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동(국민건강보험공단 보험급여실 부장)

▲ '컨베이어벨트 위의 건강' 영화 포스터.

최근 포괄수가제가 의료계와 시민단체, 그리고 정책당국 사이에서 뜨거운 논란이 되고 있다. 주요 쟁점에 관한 이해당사자간 논의 방식이 건전한 상식을 벗어나는 경우도 많다. 특정 집단에 속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은 정책담당자나 포괄수가제를 옹호하는 전문가들에게 메일, 인터넷 공간 등을 이용하여 인격적 모욕을 하고 협박을 일삼는 등 매우 위험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

이렇듯 포괄수가제 문제가 의료계와 정책 당국, 그리고 시민단체 간 첨예한 대립을 낳고 있는 보건의료 정책이슈가 되고 있는 가운데, 건강보험 지불제도라는 어려운 정책 사안을 대하는 일반 국민들은 정확히 판단할 겨를도 없이 왜곡된 정보에 휘둘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보건의료 대안매체를 표방하는 '라포르시안'이 『의료복지 천국' 노르웨이, 포괄수가제에 검게 멍들다』라는 제목으로 17회 서울인권영화제 상영작 <컨베이어벨트 위의 건강(원제 : Health Factory)>(노르웨이, 호바르 부스트니스 감독)을 소개하고 있다.

최근 포괄수가제 논쟁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상황에서 라포르시안의 관련 기사는 부정확하고 우려할 만 하다. 특히 그 제목부터 근거없이 부정적이고 위험천만할 뿐만 아니라 내용 역시 잘못된 접근을 하고 있어 혹시 기사를 읽는 일반 국민들에게 왜곡된 시각을 심어줄까 매우 염려스럽다.

이 영화는 국영의료체제에 기반하여 무상의료에 가까운 의료서비스를 제공하여 왔던 노르웨이에 의료 민영화와 산업화가 도입되는 일련의 과정을 보여주는 가운데, 이로 인한 휴매니티(humanity) 상실 등 의료 민영화의 폐해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노르웨이,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들은 전통적으로 영국의 NHS 방식, 즉 국가가 의료시설을 소유하고 병원 의사들은 대부분 공무원(salaried government employees)인 소위 국영의료체계 하에서 무상의료에 준하는 의료서비스를 국민들에게 제공하여 왔고 현재에도 그 기본 틀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진료비 본인부담 약 15% 내외)

그러다 보니 국가 의료전달체계 전반의 효율이 떨어지고 이로 인해 만성적인 대기리스트(wait list)가 존재하여 왔다. 응급상황이 아닌 경우에는 몇 주, 아니 몇 개월을 기다려야 고관절 수술 등 필요한 의료서비스를 받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런 공공의료의 비효율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노르웨이는 영국 대처 정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보건의료부문에 근본적이면서도 중요한 몇 가지의 의료개혁을 단행했다.

우선, 노르웨이 정부는 2001년 기초자치단체의 관장 하에 운영되는 1차 의료에 대한 개혁을 통해서 주치의 제도를 강화하고 주치의 제도하에서 국민 개개인이 자신의 주치의를 선택할 수 있게 하였다. 1차 의료에 민간부문에서와 같이 경쟁원리를 도입한 것이다. 이 개혁의 목적은 1차 의료서비스의 질 향상, 진료의 연속성 확보, 의사-환자관계 강화 등에 있었다.

한편 <컨베이어벨트 위의 건강 Health Factory>에서 언급되는 것처럼 노르웨이는 2001년 병원개혁을 통해 병원의 지위와 예산을 독립시키고 보건기업 설립(지방정부 소유)을 인정하는 등 병원서비스에도 경쟁원리를 도입하였다. 대부분의 병원이 여전히 지방정부의 소유이기는 하지만 의료공급자간 의료서비스의 경쟁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 보다 앞선 1997년 병원부문에 "activity-based funding"이라는 하나의 보건의료 재원배분 기전을 도입하였는데 그 기초가 바로 DRG(case-mix)였던 것이다. 이렇듯 포괄수가제(DRG)는 개별 환자의 치료에 대한 지불제도로서 보다는 중앙정부가 지방정부(병원부분의 책임)에 대해 보건의료 재정지원을 하기 위한 하나의 formula로서 도입된 것이다. 그 이전에는 인구 수, 연령구조 등 막연한 기준에 따라 지급되었던 정부 보조금(block grant)이 이제는 지방정부가 운영하는 병원별 환자군 특성(case-mix)에 따라서 형평있게 지급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노르웨이 병원 예산배분이 전적으로 DRG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동안 DRG에 기초한 activity-based funding 비중에 등락이 있었지만 여전이 60% 내외에 머물고 있다.

2002에는 추가적인 개혁을 단행하여 병원의 소유가 지방정부에서 중앙정부로 이전되었고 병원의 운영에 기업의 경영기법이 도입되었다. 이제 병원의 일상적인 운영이 정부 관료가 아닌 전문 경영진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병원경영 부문에 효율과 경쟁의 원리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이다.

이와 같은 일련의 병원개혁 조치로 인해서 병원운영의 효율성이 증대하였고, 결국 각 병원에서의 진료건(case) 수의 상당한 증가와 함께 그동안 고질적인 문제 중의 하나였던 대기기간의 감소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이 영화는 생산, 효율 등 의료서비스의 시장화, 상업화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이 영화가 주려는 메시지는 포괄수가제라는 지불제도와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것이다. 보건의료부문에 시장원리와 경쟁을 도입하는 것은 행위별 수가제, 포괄수가제, 총액예산제 등 어떤 지불제도 하에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글쓴이가 영화에서 제시되는 여러 문제들이 마치 포괄수가제에 있는 듯 기술하고 있는 것은 지난 20여년간 계속되어 온 세계, 특히 유럽 각국의 의료개혁 동향과 노르웨이 보건의료제도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온 것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노르웨이의 국민건강 수준은 현재 세계 최고 수준이다. 국민의료비가 OECD국가들 중에서 매우 높은 수준이지만 보건의료시스템 역시 안정적이고 평형성 있게 운영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동안의 개혁을 통해서 보건의료시스템에 시장원리가 일부 도입되고 있더라도 노르웨이 보건의료의 가장 큰 장점은 여전히 개인의 경제적 능력이 아닌 필요(needs)에 기초하여 의료서비스가 제공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문제의 핵심은 포괄수가제라는 지불제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업의와 병원을 막론하고 극단적으로 치닫는 의료의 영리화, 상업화에 있다. 이 영화는 오히려 이런 면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우리나라 보건의료의 모든 문제는 이익창출에 민감할 수 밖에 없는 과도한 민간중심(privately dominated)의 의료공급체계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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