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훈(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학교육실 교수)

“PBL(문제중심학습, Problem based learning)이 조금 더 일찍 도입됐다면 지금쯤 포괄수가제 논쟁은 이미 끝났을 것이다.” 서울대병원 의학교육실 강석훈 교수가 설명하는 PBL 효과의 단적인 예다. 강 교수가 강조하는 PBL은 ‘상상하는 기회’를 주는 학습법이다. 팩트 하나를 두고 여러 관점을 상상해보고 인정할 줄 알면 갈등은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강 교수가 최근 발간한 ‘생각의 힘’이란 책은 여러 가지 의미를 던진다. 창의력을 기반으로 한 PBL 학습이 의료계가 안고 있는 다양한 현안을 둘러싼 갈등을 풀 열쇠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지난 25일 서울대의대 의학교육실에서 강석훈 교수를 만났다. 


- 지난달 발간한 ‘생각의 힘’이라는 저서에서 창의력과 창의성의 중요성을 유난히 강조했다. 어떤 차이가 있나.

“경쟁자들이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큰 격차를 벌이는 패러다임의 이동이야 말로 진정한 창의력의 모습이다. 기존의 상식을 뒤집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제대로 된 창의력이라고 부를 수 있다. 애플사의 스티브 잡스가 대표적인 예다. 스티브 잡스는 창의력을 통해 시대를 리드하는 천재로 등극할 수 있었다. 즉, 창의력의 개념은 ‘색다른 문제해결’이라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반면 창의성은 본성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다. 저절로 타고난 것이며 교육 또는 양육에 의해 길러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창의력과 창의성의 관계를 설명하자면 인간과 동물의 본성이라 할 수 있는 창의성에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포함된 복합개념이 창의력인 것이다.”

- 창의력과 PBL은 또 어떤 관계가 있나.

“우리나라가 후진국이었을 때는 교사가 학생에게 지식을 전수해주는 교육방식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21세기다. 교사라면 누구나 창의력을 갖춘 인재를 양성해야 하는 책무를 지고 있다. 따라서 교사는 학생에게 단순히 지식이나 정보를 전달하는 것으로 역할을 한정해선 안된다.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바로 교사의 역할이며 그래야 나라의 교육이 바로 선다. 이런 의미에서 PBL이야말로 창의적인 생각의 힘을 기르는 교육방법이라 할 수 있다.”

- PBL 교육법은 2000년대 초반부터 국내 의과대학을 중심으로 도입돼 왔다. 의대 교육에서 PBL이 필요한 이유는 뭔가.

“졸업 후 당장 임상현장에서 환자를 진료해야 하는데 문제해결 능력과 소통능력이 떨어지면 좋은 의사가 될 수 없다. PBL은 의과대학에서 배우는 지식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을 익히는 학습법이다. PBL 단계 중 ‘가설세우기’ 과정에서 하나의 팩트를 놓고 사람마다 의견이 천차만별이라는 걸 배운다. 그 다음 단계에서 합의점을 도출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을 배운다. 이때 예상치 못한 상황이 닥쳤을 때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 PBL은 우리나라 기존 교육방식과 다른 형태를 띠고 있다. 학생들이 적응하기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정확히 어떤 유형의 학생들에게 유용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특정 학생들에게만 유용한 학습법이라면 그 수업을 계속 할 수 없지 않은가. 토론문화에 익숙한 학생들에게 단지 좀 더 유리할 뿐이다. 우리나라 공교육의 특성상 학생들이 토론과 수업 중 질문하는 것에 익숙지 않다. 그런 부분이 PBL의 효과를 약화시키긴 하지만 앞으로 보완해 나갈 것이다. 학생들의 참여를 효과적으로 이끌어 낼 수 있도록 튜터(Tutor) 교육에도 신경 쓸 것이다.”

- PBL에서 튜터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튜터가 제 역할을 못할 경우 어떤 결과가 야기되나.“PBL에서 튜터는 단순한 촉진자의 역할이다. 학생들에게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핵심이다. 간혹 튜터들이 자신의 전공이 아닌 분야의 질문이 들어올까봐 부담을 가지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튜터가 척척박사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질문에 대한 답변을 몰라도 알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나머지 학생들을 응시한다. 이때 나머지 학생들은 대답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이다. 그래도 답이 도출되지 않으면 튜터는 학생들에게 과제를 내준다. 튜터들의 연기력도 능력이다.또한 PBL은 튜터가 누구냐에 따라 성패가 갈리는 수업이기도 하다. PBL을 진행하는 튜터들도 주입식 교육방법에 익숙한 세대들이다. 학생들이 토론에 머뭇거리거나 능동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 답답해서 답을 설명해버리는 경우가 있다. PBL의 핵심인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기회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기형적인 PBL 수업방식으로 공부한 학생들은 생각의 힘이 약하기 때문에 병원에서 실제 환자를 만났을 때 수업시간에 배운 것과 똑같은 환자를 만나지 않는 이상 자신이 알고 있는 의학 지식을 활용해 진단과 치료를 추론할 수 없는 반쪽짜리 의사가 되고 만다.” 

- PBL이 향후 의료계에 미칠 영향은.

“아직까지 이 학습법의 결과를 정리한 논문이나 데이터베이스는 미흡하다. 하지만 좀 더 일찍 도입됐더라면 의료계가 정부와 이견을 좁히거나 요구사항을 관철시키는 방법이 더 세련됐을 것이다. 지금 포괄수가제를 두고 의료계에서 내분이 일어나고 있는 걸 보고 보건복지부는 속으로 웃고 있을지 모른다. 내부가 분열되니 제 힘을 발휘하기 어렵고 핵심을 간파한 목소리가 나올 수 없지 않은가. 물론 의료계안에서 개개인 모두의 의견을 반영해 입장을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장단점을 분명히 정리하고 충분한 토론으로 입장을 전달한다면 복지부를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작년에 의학전문대학원 문제로 학교와 교육부의 마찰이 있었을 때 의대학장협의회가 교육부를 설득한 사례가 있다. 그때 의대학장협의회는 충분한 내부 토론을 거친 후 교육부에 그 의견을 피력했다. PBL 수업을 받은 젊은 의사들이 점점 많아진다면 앞으로 이런 성과는 많아 질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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