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내 응급상황 연 2~3천건…의료소송 휘말릴까 선뜻 나서기 쉽지 않아

#산부인과 전문의 A교수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가하기 위해 국제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장시간 여행에 지쳐갈 무렵 갑자기 의사를 찾는 기내방송이 들려왔다. 탑승한 70대 노인환자가 발작을 일으켰는데 도움이 필요하다는 의사호출(Doctor Call)이었다. A교수는 불현듯 환자가 잘못되면 의료소송에라도 말리지 않을까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몇 분을 망설이다 세 번째 콜이 울릴 때 서야 더 이상 지체했다가는 환자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을 것 같아 얼른 달려나갔다. 협심증 증상을 보였던 환자에게 니트로글리세린을 복용하게 하고 비상용 산소를 주입했다. 다행히 환자는 안정을 찾았고, 도착지까지 무사히 갈 수 있었다.

의사라면 기내 응급 상황 시 흔히 겪을 수 있는 일이다.

실제로 기내에서는 지상에 비해 낮은 기압과 습도나 시차 등으로 인해 응급환자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이 때문에 탑승한 의사의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상황이 자주 발생할 수 있다.

지난 17일 대한여행의학회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미연방항공청(FAA)이 미국 내 5개 항공사의 자료를 수집해 기내 응급환자의 규모를 조사한 결과 연간 1,132명, 하루 평균 3명 정도의 환자가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응급환자의 질환 비중은 혈관미주신경 실신이 22%로 가장 많았고, 심질환(20%), 신경계(12%), 호흡기(8%) 등의 순으로 집계됐다.

우리나라의 경우 정확한 통계가 나와 있지 않지만 기내 응급환자 발생률은 상당히 높은 편으로 알려졌다.

직업환경의학 전문의인 국내 A항공의료팀 관계자는 “인천-제주 항로만 연간 980만명(세계 1위)이 이용하고 원거리 항로 및 환승 항로 개설이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기내 응급 상황이 연간 2~3,000여건씩 빈번하게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특히 기내 응급 상황에서 의사의 자발적인 도움은 환자의 안전과 항공기 안전운행 측면에서 큰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의사가 닥터콜에 선뜻 응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미항공우주의학협회에서 회원 2,300명을 대상으로 닥터콜 현황에 대해 설문조사를 시행한 결과, 850명의 응답자 중 533명(62.7%)이 진료에 응했다고 답했다.

진료에 응하지 못한 의사들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환자승객이 자신의 전문 진료분야가 아니거나, 음주 상태로 진료가 가능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주로 들었다. 무엇보다 의료사고에 대한 부담감이 컸다는 이유가 많았다.

의사가 기내에서 닥터콜에 응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미국에서는 기내 응급환자 진료에 대한 의료진의 심적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지난 1998년 'Aviation Medical Assistance Act'를 제정한 바 있다.

이 법은 응급환자 진료 후 발생된 악결과에 대해 의료인이 고의성이 없고 중대한 과실이 없을 때는 형사적 책임이 면제되는 법적 보호 장치다.  

우리나라도 응급의료법에 따라 의료인이 정당한 사유없이 거부하거나 기피할 수 없었으나 지난 2008년 5월 ‘응급의료법 개정법률안’(일명 ‘착한 사마리안법’)이 통과되면서 제5조2항에 일반인이나 응급의료종사가 업무수행 중이 아닌 때 수행한 응급의료 행위에 대해 민사상 책임과 상해에 대한 형사 책임을 면책하고, 사망에 대한 형사 책임을 감면하도록 했다.

작년 8월에는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이 없는 경우’ 그 행위자는 민사책임과 상해에 대한 형사책임을 지지않으며 사망에 대한 형사책임을 감면하도록 제5조2항이 개정됐다.

다만 중대한 과실 여부를 판단하는 것 자체가 상당히 힘들기 때문에 선의의 의도로 응급처치를 한 것이 의료분쟁으로 이어질 소지도 배제할 수 없다.

대한여행의학회 조경환 회장(가정의학과)은 “기내는 병원 응급실과 전혀 다른 환경이고, 의약품이나 의료기구 등도 완벽하지 않다”며 “그럼에도 윤리적 관점에서 기내 진료는 피할 수 없는 의사의 본분”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국내외 항공사들은 기내 의료환경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대한항공 등은 기내 EMK(비상의료용구)를 보완하고, AED(자동심장제세동기)를 의무 탑재하고 있으며 이에 따른 승무원 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 American Airline은 항공기 내에서 환자의 EKG는 물론 산소포화도 등의 정보를 실시간으로 지상 병원으로 전공하고 의학적 조언을 받을 수 있는 원격시스템을 구축, 업그레이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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