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립대병원의 공공적 역할 요구 높아져…"정부 지원없이 공공성 강요 못해"

무상급식 도입을 둘러싼 찬반 논란을 계기로 이른바 '무상시리즈'가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고 있다. 무상급식의 경우 찬반 논란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실제로 각 지자체를 중심으로 무상급식 도입이 속속 추진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무상의료의 경우 만만찮은 재원부담과 국내 의료공급체계 등을 따져볼 때 쉽지 않을 것이란 우려가 높다. 
이런 가운데 전국보건의료노조와 한국환자단체연합이 ‘무상의료 시대! 한국 의료의 길을 찾는다!’는 기치를 내걸고 지난해 11월부터 정책 대안마련 워크숍을 시작했다. 양 단체는 올 2월까지 총 15회 연속으로 진행되는 이 워크숍을 통해 무상의료 도입의 전제조건인 '공공보건의료체계 확립과 의료공급체계 개편' 방안을 모색할 방침이다. 본지는 4개월에 걸쳐 진행되는 워크숍을 현장 동행하며 과연 국내 의료환경에서 의료소비자와 공급자를 만족시킬 수 있는 무상의료 도입 방안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해보고자 한다.<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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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90년대 이후 우리나라의 급성기 병상은 가파르게 증가했다.

특히 2000년 전후를 기점으로 단위 인구당 급성기 병상수는 OECD 평균을 추월했으며 공급이 수요를 넘어서게 됐다.

이중 사립대병원은 국내 전체 병원급 의료기관 병상의 20%를 차지할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사립대병원이 ‘공공성’이라는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지 못한 채 지나친 상업화, 물량 경쟁과 양적 팽창을 통한 영리 추구에 골몰하고 있다는 지적이 계속돼왔다.

그러나 사립대병원의 이러한 문제들이 경영상의 문제라기 보다 정부 및 의료제도의 근본적 문제에서 비롯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전국보건의료산업노조와 한국환자단체연합회는 지난 7일 고대의료원 구로병원에서 ‘사립대병원의  공공적 발전방안’을 주제로 ‘의료공급체계 혁신을 위한 14차 기획워크숍’을 개최했다.

이날 워크숍에서 서울의대 의료관리학교실 이진석 교수(사진)는 기조발제를 통해 “사립대병원이 우리나라 의료공급체계에서 어떤 역할과 기능을 수행해야 할지에 대한 개념 정립은 이뤄지지 않은 실정”이라며 “사립대병원에 대한 연구와 정책 활동은 사실상 전무하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그만큼 사립대병원은 정책적 관심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며 “사립학교법 및 관련 부속 법령에서 이사회, 재산 및 회계 등에 대한 규정 만을 제시하고 있을 뿐 사립대병원의 역할과 기능을 다룬 법적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고 말했다.

사립대병원의 공공적 기능과 역할 수행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경쟁적인 의료시장 환경 ▲설립 및 지배구조의 복잡성과 관리행정의 비체계성 ▲공공적 기능 수행을 위한 지원 부재 ▲사립대병원의 취약한 공공성으로 인한 문제 등을 꼽았다. 그는 “개념적으로 혼란스러운 사립대병원의 역할과 기능을 정립하고 공공적 발전 전망을 모색하기 위해 사립대병원이 가지는 공공성의 의미, 사립대병원의 공공성 수준, 사립대병원이 공공적이지 못한 이유, 공공성 갖춘 사립대병원의 발전방안을 위해 필요한 것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립대병원의 공공적 발전 방안대안으로 병원 간 경쟁 완화 방안을 모색하고 사립대병원 행정관리체계 및 소유지배구조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다.

그는 구체적 대안으로 ‘대학병원법인’ 신설을 통해 사립대병원의 범위를 재설정하고 사립대병원의 행정관리체계를 개선과 관리감독부처를 현행 교육과학기술부에서 보건복지부로 이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또한 병원 경영의 투명성을 제고하고 병원 내 의사결정구조의 전문성과 민주성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의견도 내놨다.

무엇보다 사립대병원이 공공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정부의 지원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사립대병원의 공적 기능 강화를 위한 지원 및 관리를 위한 방안으로 ▲공공적 기능 수행을 위한 재정지원 체계 마련 ▲사립대병원에 대한 공공적 지원 확대와 함께 이에 상응하는 관리와 평가체계 확립 ▲권역 국립대병원과 연계·협력해 권역 거점 3차병원의 역할 분담 수행 등을 제시했다.

그는 “사립대병원의 공공적 발전을 위한 실행 과제로 ‘사립대병원법’ 제정과 더불어 병상수급계획 관련 조항 및 상급종합병원 지정기준이 강화되야 한다”며 “의료기관 회계 투명성 향상을 위한 ‘의료기관 회계기준 규칙’ 개정 등 기존 의료법의 개정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공공의료 역할 수행할 수 있도록 지원부터 강화해야"기조 발제 후 이어진 토론에서는 이진석 교수가 지적한 사립대병원의 문제점에 대한 반론이 제기됐다.

첫 토론자로 나선 고려의료원 구로병원 정형외과 박종훈 교수(사진)는 “병원이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의료 자체가 공공적이어야 한다는 가정 때문에 사립대병원도 공공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동의하기 어렵다”며 “그렇다면 미국 LA에 거액을 들여 미국인 환자 유치를 위한 사무실을 운영하는 서울대병원은 공공적인가”라고 반박했다.

박 교수는 “국가가 상당수의 예산을 지원하는 국립대병원과 정부 지원없이 자력으로 운영하는 사립대병원에 동일한 공공성을 강요할 수는 없다”며 “의료에 있어 공공성이 강조되기 위해서는 국가가 모든 의료기관에 재원을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도권 중심 병원들이 규모경쟁을 벌이는 것 역시 사립대병원의 문제가 아니라 정부의 잘못된 정책과 의료기관에 대한 국민적 오해에서 비롯됐다는 의견도 나왔다.

박 교수는 “사립대병원은 과거에도 존재했었는데 최근에 문제가 되고 있는 수도권 중심 규모 경쟁의 주범으로 왜 사립대병원이 지목돼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이는 사립대병원의 문제가 아니라 허가병상 조절에 실패한 정부 정책의 실기와 대학을 가장한 기업형 병원의 진출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안전한 병원이 좋은 병원이라는 인식을 떠나 수도권에 있는 큰 병원이 좋은 병원으로 생각하는 국민적 사고도 수도권 규모 경쟁의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덧붙였다.

박 교수는 “최근 거론되고 있는 사립대병원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철저한 의료전달 체계의 확립, 규모 위주 경쟁을 벗어나 안전 위주의 의료문화 정착, 국민건강심사평가원과 국민건강보험공단 기능의 재정립을 통한 신의료의 효율적인 관리가 필요하다”며 “정부의 적극적 재정 지원과 지속 가능한 전문적 의료정책의 정착도 동반돼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책의 프레임을 국립대병원과 사립대병원을 비교하는 것은 적절한 분류가 아니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고려대의대 예방의학과 윤석준 교수는 “사립대병원과 국립대병원의 비교 프레임으로 가기에는 정책의 쟁점을 이끌어 내기 어렵다”며 “대형종합병원과 대학병원의 프레임으로 가야 비교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윤 교수는 “진료수입만 가지고 운영하는 사립대병원의 시스템으로는 미래를 예측하기에는 힘들다”며 “이 문제를 개선하지 않으면 대학병원의 공공적 역할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정부의 재원을 사립대병원에 지원해 공적으로 운용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윤 교수는 재원마련이 쉽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윤 교수는 “올해 복지부 예산 36조원 중 12조원은 공적연금으로 들어가고 나머지 24조원이 남는데 이중 17조원 정도는 기초 생활보장등의 복지예산이다”며 “나머지 7조원만 보건분야 예산인데 이중 5조5,000억원이 건보예산에 투입되고 나면 1조5,000억원이 남는 취약한 예산구조라 사립대병원이 공공적 역할을 하게 하기 위한 예산마련에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분석했다.

대학병원에 대한 정부의 보편적 지원이 필요하며 지역적 특성에 따라 정부의 지속적 관리가 이어져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보건노조 나영명 정책실장은 “정부가 우선적으로 의료가 부족한 지역을 조사한 후 해당 지역에 있는 사립대병원이 공공의료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며 “정부가 요구하는 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대학병원은 시설, 경상비 지원을 통해 정책적 의료를 수행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 실장은 “현재 교과부는 대학병원에 대해 문제의식이나 책임감 없이 접근하고 있다”며 “관리부처를 복지부로 이관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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