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유혹의 시절/ 한스 카로사 지음 / 홍경호 옮김 / 범우사 펴냄

박완서 선생님이 작고하시기 직전에 내신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읽었습니다. 일상의 삶에서 얻은 생각은 ‘내 생애의 밑줄’에, 그리고 책을 읽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은 ‘책들의 오솔길’에 그리고 먼저 가신 분들을 생각하며 애닮은 마음은 ‘그리움을 위하여’에 나누어 담고 있습니다. 출판사에서 ‘시대의 이야기꾼’이라는 별호를 드린 것처럼,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눈으로 읽으면서도 마치 혀끝에서 미끄러져 내리는 듯한 글을 읽으면 저도 모르게 ‘나는 언제쯤이나 이런 글을 써보려나’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이곳저곳에 글을 쓰면서 선생님의 일상을 인용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선생님의 산문 ‘내 생애의 밑줄’에서 재미있는 일화를 읽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읽던 페이지에는 반드시 표시가 될 만한 것을 끼워놓지, 접지 않을 뿐 아니라 읽다가 기억해두고 싶은 좋은 문장을 발견했다고 해도 밑줄이라는 걸 쳐본 적은, 절대로라도 해도 좋을 만큼 없었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수년 전 본격적으로 독후감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책에 밑줄을 치는 대신 포스트잇을 붙여 표시해 두었다가 독후감을 쓸 때 그곳을 다시 챙겨 읽는 버릇을 들였습니다. 하지만 오래 전에는 책을 읽다가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들을 여백을 따라서 적어두곤 했습니다. 특히 대학에 갓 입학했을 무렵에는 아무래도 이런저런 생각들이 넘쳐났던지 제법 여백을 채우는 메모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바로 그때 읽었던 책을 [북소리]에서 소개하려합니다. 바로 의사이면서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독일 문학계를 풍미한 시인이자 소설가인 한스 카로사 박사의 <아름다운 유혹의 시절>입니다. 박완서 선생님의 산문 ‘내 생애의 밑줄’ 덕분에 잊고 있었던, 아니 어쩌면 제 기억의 심연에 가라앉아 오랫동안 제 삶에 영향을 미쳐왔을 <아름다운 유혹의 시절>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글이 여러분들의 기억에 담아 두었던 오래 전에 읽은 책을 떠올릴 수 있기를 기대하는 생각도 가지고 있습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제 나이쯤 되는 분들에게 청춘시절에 읽은 책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이 무어냐고 물으면 상당히 많은 분들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꼽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야기 전체는 기억이 나지 않더라도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싸운다. 알은 곧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라는 데미안이 남긴 구절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헤세는 <데미안>에서 감수성이 풍부한 주인공 싱클레어가 소년기에서 청년기를 거쳐 어른으로 자라가는 과정에서 만난 친구 데미안과 함께 삶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려 노력하는 모습이 세밀하고 지적인 문장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물론 저도 <데미안>에 심취했던 시절이 있습니다만, 저의 추억의 앨범에 더 진하게 남아있는 책은 <아름다운 유혹의 시절>입니다. 어쩌면 한스 카로사 박사가 의과대학에 입학할 무렵부터 시작해서 의학을 공부하는 과정을 담고 있어 더욱 실감이 났고, 제 자신이 주인공에 투사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북소리]에서 이 작품을 소개하기 위하여 고향집에 갈 때 마다 책장을 뒤졌지만, 어디로 사라졌는지 찾을 수 없어 새로 구입을 해야 했습니다. 70년대 초반에 이 책을 출간했던 범우사에서는 2004년 2월에 다시 출간한 것 같습니다. 어떻든 그때는 단숨에 읽어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만, 나이가 든 탓인지 새로 읽는 책은 읽는 호흡이 꽤나 더뎠습니다.

책이야기를 하기 전에 한스 카로사(Hans Carossa, 1878~1956)박사를 먼저 소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남부 바이에른 튈츠에서 태어났습니다. 의사인 부친의 영향을 받아 뮌헨, 라이프치히, 부르츠부르크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1903년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개업을 하여 환자진료를 하면서 시, 수필, 소설 등을 발표하였는데, <유년시절>, <젊은이의 변모>, <의사 기온>, <젊은 의사의 수기>, <루마니아 일기>, <두 개의 세계>, <이탈리아 여행>등을 남겼고, 1931년에 고트프리트 켈러상을 1938년에는 괴테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그는 작품 속에 자신의 삶을 녹여냈는데, 특히 <아름다운 유혹의 시절>은 “자신의 지나간 생애를 그린 이 작품에서 그는 고향을 떠나 수줍고 순박스러운 젊은이로서 대도시 뮌헨에 도착해서 의학을 공부하는 날로부터 시작해서 그 시절 그와 스쳐 지나간 여러 여인들과의 사랑과 좌절을 그렸으며, 고명한 여러 교수님과 그들의 강의에서 얻은 새롭고 외경에 찬 학문의 세계, 그리고 그가 밤을 새워 읽었던 고전과 당대의 명저와 시인들의 사상, 거기서 얻은 정신적인 자양분이 이 젊은이의 영혼에 투영되어 마침내는 질서와 사랑이 평형을 이루는 좌표를 구해내게 되는 과정을 차원 높은 관조자의 입장으로 보여주고 있다.(6쪽)”고 번역을 하신 홍경호교수님은 적고 있습니다.

한스 카로사는 같은 시대에 활동한 헤르만 헤세나 토마스 만이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대립적으로 다룬 것과는 달리 괴테의 전통을 충실하게 지켜 하찮아 보이는 일상 속에서 세계가 지닌 영원한 법칙이나 신성을 찾아내고자 했다는 평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제 경우는 학창시절 여러 동아리를 기웃거리다가 졸업을 하고 말았습니다만, 당시에도 문학, 음악, 그림, 연극 등 다양한 분야의 동아리활동을 통하여 의학 이외의 영역에서도 타고난 재능을 발휘하는 분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런데 의과대학에 입학할 무렵 카로사 박사는 이미 저명한 시인의 인정을 받을 정도로 시재를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문학에 관심이 많은 동무들과 어울리며 재능을 꽃 피워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업인 의학공부도 열심히 해야 했습니다. 독일대학은 입학은 쉽지만 졸업하기가 만만치 않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특히 구두시험을 통과하기 위하여 진땀을 흘려야 했다는 고백도 숨기지 않습니다.

구술시험하니 저도 역시 옛날 추억 한 자락을 적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기초의학 과목 가운데 제일 어려운 공부는 바로 병리학이었습니다. 재시험에 걸리게 되면 주임교수님 앞에서 보는 구술시험을 통과해야 진급이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그 구술시험이라는 것이 교수님께서 재시험 대상자의 숫자만큼 문제를 적은 쪽지를 담은 잠자리채에서 하나 꺼내서 답변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정답이 아니면 그 자리에서 낙제가 결정된대서 지옥에라도 들어가는 분위기였던 것입니다. 한 문제로 한 젊은이의 1년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사실 아는 문제도 주임교수님 앞에 서면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다는 선배님들의 공포스러운 체험담이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2개 학기에 병리학을 공부하는동안 각각 두 번씩 치른 육안, 현미경 그리고 필기시험을 모두 한번에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재시험 대상자를 고르는 시험에서는 운좋게 통과할 수 있어 끔찍한 구술시험을 치루기 위하여 주임교수님을 독대하는 상황은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피를 말렸던 병리학과 무슨 인연이 끈질겼던지 결국은 병리학을 전공하게 되었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전에 털어놓았던 해부학시험 이야기에 이어서 병리학까지도 공부가 시원치 못해서 숨겨야 하는 부끄러운 학창생활을 [북소리]를 통해서 고백하게 되는 것도 팔자소관인 듯합니다.

청춘시절 사랑을 빼놓으면 그야말로 앙꼬없는 찐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카로사박사 역시 ‘만남’이라는 제목에서 우연히 만난 프랑스 처녀와의 기이한 만남을 적고 있습니다. 친척 자매를 방문한 자리가 어색하게 파한 다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베일을 쓴 여인과의 우연하게 만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필연적으로 만나야 할 운명이었다고 말하는 부분은 요즘의 생각으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 만남에 대하여 저자는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반점이 있는 그 베일 속에서 내게 눈길을 보낸 그 여인은 아름다운 시체, 해부학 강의 첫 시간 이후로 그 감지 못하던 눈이 도저히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그 여성의 얼굴과 너무나 닮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80쪽)” 사실 한밤중에 호젓한 길에서 마주친 여인이 해부학실습실에서 만나는 여성과 흡사하다는 느낌이 들었다면 거의 혼비백산 도망치고 말았을 것 같은데 박사는 지나치게 담담했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숙명인 것만 같았던 그녀와의 만남도 결국은 이별로 마무리가 되고 말았다는데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우리네 속설이 독일에서도 통하는 것 아닐까요?

사실 이 작품 가운데 제 기억 속에서 가장 뚜렷하게 남아 있는 부분은 바로 ‘도보여행’이라는 제목으로 된 마지막 글입니다. 요즘에도 걸어서 국토순례하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박사님은 요즘 젊은이들처럼 고난을 즐기려는 목적보다는 자연을 즐기기 위하여 일부러 걸어서 여행을 한 것이니 부럽기만 합니다.

지난 해 자전거로 유럽을 여행한 친구를 만났습니다. 흔히 외국여행을 가면 비행기나 기차를 타고 목적지에 도착하면 그곳의 유명한 관광상품을 구경하고 역시 교통편을 이용해서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식이 됩니다. 이런 여행을 하다보면 그곳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생활을 경험할 수 없는 아쉬움이 남게 됩니다. 한 장소에서 오래 머물면서 그들과 친구가 되어 같이 생활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데 그렇게 늘어진 여행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친구는 자전거여행을 다녀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마을과 마을 사이에 펼쳐진 자연을 직접 보고 느끼고, 가는 길에 만나는 사람들과 친해질 기회도 생기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친구의 여행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카로사박사는 한술 더 떠서 방학을 이용해서 도보여행을 다녀왔는데, 당시 혜성같이 등단한 여류시인이 살고 있는 마을까지 도나우강을 따라서 걸어가는 여행입니다. 그리고 시인의 집에 머물면서 그 가족들의 일상에 동참하고서 느낀 바를 적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만 해도 사람사는 인심이 지금과 달랐던 때문인지 길을 가는 사람들을 집에 들여 묵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경우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우리 선조 역시 사랑채에 과객을 쉬게 하거나 사정이 그렇지 못한 집에서는 건넌방 혹은 헛간을 치워서라도 잠자리를 마련하고 거친 음식일지라도 대접했다 하니 양의 동서를 떠나 사람사는 것이 비슷한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이처럼 좋은 풍습이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어 아쉽다 하겠습니다.

카로사박사가 도보여행에 적고 있는 것들, 예를 들면 여행길에서 눈에 들어오는 풍경, 만난 사람에 대한 이야기에서 쏠쏠한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한 구절을 소개해드리면, “얼마 후에는 보다 섬세하고 색채가 예리한 식물세계가 전개되기 시작해서 눈길을 끌었다. 감자밭은 빛나는 리라색으로 꽃이 만발했고 톱니풀은 도나우 강 하류에서 보듯 엷은 갈색이 아니라 아름다운 홍색이었고 귀뚜라미풀꽃도 푸른 색깔이 더 짙었다. 바위틈에 자란 가시 있는 관목도 백적색의 입술 모양의 꽃잎을 피웠다.(211쪽)” 저도 도보여행을 꿈꾸고는 있습니다만, 이렇게 아름다운 글을 쓸 자신이 없는 탓인지 실행에 옮기는 일이 더디기만 합니다.

글을 옮기신 홍경호교수님은 카로사박사야말로 독일 문학의 전통에 가장 충실했던 ‘전통의 수호자’라고 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리고 있는 아름다운 자연의 신비, 티 없이 순수한 젊은이의 미적 발전은 비뚤어질 수 있는 젊음을 바로 세우고 생에 대한 따듯한 애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 생각 때문에 “이런 의미에서 그의 작품은 정신적인 불모로, 허약해져 가는 우리 젊은이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양식이 되리라 믿는다.(8쪽)”라는 말씀으로 옮기는 수고가 얻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신 것 같습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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