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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본말 전도된 이상한 '액자 의료법'
  • 김상기 편집부국장
  • 승인 2012.05.16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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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오는 8월부터 액자를 판매하는 업체들이 특수를 누릴 것 같다. 전국의 모든 의료기관에서 액자 주문이 폭주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근거 없이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보건당국이 새로 마련한 법 규정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높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15일자로 ‘의료법 시행규칙’ 일부개정령안을 입법예고했다. 이 개정령안에 따르면 오는 8월부터 모든 의료기관은 ‘환자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한 내용을 액자 형태로 제작해 원내에 게시해야 한다. 의료기관이 게시해야 할 내용은 ▲진료 받을 권리 ▲알권리 및 자기결정권 ▲비밀 보장권 ▲피해를 구제받을 권리 ▲의료인에 대한 신뢰·존중의무 ▲부정한 방법으로 진료를 받지 않을 의무 등이다.

이 시행규칙 개정령안은 지난 2월 의료기관에 환자의 권리 등을 쉽게 볼 수 있게끔 게시하도록 의무를 부여한 개정 의료법이 공포된 데 따른 후속 조치의 일환이다. 개정령안이 이대로 확정되면 전국의 모든 의료기관은 오는 8월부터 환자가 진료 전에 쉽게 볼 수 있도록 접수창구 및 응급실에 일정규모 이상의 액자로(전광판 포함) 환자의 권리 및 의무를 제작·게시해야 한다. 이를 어기면 100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친절하게 액자의 크기도 정해줬다. 병원급 이상 의료기관은 가로 50cm·세로 100cm 크기로, 의원급은 가로 30cm·세로 50cm 크기여야 한다. 이 정도 사이즈의 액자 가격을 직접 알아봤다. 일반적으로 가로 50cm‧세로 100cm 크기의 액자는 3만5,000원~5만5,000원 수준이며, 가로 30cm‧세로 50cm 크기 액자 가격은 1만5,000원~3만원 정도였다.

자, 계산을 한 번 해보자.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자료를 살펴보니 올 1분기 기준으로 전국의 요양기관 수는 총 8만3,217개에 달했다. 이 중에서 액자를 의무 게시해야 하는 의료기관 수는 약국 등을 제외하고 총 5만8,647개였다. 액자의 가격은 평균 3만원으로 하자. 5만8,647개 × 3만원은 17억5941억원이다. 액자의 가격이 이보다 더 비쌀 수도 있고, 액자 개수는 이보다 더 많을 수도 있다. 시행규칙 개정령이 시행되고 1개월 이내에 게시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오는 8월 한 달 동안 신규 액자 수요가 약 18억원 가까이 창출되는 셈이다.

우리나라의 액자 판매 매출이 연간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다. 관련 통계 자료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어쨌든 1개월 이내에 18억원 가까이 신규 매출 수요가 생긴다는 것은 관련 업계에 상당히 반가운 소식이 될 것 같다.

하지만 다른 시각으로 보면 한편의 블랙 코미디나 마찬가지다. 복지부는 이 법이 시행되면 “환자가 진료 전에 자신의 권리를 알지 못해 받는 불이익과 불편이 최소화되고, 환자의 권리의식 신장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그럴 수도 있다. 의료서비스 소비자인 환자의 권리를 신장하려는 취지에는 백번 공감한다. 다만 방법이 문제다.

환자의 권리·의무로 게시되는 내용을 보면 진료를 받기 전에 환자가 인지한다고 해서 권리 신장에 도움이 될까 싶다. 성별·나이·종교·신분·경제적 사정 등을 이유로 진료받을 권리를 침해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거나 의료인은 정당한 사유 없이 진료를 거부하지 못한다는 내용을 모르는 환자가 있을까. 의료진에게 자신의 질병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들을 권리 역시 마찬가지다.

비밀을 보장받을 권리도 마찬가지다. 의료인을 신뢰하고 존중해야 하며, 부정한 방법으로 진료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환자의 의무도 굳이 게시해서 알려야 하는 내용인지 의문이다. 물론 이런 내용을 모르는 환자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많은 의료기관이 자율적으로 비슷한 내용의 환자권리장전을 채택해 원내에 게시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굳이 의무화 해야 할 일인지 모르겠다. 

특히 환자가 피해를 구제받을 권리 항목에 최근 새로 출범한 의료분쟁조정중재원의 홈페이지 주소와 연락처를 기재해 놓도록 했다. 환자의 권리·의무 게시를 강제화한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든다. 만일 그렇다면 이 사안은 의료기관의 의무라기보다는 복지부나 의료분쟁중재원이 직접 나서서 홍보해야 할 일이 아닐까 싶다.

왜 이런 법 규정을 만들었을까. 이러한 게시물이 얼마나 환자의 권리를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까. 구호뿐인 전시행정으로 그칠까 걱정이다. 환자가 충분한 의료서비스를 제공받고 알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의료환경 조성이 먼저다. '박리다매‘식 진료서비스를 제공토록 만들어진 현행 의료시스템으로 야기된 문제를 개선하는 데 더욱 힘을 쏟아야 한다. 환자의 권리를 제한하는 의료환경은 그대로 두고 환자의 권리 게시를 강제화한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나 다름없다.

김상기 편집부국장  bus19@rapport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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