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석의 서바이벌 의료윤리>

■ 지난달의 딜레마 사례 - 외동딸 연주회 위해 수술 부탁 고민하는 의사 

유명 대학병원의 척추 전문 신경외과 교수인 L씨가 예정된 늦은 오후의 수술을 준비 하던 중 부인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하나뿐인 외동딸의 졸업 연주회가 저녁 6시에 시작하는데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수술집도를 시작하면 딸과 아내의 원성은 피할 수가 없을 것이고 그렇다고 자신의 명성을 듣고 일부러 지방에서 올라온 환자와의 약속을 어길 수도 없고… .

L교수는 전임의 2년차인 K씨를 불러 은밀한 부탁을 했다. 사정이 이러저러하니 수술 시작할 때는 내가 있을테니 그 이후 실제 수술은 K씨가 마무리 해 달라고 부탁했다. 평소 실력이 뛰어난 후배인 K씨도 꼭 해보고 싶어하던 수술이었던지라 믿을만한 후배에게도 기회를 주는 일이라 생각하니 환자에게 미안한 마음도 줄어 드는 듯 했다. L교수의 행위에 대한 당신의 의견은?

■ 이렇게 생각합니다!

흥미로운 주제네요. 전 수술을 연기해야 한다고 봅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해 드리면 되죠. 후배나 전공의에게 수술을 맡기는 것은 환자나 보호자를 속이는 거죠. 실제 환자나 보호자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수술을 전임의에게 넘기는 것을 허락 받은 상황이 아니라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서울 A병원 K진료과장)

내용처럼 실력이 뛰어난 후배 의사라면 수술 결과가 좋을 것을 염두에 둔 사례 같습니다. 만일 전임의 K씨가 성공적으로 수술을 마무리 한다면 환자도 손해 본 것은 아니고 교수와 전임의 모두에게 좋은 결과가 남으니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문제는 수술 경과가 안 좋은 경우일 것 같습니다. 이 경우 수술의 중요한 부분을 전임의가 진행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게 될 것이고 결과적으로 환자에게 더 큰 악을 행하는 셈이 될 것입니다. 작은 거짓이 더 큰 거짓을 낳는 악순환을 초래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수술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경기 D간호대 L양)

■ 긴 고민, 간략한 조언

이번 사례에도 두 분이 중요한 점을 지적해 주셨습니다. K과장님은 환자와의 신뢰를 깨지 않기 위해서는 딸의 연주회를 포기하고 수술을 끝까지 마무리 해야 한다고 하시네요. 수술 결과는 둘째 문제이고 의사로서 환자와의 신뢰를 지키는 일은 의사-환자 관계의 기본이자 환자의 권리이기도 합니다. 덕분에 가장으로서는 점수를 많이 잃겠지만요. 환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수술을 이튿날 아침으로 연기 할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견해도 주셨습니다.

의료윤리 딜레마 사례를 접할 때 모 아니면 도 식으로 접근하면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고민이 되니 딜레마인 것이지요. 본 사례도 환자와의 약속을 어기고 전임의에게 맡길 것인가? 아니면 딸의 졸업연주회를 포기할 것인가? 의 양자택일로 접근할 필요는 없습니다. 현실에서는 훨씬 더 다양한 옵션이 존재하기 마련이며 K과장님처럼 유연하게 사고하신다면 의외로 쉽게 문제가 풀리기도 한답니다. 마침 수술이 분초를 다투는 응급상황이 아니고 척추수술이므로 수술연기는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환자나 보호자에 따라서는 의사가족의 졸업연주회 때문에 수술이 연기되는 상황이 도저히 허락되지 않는 분도 계시겠지만요. 

L양은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기만 한다면 모두가 행복해 질 것이니 별 문제될 것 없다는 견해를 피력하셨네요. 대표적인 공리주의적 관점입니다. 행위 자체에 선악이 내포된 것이 아니라 우주적 행복(universal happiness)이 증가한다면 거짓말도 문제 될 것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공리주의도 관점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뉩니다. 행위 공리주의와 규칙 공리주의가 그것인데요.

행위 공리주의란 특정 행위가 가져오는 행복과 불행의 총량을 산술적으로 계산합니다. 산출되는 불행에 비하여 행복의 양이 크다면 옳은 선택(행위)으로 보겠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규칙 공리주의는 행위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옳은 행위라 하더라도 이것을 규칙으로 삼아도 ‘계속’ 옳겠는가?...를 반문합니다. 개별 행위에서는 교수가 가족과의 약속을 지키고자 후배의사에게 수술을 맡겨도 된다고 하더라도 이를 규칙으로 삼을 때 문제가 된다면 옳은 행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대학병원의 교수들이 자신의 사적인 필요에 의해서 특진 수술을 경험이 없는 후배들에게 일임하는 것을 일반적인 규칙으로 삼을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이런 이유로 후배 전임의에게 맡긴 수술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된다고 하더라도 규칙 공리주의는 이를 옳은 행위로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수술 경과가 좋지 않게 되었다면 문제는 더 심각해 집니다.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더 큰 거짓말과 변명을 늘어놓게 되겠지요. 반대로 정직하게 상황을 설명한다면 법적, 도덕적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 이달의 딜레마 사례 -종교적 이유로 수혈 거부하는 환아 치료할까 말까?

교통사고로 비장 파열과 대량 수혈이 의심되는 10세된 환아가 대학병원 응급실로 전원됐다.  환아는 혈압이 떨어지고 있었고 응급수술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긴급히 수술을 준비하는데 다행히 중상을 면한 아이의 부모가 수술을 하더라도 수혈만은 절대로 하면 안 된다고 하였다. 가족 전체가 특정 종교의 열혈 신도로 수혈은 교리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응급실을 통해 아이를 넘겨받은 외과의사로서 당신의 선택은?

정유석은?

1990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학사1993년 가정의학과 전문의2001년 충남대학교 의과대학 박사2011년 전공의를 위한 임상의료윤리 저술2011년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의료윤리학교실 주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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