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석의 진료실 단상>

1921년 토론토 출신의 밴팅(F. Banting)에 의한 인슐린의 분리는 의학사(醫學史)에 길이 남을 큰 업적이다. 1922년 1월 밴팅은 소의 췌장에서 추출한 인슐린을 14살인 톰슨에게 투여해 혈당을 520mg/dl에서 120mg/dl으로 낮추었고,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인슐린 치료를 받은 톰슨은 폐염으로 사망할 때까지 13년을 더 살았다. 그 후 인슐린으로 생명이 연장된 사람의 수는 추정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리고 2형 당뇨라도 약으로 조절되지 않을 경우 인슐린을 조기에 투여하도록 권장되고 있는 정말 소중한 약이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생명을 구한 인슐린이 때로는 살인 무기가 될 수도 있다. 폴 버호벤 감독의 영화 ‘블랙북’은 가족을 독일군에 의해 모두 잃자 일부러 독일군 장교의 내연녀가 되어 일급비밀을 빼내는 스파이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동지들에게 반역자로 오해 받고 버림받기도 했던 한 여자의 실화를 그린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배신자 한스가 주인공 레이첼을 죽이기 위해 인슐린 주사를 놓자 주인공은 쇼크 상태에 빠지면서 쵸콜릿을 먹고 겨우 탈출하는 장면이 명장면으로 꼽힌다.

즉, 수 많은 당뇨병 환자를 살린 인슐린이라 할지라도 정상인에게 다량을 투여하면 저혈당으로 쇼크에 빠지고 심하면 사망하게 되는 것이다. 같은 약이나 제도라고 하여도 어떤 사람 또는 어떤 조직에 적용하는가에 따라 긍정적으로 또는 부정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사실이다.

미국의 의료제도는 국가에서 극빈자(메디케이드)와 노령층(메디케어)만을 책임지는 시스템이어서 개인보험 없이 병원에 가기는 무척 힘든 구조였으며, 일단 의료 문제가 생기면 법정으로 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다보니 병원에서 진료받을 수 있는 환자들은 대부분 개인보험이나 국가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오는 환자들이라 적극적으로 많은 검사와 치료를 원한다. 의사들도 오진의 가능성을 최소화하고 또 소송을 피하기 위해 무척 많은 검사와 다소 과잉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적극적인 치료를 하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 있다.

필자가 치료했던 미국에서 살다 오신 할머니의 경우 B형 간염 항원은 없고 항체는 있으며 간기능도 정상인 분이었으나 B형 간염이 워낙 희귀한 미국인지라 하버드대학 병원에서 전자현미경을 포함한 매우 고가의 다양한 검사를 하고 거의 책 한 권 분량의 결과지를 가지고 온 적이 있다. 물론 할머니가 B형 간염 예방주사를 맞은 사실을 기억 못한 탓도 있겠지만, 엄청난 검사를 시행한 하버드대학 병원의 결론은 B형 간염 바이러스가 있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으나 과거 수혈 등으로 감염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실제 우리가 학생 때 배웠던 내과 교과서(Harrison)에는 각 질병을 진단하기 위해서 우리나라에서는 전부 시행하기 곤란할 정도로 많은 검사 방법들을 권유하고 있다. 그리고 의료 수가와 약가도 무척 높아 1996년 일본에 있을 때 같이 있던 멕시코 의사가 자기 여동생이 미국에서 순조롭게 2박 3일을 입원해서 분만을 했는데 만 이천 달러가 들었다고 불평하던 말이 기억난다.  

이런 문제들이 사회 이슈가 되어 덴젤 워싱톤 주연의 극영화 ‘존 큐’와 다큐멘터리 영화 ‘식코’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그런데 2010년 3월 오바마 대통령에 의해 보험 대상자를 대폭 확대하는 의료보험 개혁이 이루어졌고, 그 주요 내용은 앞으로 10년간 약 9400억달러를 투입해 무보험자 약 3200만명에게 보험의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정부가 무료로 제공하는 보험인 메디케이드의 대상이 되는 빈곤층의 범위를 확대하고 중산층에겐 보조금을 지급하여 의료보험 수혜 대상이 크게 늘어나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의료비의 급증을 가져오게 되므로 그 동안 과도하게 많았던 검사를 줄여서 의료비를 절감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미국 심장학회 등 9개 학회가 과도한 검사와 치료를 줄이기로 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즉, 개인도 기업도 국가도 감당하기 힘든 의료비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꼭 필요하지 않은 검사나 치료를 자제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과거 가난하던 시절 진료비를 감당할 수 없어서 최소한의 검사만을 하던 관행이 이어져 검사보다는 의사의 판단에 의한 진료가 주를 이뤄 왔으며 지금도 대부분의 병원이 꼭 필요한 최소한의 검사만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 영상의학회가 채택한 리스트에 있는 ‘사소한 두통 환자의 CT, MRI를 찍지 말아라’는 우리 현실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일 뿐이다. 필자의 경우 두통약에 반응하지 않는 1% 미만의 환자에게 종합병원에서 CT를 하도록 권유했을 뿐이다. ‘맹장이 의심되더라도 어린이들은 CT를 찍지 말아라’고 하였지만 거의 모든 병원에서 어른이라 하여도 맹장이 의심되면 초음파 검사만 하고 수술에 들어간다.

‘여성 난소의 물혹 정도의 흔한 증상 때문에 추적검사 용도로 CT, MRI를 권하지 말아라’도 우리나라에서 물혹이나 자궁 근종 정도로 정기적으로 CT, MRI 를 하는 병원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훨씬 안전하고 간편하면서도 저렴한 초음파 검사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부 언론에서 미국의 과잉 검사, 치료를 지양하는 노력을 소개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된다고 하지만 미국에서 목표로 삼는 것보다 훨씬 적은 검사를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특히 지금은 병원에서 검사한 자료를 환자가 원할 경우 내어주며 그 자료를 본 다른 병원에서도 원하는 영상이 빠졌거나 시간이 경과하여 최근 영상이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다시 검사하지 않는다.

이렇듯 우리와 미국의 진료 문화가 다르다면 당연히 추구해야 할 방향도 다를 수 밖에 없다. 당뇨환자에게 인슐린이 소중하다고 정상인에게 인슐린을 투여하면 생명이 위험해지듯이 미국의 과잉 진료 자제 노력을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하려는 시도는 환자와 의사간의 불신을 초래할 뿐 아니라 꼭 필요한 검사를 하지 못해 오진의 확률을 높이는 등 적절한 진료를 받지 못하게 하는 위험한 발상일 수 있다. 그리고 그 피해는 환자와 의료진 그리고 보험재정을 담당하는 정부 모두에게 돌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현석은?

1986년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학사1994년 서울아산병원 흉부외과 수료 및 전문의1998년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박사2006년 대한의료커뮤니케이션학회 이사2011년 광운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대학원 의료커뮤니케이션 박사2011년 한국문화산업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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