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요양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젊은 가정의학과 의사입니다. 요양병원에서 근무하기 전에는 다른 가정의학과 의사처럼 일차의료기관에서 급성기 환자를 진료했습니다. 

요즘 포괄수가제 강제시행에 관한 뉴스를 접하고 나서부터 자주 인터넷을 검색해보며 자세한 진행 상황을 파악해보곤 합니다. 전에는 관심 없던 의사협회의 공식 발표나 심야 시간에 진행된 포괄수가제 TV토론회 등을 챙겨보면서 정부의 일방적인 정책 추진에 분노하고 좌절했습니다. 저를 이토록 포괄수가제에 관심을 갖도록 만든 것은 바로 지난 2년여 동안의 요양병원에서의 경험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근무하는 요양병원은 평균 이상의 요양서비스를 제공하는 병원으로서 절대 악덕병원은 아닙니다. 

요양병원은 포괄수가제와 매우 비슷한 수가 방식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환자의 중증도와 병원의 시설인력에 따라 등급을 나눠 등급별 일당정액제로 수가를 지급 받고 있습니다. 투입되는 행위에 대한 수가는 별도로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환자에게 투입되는 비용이 증가할수록 병원의 수입은 줄어드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더구나 정해진 수가 자체도 낮게 책정돼 있어 요양병원에서의 비용절감 노력은 실로 처절할 정도입니다. 

의료가 매우 전문적인 분야인 까닭에 일반인들은 잘 모르고 지나치지만 의료전문가인 의사 입장에서 보면 '이러면 안 되는 데' 하는 정도의 비용절감 노력이 이뤄지는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보통 요양병원에 입원하는 환자들의 연령대는 60대 후반부터 80대가 대부분입니다. 특히 그들은 심각한 만성질환을 보유하고 있고, 급성기 질환까지 동반된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말기암으로 인해 임종을 앞두고 각종 통증과 합병증으로 고통을 받는 환자도 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이들 환자가 투여하는 약물의 양도 많고, 비싸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요양하는 병원이라지만 중간 중간 꼭 필요한 검사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요양병원에 처음 와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바로 이런 환자들을 돌보면서 의사로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검사나 약물 처방을 할 때 벌어지는 병원 측과의 뜻하지 않은 충돌과 간섭이었습니다. 병원 측에서는 꼭 필요하지 않는 검사는 줄일 것을 요청했고, 값이 비싼 약들은 값이 저렴한 약들로 바꿔줄 것을 요청받았습니다. 요양병원 근무 초기에는 이러한 병원 측의 요청을 무시하고 제 판단에 의해 진료를 하다가 급기야는 병원 원내에서 저와 같이 일하기가 힘들 것이란 얘기가 돌고 있다는 것을 듣게 됐습니다.

저는 곧 큰 충격에 빠졌고 환자를 잘 봐준다고 좋아했던 병원에서 왜 내가 해고될 위기에 처해졌는가에 대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단순히 병원이 악덕병원이라서 그런 것인가 고민해보았지만, 그것도 원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일당정액제라는 요양병원의 수가 형태와 한국 특유의 저수가 구조 속에서 생존해야 하는 민간의료기관에서 발생되는 필연적 현상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됐습니다. 그런 제도와 현실을 잘 파악하지 못한 요양병원 초짜의사의 시행착오였던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도 버려야할 유물일 뿐이고 의사의 전문성이나 자존심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이렇듯 의사로서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으며 요양병원 월급쟁이 의사로서 적응을 하고 있는 저에게 들려온 포괄수가제 강제적용 소식은 저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요양병원이 아닌 다른 일반병원의 환자는 해야 될 검사나 약물투여의 비용이 훨씬 더 많고, 환자나 환자가족의 절박함이나 기대치가 훨씬 높습니다. 포괄수가제도 요양병원 수가처럼 일종의 정액제 형태로 저수가 구조와 대부분이 민간의료기관인 우리나라에서 이 제도가 확대될 경우 병원은 처절한 비용절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안에서 일하는 월급쟁이 의사들은 검사와 약물투여비용을 최소한으로 줄여달라는 병원 측의 요구와 환자로부터 최선의 치료를 해달라는 요구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해야 하는 처량한 신세가 될 것이 자명합니다.

포괄수가제가 확대될수록 의사들의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의미를 잃어가고 전문가로서의 전문성과 자존심은 사라져갈 것입니다. 의료분쟁과 경제적 압박 속에서 하루하루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신세로 전락할 것도 같습니다. 의사라는 전문가 집단의 몰락이 과연 환자에게 도움이 될까요? 포괄수가제 강제적용을 앞두고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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