입원환자 24명을 혼자서 보는데 한명이라도 안좋아지면 나머지 23명은 소홀하게 할 수 밖에 없다.”

“매일 12시간 이상의 근무시간으로 화장실을 갈 시간이 없어 소변을 매번 참다보니 방광염에 걸렸다.”

지난해 전국보건의료노조가 1만9천여명의 보건의료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현장에 있는 간호사들이 직접 하소연한 사연이다.

일선 의료현장에서 인력부족 현상이 갈수록 심해지면서 보건의료 종사자들의 근무여건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특히 지방 중소병원은 의사와 간호사 인력난이 극심해 병원 운영에 차질을 빚을 정도다.  그동안 우리나라 보건의료인력 수는 의료기관 및 고가 의료장비의 증가세를 미처 따라가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에 따르면 2000년부터 10년 동안 의료기관은 2만여개(32.2%)가 증가했고, 인구 1,000명당 의사수․병상수는 각각 0.5명, 4.55개가 늘었다.

CT 보유수는 인구 100만명당 35.66대로 OECD 평균 22.97대를 크게 웃돌았고 MRI 역시 인구 100만명당 20.15대로 OECD 평균인 11.13대에 비해 두 배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2010년 기준으로 인구 1,000명당 의사수는 2.01명으로 2008년 OECD 평균 (3.11명)에 못미쳤다. 간호사수는 2.37명으로 OECD 평균(6.74명)을 훨씬 밑돌았다. 

보건노조가 올해 초 실시한 ‘보건의료노동자 실태조사’에서도 2만121명의 설문 대상자 중 77.8%가 의료현장에서 인력이 부족하다고 답했다.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보건의료 노동자들은 병원현장의 인력에 대해 68.34점(100점 기준, 높을수록 부정적)으로 부정적 의견을 보였다.

인력부족으로 노동강도가 심화돼 작년보다 건강 상태가 나빠졌다는 의견이 58.8점이나 됐으며, 인력부족으로 재해 및 질병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의견도 60.8점으로 나타났다.

특히 인력부족으로 의료서비스의 질이 하락한다는 의견은 69.8점으로, 의료사고 위험성에 대한 의견도 59.9점으로 높게 나타나 의료공공성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보건노조 나영명 정책실장은 “의료인력 부족은 환자 안전과 직결되는 문제”라며 “부족한 인력으로 많은 환자를 대하기 위해서는 근무시간과 담당 환자수를 늘릴 수 밖에 없고 이로 인해 과로가 누적되면 자칫 업무상 실수로 이어져 환자들에게 피해를 끼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이상이 공동대표도 “업무증가와 인력부족이 동시에 발생할 경우 환자의 진료결과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며 “병원 인력의 근무만족도가 낮을 경우 스트레스가 늘어나고 건강수준이 악화되기 때문에 정확한 판단을 못하고 환자의 안전에 위해를 끼칠 확률이 높다”고 말했다.

보건의료 인력이 부족하게 된 배경에는 병원 간 치열한 몸집 부풀리기 경쟁과 인력기준에 대한 법적 근거부족 등이 지목된다. 제주대 의학전문대학원 박형근 교수는 “무제한적인 의료기관 증설과 이윤추구 중심의 과도한 경쟁으로 병원 규모별‧지역별 서비스 질의 불균형이 심화됐다”며 “병원들이 대형화, 고급시설, 첨단 장비 중심의 경쟁에만 치중하고 인력과 조직에 대한 투자를 소홀했기 때문에 지금의 상황에 이르렀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의료인력이 증가하면 1인당 담당 환자수가 내려감으로써 의료서비스 질이 향상될 것”이라며 “모든 병원들이 인력을 확충해 조직변화를 유도할 수 있도록 의무화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건노조 이주호 전략기획단장은 “정부는 그동안 보건의료정책을 수립하면서 단 한 번도 보건의료인력 문제를 전면적으로 진지하게 검토하거나 계획을 세운 적이 없다”며 “의료기관은 인력관리에 있어 의료라는 특수성에 의하여 다른 조직체보다 엄격한 법률적 규제를 받는 대상이기 때문에 법적, 제도적 정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보건의료인력 수급·관리·지원 전담기구 설립 필요해이런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보건노조는 야권과 공동으로 보건의료인력의 법적기준 마련을 골자로 하는 '보건의료인력지원특별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보건의료인력지원특별법은 보건의료인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법적 근거를 마련함으로써 보건의료 노동자의 근무환경 개선을 통해 환자안전과 보건의료서비스의 질 향상을 도모한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보건노조 나영명 정책실장은 “오는 15일 상정을 목표로 국회의원실을 돌면서 인력법 발의를 위한 서명을 받고 있다”며 “현재 발의 기준인 10명은 넘었지만 최대한 많은 서명을 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준비 중인 보건의료인력지원특별법은 크게 인력지원특별법과 인력기준법으로 구분된다.

1단계인 인력지원특별법은 보건의료 인력기준을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준비하기 위한 공식기구인 ‘보건의료인력원’ 및 ‘보건의료인력총괄심의위원회’의 설립을 요지로 하고 있다.

보건노조 이주호 전략기획단장은 “현재 보건복지부 산하에 한국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과 한국보건복지인력개발원이 있지만 면허시험 관리와 교육훈련 등 제한된 범위에서 보건의료 인력업무를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 보건의료인력 수급 원활화와 인력 관리 및 지원, 노동조건의 개선, 복지향상을 위한 종합적인 업무 수행이 불가능하다”며 “제대로 된 인력 전담기구 설치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보건의료인력원이 설립되면 의사, 약사, 간호사, 간호조무사, 의료기사는 물론 안경사, 안마사, 요양보호사, 사회복지사, 사무직, 영양사, 전기기사, 보일러기사 등 현장 기술직을 포함 의료기관에 종사하는 모든 직종에 대한 조사와 논의를 통해 구체적 인력기준을 마련한다는 방침이다.

나영명 실장은 “현행 의료법 등 인력관련 법은 구체성이 결여된 채 법적 강제력이 없고 대한병원협회와 각 직종 협회 또한 인력확보와 유지관리에 대한 구체적 요구와 정책의지가 부족하다”며 “적정 수준의 보건의료 인력 확보는 환자의 안전보장과 의료의 질 향상을 물론 나아가 보건의료 분야의 전반적인 발전과 국민보건 향상에 기여할 것”으로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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