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가 공공의료 확충 차원에서 시에서 직영으로 운영하는 도시보건지소를 추가로 설치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지난달 27일 대한공공의학회 춘계학술대회 특강을 통해 이런 계획을 발표했다.

박 시장은 이날 특강에서 “복지부가 운영하는 보건지소가 아니라 서울시가 직접 운영하는 보건지소를 계획하고 있다”며 “지역주민이 등록해 맞춤형 의료를 실현하고 의료교육을 통해 예방 중심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보건지소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소식이 전해지자 의료계는 못내 불만이다. 가뜩이나 병의원이 넘쳐나는 상황인데 도시보건지소가 지금보다 더욱 늘어나면 일차 의료기관인 동네의원의 환자를 빼앗아 갈 것이란 걱정이 앞선다. 경영난에 몸살을 앓고 있는 개원가를 더욱 궁지로 몰아넣을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중앙정부나 지자체가 국민의 건강권 확보를 위해 공공의료 인프라를 확충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다. 문제는 그 방법과 과정이다. 현재 국내 의료기관의 90% 이상을 민간병의원이 차지하고 있다. 공공의료기관의 비중은 6%대 수준에 불과하다. 참여정부 당시 공공의료 비중을 30%까지 확대하겠다고 했지만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엄밀히 따져보면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공공(公共)의료'는 '공공(空空)의료'나 마찬가지였다. 국내 보건의료 체계에서 국가의 역할은 방관자적 태도였다. 정부가 보건의료 정책을 추진할 때 자주 인용하는 OECD 통계를 보면 이런 점이 극명히 드러난다. OECD 국가들과 비교할 때 국민의료비 재원구성에서 우리나라의 정부부담 규모는 상당히 낮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이 최근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2009년 기준으로 국민의료비 재원구성에서 건강보험 등 사회보장 부담 비율이 44.7%로 가장 높고, 다음으로 가계부담(32.4%), 정부부담(13.5%), 민간보험부담(5.2%) 등의 순이었다. 반면 OECD 국가들의 재원부담율은 사회보장부담이 38.8%로 가장 높고 다음으로 정부부담 35.6%, 가계부담 19.8% 등이었다. 우리나라의 정부부담은 OECD 국가들과 비교할 때 약 1/3 수준에 불과하다. 사실상 한국 정부는 공공의료 역할 부문에서 ‘손안대고 코푸는' 식의 생색내기 수준의 역할만 해온 셈이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건강보험료 예상수입의 20%를 국고지원토록 돼 있는 규정조차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다.  

정부가 공공의료 확충에 손 놓고 방치해온 지난 수 십 년간 민간병의원의 과잉공급 현상은 심각한 지경까지 이르렀다. 수도권의 대형병원 집중화와 동네의원 과잉공급, 영세 중소병의원의 난립, 지역간 의료양극화 등으로 의료전달체계가 무너진 지 오래다. 동네의원과 대형병원이 감기환자를 놓고 서로 유치 경쟁을 벌이고 있는 한편에선 경쟁력을 잃은 중소병원들의 도산 사태가 잇따르고 있다. 지방의 환자들이 수도권의 대형병원으로 몰리면서 지역 의료기관은 갈수록 경쟁력을 잃고 있다. 일부 지역에선 분만이나 응급의료 등 필수의료서비스조차 이용하기 힘든 지경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뒤늦게 공공의료기관을 확충하겠다고 나서자 민간병의원들로부터 반발을 사고 있다. 집 앞을 나서면 병의원이 넘쳐나는데 도시형 보건지소나 공공병원을 확충하면 민간병의원은 어떡하란 말이냐는 원성이 자자하다. 심하게는 그동안 국내 의료시스템을 유지해온 민간의료기관을 말살하겠다는 것이냐는 극단적 반응도 나왔다. 

민간의료기관의 이 같은 우려를 집단이기주의로 몰아붙일 일은 아니라고 본다. 정부가 공공의료 확충에 더욱 일찍, 보다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면 지금과 같은 갈등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민간의료기관이 전체 의료기관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섣불리 공공의료 확충을 추진한다면 기존 의료체계에 극심한 혼란을 가져올 수도 있음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다.

공공의료 확충에 앞서 의료전달체계 확립과 급성기병상의 과잉 공급을 해소하는 일이 먼저다. 과잉 공급 상태의 민간의료기관을 이대로 두고 도시형 보건지소나 공공병원을 확충한다면 양 쪽 모두 생존할 수 없는 구조다. 현행 저수가 체계에서 민간의료기관은 수지타산을 맞추기 위해 ‘박리다매’식 의료서비스 제공과 비급여 서비스 제공에 나설 수밖에 없다. 기존 공공병원 역시 만성적자로 인해 지속가능성이 위협받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중앙정부나 지자체 소유의 공공의료기관을 추가로 설립하고, 이를 통해 공공의료를 확충하겠다는 고정관념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다. 민간과 공공의료가 상호 보완적인 기능을 수행하며 상생하는 방안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공공의료의 개념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공공의료 서비스 주체를 꼭 정부가 ‘소유’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과잉 공급 상태의 민간의료기관이 공공의료 역할을 수행토록 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민간의료기관이 수익적 측면에서 제공하기 힘든 건강증진과 예방의료 활동을 수행할 수 있도록 정부가 적극 지원해야 한다. 지난 2월 민간의료기관도 의료취약지 거점의료기관, 공공전문진료센터로 지정받으면 공공의료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한 ‘공공보건의료에관한법률 전부개정법률’이 공포됐다. 내년부터 시행되는 이 법에 따라 공공의료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민간의료기관을 적극 지원하고 육성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정부와 지자체가 방관자적 입장에서 적극적인 참여자로 나서 공공의료 확충에 뛰어드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이미 오랜시간 국내 보건의료 체계를 떠받쳐온 민간의료기관을 배척하거나 궁지로 몰아붙여서는 안된다. 민간의료기관이 자발적으로 공공의료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충분한 환경을 조성하고, 분명한 시그널을 줘야 한다. 지금은 '소유의 종말' 시대다. 네트워크를 통한 공유의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큰 틀에서 의료서비스 역시 그리 다를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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