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인의 삶 : 과학과 철학의 소통 / 이정일 지음 / 한국학술정보 펴냄

의료영역에서 인문학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있습니다. 문학, 역사, 철학 등을 약하여 문사철(文史哲)로 대변되는 인문학의 어느 영역이 중요하지 않은 바 없겠으나, 모든 학문의 뿌리라고 할 철학은 그저 어렵다는 인식이 깔려있는 탓인지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당신입니다. [북소리]에서도 철학분야의 책을 간혹 소개하고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아직은 수박 겉핥기에 머무르고 있는 듯하여 공연히 마음만 조급해지고 있습니다. 조급하다 하여 바늘을 허리 매어 쓰지 못한다 하였으니 꾸준히 읽고 써나가는 끈기를 유지해보려 합니다.

요즘 특히 남성들 사이에 <건축학개론>이라는 영화가 인기를 모으고 있다고 합니다. 풋풋한 젊은 시절에 만나 친해지고 사랑이 싹트지만 그 사랑을 표현하기도 전에 생긴 오해 때문에 마음 귀퉁이에 묻고 만 남자가 15년이 지나 성숙한 모습으로 다시 등장한 그녀로부터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까요? (적어놓고 보니 저의 과거와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젊었을 적 강의실에서 처음 만나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이 사랑이라는 건축물의 개론과정에 해당되었다고 한다면 15년 만에 다시 만나서 새롭게 쌓여가는 감정들은 건축물의 각론에 해당되는 것일까요? 아무래도 당장 영화를 보러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책을 소개하는 글머리에 영화이야기를 끌어들이는 엉뚱함은 개론의 중요성을 설명해보려는 생각 때문입니다. 물론 대학에서 전공을 공부할 때는 일단 총론을 떼고 나서 각론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시작한 책읽기까지 체계적으로 하는 것은 마치 의무교육을 연장하는 듯한 느낌이 들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지레 포기하게 될까싶어 총론과 각론을 자유분방하게 넘나드는 여유를 가져볼까 합니다. 물론 깊이가 없다는 지적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오늘 소개하려는 이정일 교수님의 <교양인의 삶 : 과학과 철학의 소통>이야말로 철학분야의 개론서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교수님께서 모두에서 자연과학부와 공과대학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철학교양강좌의 자료들을 정리한 글이라고 밝히셨으니 라포르시안 독자 여러분의 관심영역이라 할 보건의료와 꼭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겠습니다. 그래도 방법론적인 면에서는 의학 역시 크게는 과학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보면 공감하는 점이 많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들어가는 말에서 재미있는 일화를 읽었습니다. “한 공대생이 나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가 철학을 해야 하고 배워야 되는 것인가?” 역시 공대생다운 질문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혹시 의학을 공부하는 우리도 같은 의문을 가져온 것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저자께서는 똑떨어지는 답을 제시하지 않았으나 ‘인간이 인간에 대해 근본적으로 탐구하기를 원한다면 이 물음은 언제나 철학 고유의 물음으로 남을 것’이라는 선문답의 느낌이 담긴 말을 남기셨습니다. 그리고 과학은 근원적으로 사고하지 않는다는 하이데거의 반과학적 사고는 수정되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과학 역시 사물의 근원을 캐는 학문으로 그 뿌리를 철학에 두고 있다고 이해하고 있는 저도 저자의 주장에 공감이 간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반면에 철학 교수님들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푸념을 늘어놓는다는 공대생들의 항의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학문들이 미분화를 거듭하다 보니 처음 떨어져 나왔을 때는 멀지 않아 보이던 방계 학문마저도 이제는 시야에서 사라지고 보이지 않더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벨탑이 무너진 다음에 같은 말을 쓰던 사람들을 세상에 흩어 말이 서로 통하지 않게 된 세상에 비유를 하면 지나치다 할까요?

과학과 철학 사이에서 넓혀진 간극을 좁히기 위하여 과학자와 철학자 모두가 각자의 영역에서 노력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철학자의 시각에서 과학을 이해하기 위하여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하고, 또 이를 바탕으로 철학을 돌아보고 있는 저자의 학문적 열정이 돋보입니다.

저자는 <교양인의 삶 : 과학과 철학의 소통>의 얼개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습니다. “제1부에서는 학문일반과 우리의 일상생활 모두가 근거를 제시하는 능력과 연관 아래 다루어지고 있다. 제2부에서는 학문일반과 과학의 관계가 포괄적으로 설명되었다. 제3부에서는 근대 학문의 근본 위상이 검토되고 있다. 제4부에서는 인간의 실천적 삶이 어떻게 의미있는 공동체를 형성하는가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끝 부분에서는 완결되지 못한 잡다한 단상들이 열거되었다.”

철학을 전공하신 저자께서는 무작정 철학을 옹호하지 않습니다. 특히 우리가 진리라 믿고 있는 참을 검증하는 작업이 철학은 물론 과학 또한 추구하는 공통적인 목표라고 인식하고 계시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심지어 과학의 탐구진행과 가설설정의 전제가 되는 선이해, 즉 독사(δοξα; 어떤 것을 너무 당연하게 자명한 것으로 알고 있어서 그것에 대해 의식적인 검증을 하지 않고 있는 세계)마저도 의식적으로 검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가는 진리추구의 과정은 편견과 그릇된 선이해와 싸우는 것으로 계몽으로 가는 길이며, 이는 철학을 지배하는 근본적 담론이라 보았습니다. 이러한 믿음에서 저자는 무거운 물체가 가벼운 물체보다 더 빨리 떨어진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론이 갈릴레이의 자유낙하이론을 통해 ‘모든 물체는 중력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아래로 떨어지는 것에 불과하다’고 수정된 이후 잘못된 믿음으로 분류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특히 근대에 이르면서 유럽인들이 그들의 테두리인 유럽 밖의 세상으로 나아가면서 가졌던 문명과 야만이라는 줄긋기는 유럽중심의 철학적, 과학적 사고의 오류이며 그 뿌리가 로마를 거쳐 그리스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을 파헤친 저자의 비판은 날카롭고 적확하다는 표현이 부족하다 싶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문화 밖의 것에 대한 몰이해 때문에 야만이라는 그릇된 편견을 만들어 냈다. 페르시아인들은 그리스 신들이 음모와 치정 그리고 납치와 살인하는 것을 보고서 적지 않게 당황했다. 페르시아인들이 믿는 유일신은 존엄하고 위엄이 있고 인간들이 하는 것을 뛰어넘어 있다. 페르시아인들이 보았을 때 그리스 문화는 한 마디로 타락하고 부패한 문화로 보였을 것이다.(29쪽)” 요즈음 제가 그리스신화를 읽으면서 느끼는 감정이 과거와 달라지고 있다는 생각이 위안을 받는 대목입니다.

수학은 문제풀이이기 때문에 정해진 답이 있어 오답, 즉 오류가 발견의 계기가 되지 못하지만, 과학은 가설을 검증하는 것이므로 가설이 오류로 밝혀진다 하더라도 그 또한 새로운 발견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오류도 진리로 가는 과정의 일부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위있는 사람이 말했다는 이유로 검증의 수고를 생략하려는 자들을 저자는 “우상화를 통해 먹고 사는 기생충 같은 부류”라고 통박하고 있습니다. 자신과 견해가 다른 자들과 기꺼이 대화함으로써 서로의 입장이 갖는 한계를 알아가는 것이 학문의 지평확장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부분을 읽으면서 막힌 속이 뚫리는 시원함을 느낍니다.

2부에서 설명하고 있는 논리적 사고를 위한 다양한 방법론들, 예를 들면, 모순과 배중률, 개념과 판단의 차이, 동일화와 술어화, 분석판단과 종합판단, 연역추론과 귀납추정 등에 대한 개념을 쉽게 설명하여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시야가 닿는 유한한 자연의 지평을 넘어 무한히 초월하는 곳으로 읽는 이를 이끌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저자는 인간의 이성이 이론이성을 넘어 실천이성으로 넘어가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칸트의 철학을 끌어들여 전문화된 학습 중심의 학교개념이 폐쇄적이고 고정되어 있는 한계를 뛰어 넘어 우리의 경험을 더 확장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경험은 철학할 수 있는 자양분이자 토대다. 경험은 부단히 초월된다. 경험은 고정된 기억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산출하는 밑거름이다.(78쪽)” 특히 보건의료영역처럼 전문화된 영역에서 남이 쌓아놓은 업적을 단순히 배우는 것은 일종의 전문적 훈련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이를 토대로 하여 창조적일 발전을 이끌어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 저자는 다양한 분야에서의 근대화과정에 대한 단상을 정리하고 있는데, 특히 과학이 근대화하는 과정에서 자연이 교감하는 장소가 아니라 지배의 대상으로 전락된 것에 대하여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다. 자연의 법칙을 수학적으로 계량화하여 통제하는 방법을 도출하려 끊임없이 시도해왔고, 그 결과 자연의 유기체적 통합은 사라지고 그저 관찰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근대과학은 자연에 관한 모든 사실을 명확하게 알고자 하나 유한한 것으로 보이던 자연의 한계가 불확실하다는 점에서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연을 지배하려들기보다는 자연을 이해하는 방향으로 패러다임을 바꿈으로 해서 자연을 보다 잘 관리하는 방안을 도출해낼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앎은 자연과 인간이 공존가능한 삶을 위하여 필요하며, 앎은 자연에 대하여 인간이 책임을 지는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라 합니다.

저자께서는 그리스철학으로부터 근대철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철학자들의 논리를 인용하고 있고, 과학의 방법론을 비롯하여 과학이 추구하는 바를 설명하는 한편 철학에 대해서도 비판적 논리를 전개하고 있어 철학을 공부하는 눈을 뜨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저자의 이런 자세는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은 철저하게 검증되지 않으면 안 된다. 오직 검증을 통해 살아남은 것만이 고전의 자격을 얻을 수 있다. 강요된 고전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면서 우리에게 대화를 할 수 있는 그런 고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선지자의 성과라 하여 배우고 이를 답습하는 피동적인 생각을 바꾸는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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