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윤희의 다큐공감>

필자는 영화에 대해 깊이 있게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메시지 전달의 도구로 활용했던지라,  영화나 창작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만한 역량은 안 될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그냥 영화를 소비하고 즐기는 일반인으로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영화라는 창작물을 보며 한 가지 느끼는 것은 결국 한 감독에게는 일생일대의 주제가 관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주제는 평생 영화를 하는 감독에게 두어 번 정도 살짝 다른 모습으로 외피를 바꾸기도 하지만, 대부분 대동소이한 변주이며, 한 가지 맥을 짚고 있는 것 같다. 이걸 창작의 매너리즘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때로는 어떤 감독들에게서 보이는 너무나 비슷한 소재나 주제의 변주적인 작품들의 필모그래피에 함부로 평가가 내려지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저 감독은 저 말밖에 할 게 없을까? 세상 그 많은 딜레마, 논쟁거리, 갈등, 고통, 고난, 문제의식 혹은 그 많은 행복, 아름다움, 신비로움 등등 중에서 저거 하나에만 매달리고 있나?’ 이런 생각은 누구나 한번쯤 해봤을 것 같다. 길게 서론을 늘어뜨린 이유는 필자 자신에게 변명 거리를 주기 위함임을 미리 고백한다. 아직 세상에 내놓지 않았지만, 다큐멘터리 작업 이후에 이어지는 자신의 극영화 시나리오 습작품들 모두에서 누군가에게 비판받을 만한 ‘물고 늘어지기’가 분명 보였던 것이다.

그것은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성향을 벗어나지 못한 덜 익은 사람이 “세상이 얼마나 부조리하며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하며, 피상적인 쾌감과 본능적인 욕구 충족에 매몰되어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묘사하거나 우회적으로 표현하거나, 어쨌든 그 테두리 안에서 맴돌고 있는 것이었다. 그 안에는 사회 변혁을 꿈꾸며 운동하는 단체 활동가들의 좌절과 그들에 대한 사회의 냉담한 반응 등이 그려지기도 한다. 단편과 장편 시놉시스 모두에서 비슷한 논조가 흐르고, 그 주요 인물들 역시 노조, 시위대, 용역 깡패 등등이 나오는 것을 보고 스스로도 “꼴에 몇 년 이 바닥에 있었답시고…”라며 자조해버리고 말았다.

한 가지 정말 색다른 변주가 있기는 하다. 대부분의 구상 작품들이 단조의 음울한 노래들이라면, 2차 병원 인턴들의 일상을 담은 한 작품은 장조의 명랑한 동요 같기도 하다. 그런데 크게 보면 같은 맥이다. 여전히 그 인턴들도 세상의 부조리에 대항해서 파업을 감행한다. 스스로도 아직 빈칸으로 남아 있는 필모그래피가 구태의연한 ‘운동적’ 발상으로만 채워진다면 참으로 한심할 것 같다. 삼십년 좀 넘게 살아오면서 보고 배운 것이 크게 의학과 사회 운동, 기독교 신앙 이 세 가지인데, 그 세 가지가 필자의 (미완인)창작물에 젖줄이 되고 있다. 

따라서 오랫동안 창작을 하려면 새로운 발상에 따라 새로운 관계와 경험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천재적 상상력이 있지 않은 이상, 살아보지 않고 구체적으로 묘사하거나 작품으로 승화시킬 수 없을 것이다. 창작 매너리즘에 매몰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다양한 장르를 표방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제작비 여건이 된다면 SF 영화를 만들어 멸망해가는 물질 만능주의, 종말에 가까운 세상에 공생의 필요성을 외치고 싶기도 하다. 생각해보니, 그렇게 하더라도 아직은 한 가지 맥이 흐르는 것을 어쩔 수 없다. 비관적인 세계관을 가진 필자가 낙관적인 해피엔딩 작품을 할 수 있으려면, 그것을 세상에서 경험해야 할 것이다.

마무리로 급선회하는 감이 없지 않지만, 그 경험을 2012년을 시작으로 제대로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영화는 직접적으로 세상을 바꾼다기보다, 사람의 마음을 바꾼다. 그리고 그 사람의 마음은 정치를 바꾸고, 정치는 다시 세상을 바꾸는 선순환이 있기 마련이다. 아직 열정에 불타오르는 30대 작가로서, 창작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도록 이 세상이 한 작가의 삶에 낙관적 경험의 기회를 가져다주기를 소망해 본다. 

송윤희는?

2001년 독립영화워크숍 34기 수료2004년 아주대학교 의과대학 학사2008년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석사2009년 산업의학과 전문의2011년 다큐멘터리 '하얀 정글'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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