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고 인 부에노스아이레스/ 박종호 지음 / 시공사 펴냄

최근 [북소리]에서는 철학분야의 책을 많이 소개한 것 같습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저도 힘이 많이 들어가는 느낌이 들면서 딱딱해지는 리뷰를 읽는 독자 여러분들도 동병상련이셨으면 하는 얼토당토 않은 작은 소망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번 주에는 전혀 다른 방향의 책 <탱고 인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소개하려 합니다. 하지만 이 분야 역시 제가 깊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수박 겉핥기가 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 분야에 관심이 있으신 독자를 위한 리뷰라 생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정신과를 전공하신 박종호 선생님께서 발로(?) 쓰신 아르헨티나 탱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탱고’하니 역시 정열의 춤 아르헨티나 탱고가 퍼뜩 생각납니다. 저와 같이 근무하시는 동료위원님께서 읽으시면 분명  ‘땅고’라고 바로 잡아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그래도 아르헨티나 땅고를 추는 분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탱고라고 하고 있으니 음악이나 사교춤으로서의 탱고는 ‘탱고’로, 본고향 아르헨티나 탱고는 ‘땅고’라고 적도록 하겠습니다.

탱고하면 일본의 국민배우 아쿠쇼 코지가 주연한 1996년작 <쉘 위 댄스>, 혹은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와 제이미 리 커티스가 장미꽃을 입에 물고 탱고를 추는 장면이 강렬하게 남는 1994년작 <트루 라이즈>가 먼저 생각납니다. 장님퇴역장교로 나오는 알파치노와 식당에서 우연히 만난 가브리엘 던이 CF음악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Por Una Cabeza에 맞춰서 탱고를 추는 장면이 인상적인 1992년작 <여인의 향기>도 꼽을 수 있습니다. 저는 <여인의 향기>를 다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춤추는 장면을 보면 가브리엘 던의 등근육이 팽팽하게 긴장하는 모습에서 땅고는 역시 어려운 춤이구나 싶습니다.

사실 오래 전에 사교춤으로 탱고를 배울 기회가 있었습니다. 모시던 교수님들께서 해외연수 나가시기 전에 춤을 배워보자 하셨던 모양인데 1년차 전공의였던 저도 따라오라 명을 받은 것입니다. 어느 집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아마도 남산 아래 회현동 어디쯤에 있는 호젓한 집 거실에서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2주일동안 은밀하게(?) 사사받았습니다. 하지만 임상실습을 제대로, 충분하게 하지 않은 탓에 흐지부지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꾸준히 했더라면 2년 전 유럽학회에서 열린 선상파티에서 솜씨를 제대로 보일 수 있었을텐데 많이 아쉬웠습니다.

춤 다음으로 탱고하면 당연히 음악이 떠오를 것 같습니다. 박종호선생님께서는 ‘라쿰파르시타’를 우리도 잘 아는 탱고곡이라 소개해주셨습니다만, 저는 토종 탱고음악이 먼저 생각납니다. 요즘에도 노래방에 가면 가끔 부르곤 하는 <서울야곡>은 현인선생님 곡도 좋지만, 전영씨 노래를 좋아하는 편입니다. 2절 가사 “보신각 골목길을 돌아서 나올 때에 찢어버린 편지에는 한숨이 흘렀다.”라는 노랫말에 나오는 보신각 근처에 다니던 학교가 있었던 것하며, 전하지 못하고 찢어버린 편지에 대한 추억 등이 아직도 노래를 잊지 못하게 하는 모양입니다.

사설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박종호선생님의 <탱고 인 부에노스아이레스>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해보겠습니다. 클래식음악에 조예가 깊으신 선생님께서 탱고음악에 관심을 가지신 것은 어쩌면 숙명이었던 모양입니다. “탱고의 아련한 멜로디와 독특한 리듬은 들을 때마다 늘 내 심장을 벌렁거리게 만들었다.(15쪽)”라는 고백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을 기획했던 2008년에 우리나라에 탱고에 관한 책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사실은 2007년에 탱고 아카데미의 배수경대표가 쓴 <탱고>라는 책이 나와 있었습니다.)을 알고 아르헨티나 탱고를 배우러 2주간의 일정으로 떠났다는 것입니다. 특히 일본의 여류소설가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2주일간 머물면서 탱고에 대하여 느낀 점을 녹여낸 소설이 일본에서 커다란 반응을 일으키면서 탱고에 대한 일반의 관심을 불러냈다는 이야기에 용기를 냈다고 합니다.

<탱고 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저자는 탱고가 태어나게 된 배경에서부터 발전해 내려온 발자취를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하면서 잘 알려진 탱고 바와 클럽을 중심으로 탱고공연을 직접 보면서 탱고와 탱고음악을 느끼고 그 느낌을 탱고의 역사와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합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탱고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장소에 대한 정보를 생생한 사진과 함께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어 기회가 되면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자가 탱고음악에 비중을 더 주고 있는 것은 음악에 조예가 깊은 반면 탱고는 출줄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탱고를 출줄 모른다고 고백하면서도 탱고를 춤출 수 없다고 해서 탱고를 좋아할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탱고에 대해서 조금씩 알아 갈수록 그것은 춤이 아니고 음악이었다. 더 나아가서 그것은 음악이 아니라 시어(詩語)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굳이 춤이 없다고 하더라도 탱고는 그 자체로 훌륭한 음악 장르이며 또한 문학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노래라는 뜻이 된다.(15쪽)”이라고 해명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탱고는 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귀로 하는 예술”이라는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말에 힘을 얻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탱고가 19세기말 고향을 떠나 이역만리 아르헨티나에 도착한 피끓는 젊은 남자들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춤추기 시작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음악보다 노래보다 춤이 먼저일 것 같고, 아무래도 탱고의 춤사위는 열정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 같습니다. “탱고의 춤사위는 그들의 몸부림이며, 탱고의 음악은 그들의 절규다. 섹스가 육체를 위로한다면 탱고는 영혼을 위로한다. 그래서 탱고는 슬프다. 섹스가 육체의 위안이라면, 탱고는 영혼의 섹스다.(37쪽)”

탱고곡 <외로움>의 가사에 “우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이 방에서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을 그녀의 발걸음을 기다리고 있지만....”이라고 쓴 것처럼, 탱고곡은 대체적으로 사랑, 특히 실연을 노래한 것이 많은데 그 실패한 사랑을 오히려 풍자적이고 냉소적으로 노래함으로써 실연으로 절망하지 않고 관조하는 입장을 취하는 편이라고 합니다. 탱고곡의 이런 분위기는 우리나라 탱고음악에도 전해진 것 같습니다. 젊어서 즐겨 듣던 전영씨는 <어디쯤 가고 있을까>를 “그렇게 쉽사리 떠날 줄은, 떠날 줄 몰랐는데, 한마디 말없이 말도 없이, 보내긴 싫었는데, 그 사람은 그 사람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방실이씨의 <서울탱고>에서는 더 완숙한 경지를 보여줍니다. “세상의 인간사야 모두다 모두다 부질없는 것, 덧없이 왔다가 떠나는 인생은 구름같은 것, 그냥 쉬었다 가세요. 술이나 한잔 하면서, 세상살이 온갖 시름 모두다 잊으시구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라고 한 김소월님의 시 <진달래꽃>에서 처럼, 우리나라의 탱고곡의 분위기는 우리네 정서와 잘 어울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춤으로서 탱고에 대한 저자 나름대로의 느낌도 담고 있습니다. 아쉽게도 탱고바나 탱고클럽에서 직업 무용수들이 공연으로서의 추는 탱고를 감상하고 느낀 점을 적고 있을 뿐, 춤을 추려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무도장, 밀롱가의 분위기를 느낄 수 없는 점을 아쉬워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아르헨티나 땅고를 즐기시는 분들이 그러실 것 같습니다. 이런 분들은 이 땅에서 땅고를 배우고 땅고를 가르치는 라우님께서 땅고의 본고장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석달간 머물면서 촌각을 아껴 땅고를 배웠던 경험을 고스란히 풀어놓으신 <길을 잃은 후, 길을 찾다>를 읽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르헨티나 땅고에 관한 책들이 더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같이 일하는 위원님은 “왜 땅고를 추느냐”는 땅고 선생님의 질문에 “땅고를 시작한 것은 인생의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취미로 아니면 그냥 여가선용으로 재미있는 삶을 위하여 시작하였으나, 지금은 배우면 배울수록 땅고는 인생인 것처럼 느껴진다.”라고 답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땅고를 추기 위하여 상대를 안는 것 “즉 ‘안기’란 남녀가 가슴을 붙이고 안는 자세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땅고의 에너지를 교류하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안기’가 단순히 육체적 접촉이 아닌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더 큰 영감을 파트너에게 줄 수 있는 몸을 만들고 싶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탱고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는 고향을 떠나 먼 이국에서 외로움 속에서 절망하는 이방인의 눈물과 한이 서린 감정을 제대로 느끼기에는 2% 부족할 것이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박종호선생님은 <탱고 인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에필로그에서 “탱고 추는 남녀를 유심히 바라보면, 어느 순간에나 여자는 거의 한 발이며 그녀의 몸은 내내 남자에게 기대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참, 인생과 흡사하지 않은가. 사람은 혼자 살기 힘들다. 사람이 누군가를 만나서 인생의 탱고를 춘다면, 두 사람 둥 한 사람은 다리 하나를 들 수 있다.(428쪽)”라고 적고 있습니다. “탱고는 두 개의 심장과 세 개의 다리로 추는 춤”이라고 들어서 일까요? 하지만 저의 동료는 “탱고는 그 음악 속에서 네 개의 다리가 한 개의 심장이 되어 남녀가 서로 가슴을 맞대고 의지하여 추는 춤”이라고 정의하고 “음악 속에서 네 개의 다리가 한 개의 심장으로 움직이기 위하여 서로의 한과 혼과 희노애락이 철저히 가슴과 머리에 합일이 되지 않으면 출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관심이 어디에 있는가에 따른 차이일까요?

배수경대표의 <탱고>에서 탱고의 역사, 탱고가 대중화되고 세계화되는 과정, 탱고의 구성요소 그리고 탱고가 춤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면, 라우님의 <길을 잃은 후, 길을 찾다>에서는 밀롱가를 중심으로 아르헨티나 땅고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길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춤으로서의 땅고에 대한 이해에 더하여 음악으로서의 탱고에 관한 이야기들과 더하여 보는 탱고를 즐기는 길을 안내하는 박종호 선생님의 <탱고 인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서로 보완하는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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