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설마 했는데 그렇게 됐다. 지난 25일 실시된 제37대 대한의사협회 회장 선거에서 차기 회장으로 노환규 후보가 선출됐다. 조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노환규 당선자가 회장으로 몸담고 있던 전국의사총연합을 중심으로 ‘노풍’이 불었고, 젊은 의사들 사이에서 그를 지지하는 분위기가 감지된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도 의사사회가 워낙 완고하고, 의협 회장 간선제 선거방식이 오래 전부터 기득권을 누려온 노회한 대의원들이 짜놓은 프레임이란 측면에서 그가 당선될 가능성이 과연 얼마나 될까 반신반의했었다. 그런데 결과는 의외였다. ‘노풍’이 기득권 대의원들의 간선제 프레임을 철저하게 깨뜨려버린 것이다.  

지난 2009년 4월 열린 의협 정기대의원총회를 다시 떠올려보자. 당시 정총 본회의에는 경북도의사회와 대한의학회가 제안한 선거인단에 의한 회장선거 간선제 안건이 상정됐다. 정총이 열리기 전까지만 해도 설마 직선제에서 간선제로 다시 회귀할까하는 관측이 많았다. 그러나 정총 본회의에서 재적대의원 243명 중 162명의 출석과 출석대의원 128명의 찬성으로 간선제안이 덜컥 의결됐다. 의협 소속 의사회원 수 만 명의 선거권이 백 명이 조금 넘는 대의원들의 결정으로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셈이다.

의약분업 저지투쟁을 거치면서 의협 내부의 민주화와 의사사회의 단결을 도모하자는 취지로 진통을 거듭한 끝에 2001년 직선제가 도입됐다. 하지만 불과 8년 여 만에 투표참여율 저조와 선거비용 과다, 지역간 갈등 심화 등을 이유로 다시 간선제로 돌아섰다. 하지만 의협 회장선거가 직선제에서 간선제로 회귀한 이면에는 ‘빼앗긴 기득권의 향수’에 젖어 있던 이른바 ‘원로’ 대의원들의 과욕이 작용했다는 분석도 적지 않았다.

의협 대의원회란 곳의 권한은 막강하다 못해 무소불위다. 의협의 회칙개정 및 중요 안건의 최종심의와 의결이 이곳에서 이뤄진다. 이렇게 중요한 대의원회를 구성하는 대의원은 원칙적으로 각 시도 지부, 의학회 및 협의회에서 회원들의 직접·비밀투표에 의해 선출토록 돼 있다. 문제는 그런 원칙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회원들의 손으로 뽑기보다 특정 지역이나 직역의 ‘원로 회원’ 중에서 지명되는 것이 일종의 관행이었다. ‘한번 대의원은 평생 대의원’이란 비아냥거림도 들린다.

일반 회원이 대의원에 선출되기란 거의 불가능했고, 그러다보니 대의원총회에서 의사사회의 여론과 동떨어진 결정을 내릴 때가 적지 않았다. 지난번 간선제 전환 결정 역시 수많은 의협 회원들이 거세게 반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의원총회에서 의결됐다. 

그런데 이번 회장선거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의협 대의원회가 간선제 판을 깔아 놨더니 대의원들과 가장 대척점에 있는 후보가 당선된 것이다. 간선제 선거인단에 참여하는 의사들이 기존 지역의사회 활동에 적극적이었던 임원이나 보수적인 성향의 원로들이 주로 참석할 것으로 예측됐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는 달랐다. 의료환경에 불안감을 느낀 젊은 의사들과 의협의 변화를 갈망하는 회원들이 적극적으로 선거인단에 참여했고, 노환규 후보의 압승이란 결과를 이끌어 낸 것이다. 

직선제를 간선제로 후퇴시킨 원로 대의원들의 '꼼수'는 일거에 날아갔다. 의사사회의 여론을 짚어내지 못하고 이른바 ‘체육관 선거’를 통한 기존 프레임의 고착화를 꿈꾸던 기득권층의 서글픈 노욕은 물거품이 돼버렸다. 만약, 이번 선거가 직선제로 치러졌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됐을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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