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의료 강화·의료민영화 논란 속 사회적 합의 필요성 커져…"정부조차 이중적 태도 보여"

최근 정치권의 핵심 아젠다 중 하나는 공공의료 강화다.

야당과 진보적 시민사회단체의 전유물이었던 공공의료 강화가 지난 4.11 총선에서 각 정당의 핵심 공약으로 자리잡은 것이 가장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정부가 의료 공공성 확대를 위한 정책을 추진할 때마다 의료계는 강한 불만을 제기해왔다. "의료 부문에서 정부가 별다른 지원이나 책임을 지는 것도 없으면서 의료기관과 의사를 규제하려 든다"는 것이다. 이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의료서비스가 공공재인가, 아닌가’라는 오래된 화두가 그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포괄수가제 강제적용을 둘러싼 의료계와 정부간 갈등 이면에도 의료서비스가 공공재냐 아니냐하는 인식의 차이가 조금씩 엿보인다. 현재 정부와 시민단체, 진보적 성향의 학자들은 의료서비스를 공공재로 인식하는 경향이 높은 반면 의료계와 경제학자들은 의료서비스를 공공재로 보는 것에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의료서비스는 당연히 공공재…논의할 가치조차 없다"우선 시민단체 및 진보 성향의 학자들 사이에서는 '의료서비스는 공공재라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졌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가천의대 예방의학교실 임준 교수는 “의료가 공공재가 아니라는 사람들이 있냐”며 “일반적인 국민 정서를 포함해 학술적으로 맞냐 아니냐를 떠나 이미 의료 자체를 공공재로 보는 인식이 형성돼 있다”고 말했다.

의사면허를 통해 의료에 대한 독점권을 부여한 것 자체가 의료를 공공재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제기했다.임 교수는 “의료인에게 면허로서 독점을 허용해주고 있는 것은 공공적인 역할을 하라는 의미”라며 “만일 의료가 공공재가 아니라면 의사면허부터 없애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법제도적으로 보다라도 의료서비스는 분명한 공공재하는 주장도 나왔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보건의료위원장인 신현호 변호사는 “의료가 공공재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무의미한 논의”라며 “의료가 공공재기 때문에 의과대학이라는 제도를 만들었고 의료법으로 독점성 준 것”이라고 말했다.

신 변호사는 “헌법에서 의사제도를 정한 것은 국민들이 봉사해 달라고 위임한 것이고 때문에 의사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할 의무가 있다”며 “그게 싫으면 의사를 그만 둬야 한다”고 비난했다.

의학지식과 의료기술 등에 특허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의료서비스가 공공재라는 점을 입증하는 것이란 분석도 제기됐다. 건강보험 하나로 시민회의 김종명 운영위원(경기도립의료원 포천병원 가정의학과장)은  "의료기술에 대한 특허권을 불인정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라며 "만일 의료서비스가 공공재냐 아니냐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위한 논의를 하다보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김 운영위원은 "이미 의료서비스가 공공재라는 인식은 사회적 합의가 이뤄진 것"이라며 "다만 의사들이 그것을 부정하는 것 뿐"이라고 일축했다. 

"의료를 공공재로 보는 것은 정치적 논리일 뿐" 반면 의료계를 비롯해 일부 학자들은 의료소비스를 공공재로 바라보는 것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대한의원협회 윤용선 회장은 “의료를 공공재로 보는 것은 정치적인 논리”라며 “일부 시민단체들의 편협된 생각과 논의에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윤 회장은 “의료가 공공재가 되기 위해서는 의료인이 만들어지기까지 국가의 보조와 지원이 있어야 한다”며 “의료를 공공재로 보는 논리대로라면 대학을 졸업한 이들이 만든 기업은 모두 공기업으로 봐야 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의료가 가진 일부 공공성은 인정하지만 민간의료가 93%를 자치하고 있는 시점에서 의료를 무조건 공공재로 규정하고 통제하는 것은 동의하기 어렵다”며 “의료인 역시 직업인으로서의 자율성이 보장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료를 공공재인가 아닌가의 이분법적 접근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전국의사총연합 김길수 사무총장은 “의료가 일정 부분 공공성을 가지고 있는 부분은 있지만 의료 영역을 공공재다 아니다로 구분할 수는 없다”며 “어떤 사회든 본인이 필요한 서비스를 능력에 따라 받을 수 있는 이들이 존재하는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 사무총장은 의료가 공공재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에 앞서 합의 주체들이 각자의 의무와 책임에 대한 역할의 수행이 우선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부와 의료계, 국민이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고 의무에 충실한 후에 논의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며 “포퓰리즘에 기반한 정치적 논리를 앞세워 일방적인 시각으로 의료계에 피해를 강요하면 안된다”고 덧붙였다.

의료를 공공재라기 보다는 공공성이 강한 사적 재화 및 서비스라는 의견도 있다.

한양대 경제학부 사공진 교수(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 부위원장)는 “예방접종 같은 필수의료 부분은 공공재로 볼 수 있겠지만 구매하는 의료는 공공재가 아니다”며 “단지 공공성이 강한 민간 사용재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정부, 필요에 따라 '공공재-경제재' 인식 오락가락기본적으로 극명하게 갈리는 인식차는 공공의료정책의 추진에 있어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는 요인이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합의점을 도출하기 위한 노력은 사실상 전무했다.

특히 정부조차 의료를 공공재로 인식하면서도 정책 수립이나 추진에 있어서는 경제재로 인식하는 이중적인 행태를 보여온 것이 사실이다.

이를 극명하게 드러낸 사례가 바로 의료관광산업 육성 차원에서 이뤄진 해외환자의 유인.알선행위를 허용한 의료법 개정이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2008년 10월  의료서비스의 경쟁력을 높이고 외화 수입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외국인 환자에 대한 소개·유인·알선 등 행위 허용’을 골자로 하는 의료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자 국가인권위원회는 "환자의 유인·알선은 질병의 중증 정도에 따른 환자의 필요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환자의 구매력에 따라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라며 "의료기관이 외국인 환자 유치를 명목으로 건강보험수가가 적용되지 않는 고급병상 증설 등의 시설에 집중투자하고 외국인 환자의 진료에 서비스를 집중하게 될 경우 대부분의 건강보험 가입자나 피부양자는 양질의 의료서비스에 대한 접근이 제한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의료서비스가 공공재라며 비경합성(다른사람이 소비하더라도 물건 가치에 변화가 없는 것)의 특성을 지녀야 하지만 인권위의 판단은 외국인 환자 유치가 확대되면 내국인의 진료가 제한을 받게된다는 것으로 의료서비스의 비경합성을 부정한 셈이다. 또한 현재 건강보험 급여 항목에 포함되는 의료서비스 역시 대부분 환자의 본인부담이 따른다는 점에서 공공재의 또다른 특성인 비배제성(대가를 지불하지 않더라도 그것을 소비하지 못하게 할 수 없다는 특성)에도 어긋난다는 것이다. 의료계에서는 정부가 의료서비스를 공공재라고 주장하면서 필요할 때만 경제제로 인식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 때문에 의료서비스가 공공재인가 아니가에 대한 좀 더 적극적인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예방의학교실 윤석준 교수는 “의료가 공공재인가에 대한 논의를 촉발해 나가면서 이해관계에 따라 양극단으로 치우치지 않는 범위설정이 필요하다”며 “이러한 논의가 더욱 생산적이기 위해서는 공공이 담당해야 할 범위에 대해 초점을 좁혀 나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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