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미국인들의 의료비 부담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다. 한미FTA와 관련해 ‘의료민영화 괴담’이란 식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미국 병원의 맹장수술비는 1,000~2,000만원 대에 이른다. 만일 보험에 가입돼 있지 않은 미국인이 맹장수술을 받는다면 고스란히 이를 본인부담으로 지불해야 한다.

반면 우리나라의 맹장수술비는 의료기관 종별에 따라 70만원부터 200만원대 수준이다. 건강보험을 적용받기 때문에 실제로 환자가 내야하는 본인부담금은 수 십 만원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의 의료수가가 미국과 비교해 상당히 낮게 책정된 점도 있지만 미국의 진료비가 비싼 것도 사실이다.

현재 미국인 가운데 민간의료보험은 고사하고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의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인구가 약 4,70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들에게 몸이 아파도 병원 치료는 언감생심이다. 미국에서 과다한 의료비로 인한 파산자가 연간 20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개인파산 이유 1위가 의료비로 꼽힐 정도니 말 다했다. 

그런데 최근 미국 정치권과 의료계에서 흥미로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 첫 번째가 오바마 정부의 의료보험 개혁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 2007년 대선에서 건보개혁을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됐다. 취임 이후 '건강보험개혁법'(Affordable Care Act)을 밀어붙였고, 결국 지난 2010년 3월 의회의 최종 승인을 받았다. 총 450개 조항으로 구성된 개혁법안의 취지는 의료 사각지대에 방치된 미국인 4,700만 명에게 저렴한 비용으로 의료보험을 제공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건보개혁법안이 연방의회를 통과한 뒤 각 주 정부에서 위헌 소송이 잇따랐고 현재 대법원에서 이 법안의 위원 여부를 둘러싼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오는 6월경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나오기 전까지 이른바 ‘오바마 케어법’을 둘러싼 논란이 계속될 전망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사안은 최근 미국 의료계가 벌이고 있는 ‘Choosing Wisely' 캠페인이다. 직역하자면 ’현명한 선택‘ 정도가 적당할 것 같은 이 캠페인은 “불필요한 의료비 지출을 줄이자”는 취지 아래 미국심장학회를 비롯해 영상의학전문의학회, 가정의학회 등 9개 학회가 참여한다. 이들 학회는 총 45개의 ‘불필요한 검사 또는 치료’ 리스트를 선정·발표했다. 

45개 리스트에는 ‘사소한 두통 환자의 CT, MRI를 찍지 말자’라든가 ‘알레르기 검사에 있어서 면역글로불린G 검사(IgG)나 면역글로불린E의 무분별한 묶음 검사를 하지 말자’ 등의 항목이 포함돼 있다. 캠페인에 참여하는 학회들은 45개 리스트에 포함되는 검사나 치료는 의사가 환자와 논의해 검사나 치료 여부를 결정하라고 권고했다.

미국 의료계의 이런 움직임은 고가의 검사와 치료의 상당 부분이 불필요하거나 되레 환자에게 해로울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관련 내용을 보도한 뉴욕타임즈의 기사에는 ‘Do Patients Want More Care or Less?'란 의미심장한 제목이 달렸다.

이 캠페인의 근본 취지를 들여다보면 결국 과도한 의료비 부담이 기저에 깔려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바마 케어법’도 그렇고 ‘현명한 선택’ 캠페인도 그렇고 미국은 지금 ‘고비용·저효율’ 체제의 의료시스템 개혁이란 기로에 놓여있다.

미국은 그렇다 치고, 국내에서도 의료개혁까지는 아니더라도 의료시스템 변화의 물결이 거세다. 인구고령화와 의료기술의 발달로 점점 의료비 지출 부담이 높아지고, 건강보험 재정도 위태위태하다. 그래서 보험재정 지출을 줄이는 방향으로 진료비 지불제도 개편이나 의료전달체계 개선, 급여비 심사 강화 등의 다양한 방안이 추진되거나 추진될 예정이다.  

여기에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에서는 각종 의료공약을 쏟아내느라 정신이 없다. 각 정당이 경쟁적으로 쏟아내는 의료공약의 핵심은 결국 국민들의 의료비 부담을 줄이겠다는 것이다. 무상의료를 통해 의료비 부담을 거의 없애겠다고 하거나 비용 부담이 높은 비급여를 급여로 전환하겠다거나 둘 중 하나다.

이를 두고 정치권이 표를 얻기 위해 막대한 재정이 소요될 수 있는 의료공약을 선심성으로 내뱉고 있다는 비판도 높다. 정부도 정치권의 의료복지 공약을 에둘러 비판하며 국민들의 부담만 늘어날 것이라고 어깃장을 놓았다.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확대하겠다는 의료공약의 취지나 그 방향성에는 적극 찬성한다. 재정 소요가 엄청날 것이란 우려에도 공감한다. 재정을 더욱 확충하고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확대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사회보장제도란 거창한 이름을 붙여놓고 언제까지 건강보험 가입자들에게 높은 본인부담을 지울 것인가. 또 언제까지 의료서비스 공급자를 저수가로 쥐어짜 버틸 셈인가.

결국 해답은 건강보험 재정 확충이다. 정치권은 국민들의 추가 부담 없이 조세개혁 등을 통해 건강보험 재원을 마련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하지만 다 공약(空約)일 뿐이다. 공짜 점심이 없다는 걸 우린 이미 알고 있다. 결국 가입자들이 지금보다 더 부담해야 한다. 국민들에게 ‘보험료 폭탄’을 안길 것이란 주장은 정치적 프로파간다(선정선동)일 뿐이다. 건강보험료 부담은 가입자와 기업이 반반씩 부담하고 있다는 점을 짐짓 모른 척 한다. 만일 보장성 확대를 위해 건강보험 가입자의 보험료 부담이 10만원 정도 추가로 늘어난다면 실제로 추가 부담해야 하는 것은 5만원이다. 나머지 5만원은 기업의 몫이다. 

무엇보다 건강보험에 대한 국고지원을 더욱 확대해야 한다. 최소한 국고지원 의무라도 제대로 지켜야 한다. 해마다 건강보험에 지원해야 하는 국고지원금 미지급 사태가 발생하고 있다. 실제로 정부가 지난 2007년 이후부터 최근 5년간 건강보험 국고지원금 가운데 미지급한 돈이 4조원을 넘는다. 그래 놓고 가입자들한테는 보험료 정산을 통해 매년 1조원 안팎의 돈을 추가로 징수해 갔다. 국가의 책임은 방기한 채 가입자들의 보험료만 빼앗듯 걷어간 꼴이다.

결론은 이렇다.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를 위해서는 가입자들이 지금보다 더 많은 보험료 부담을 져야 한다. 물론 소득 수준에 따라 그 부담은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소득이 많은 가입자가 더 많은 부담을 지고 소득이 적은 가입자가 훨씬 낮은 부담을 지게끔 돼 있다. 더 이상 ‘보험료 폭탄’이란 말로 국민들을 겁주지 말자. 당연히 기업도 부담을 져야 한다. 정부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부담을 떠안아야 한다. 이렇게 나눠서 부담을 진다면 ‘보험료 폭탄’ 없이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를 이룰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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