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일부 특수장소를 제외하고 약국을 통해서만 의약품을 구입할 수 있다. 그러다보니 약국이 없거나 부족한 지역, 또는 약국이 문을 닫는 심야시간이나 공휴일에는 국민들이 해열제나 감기약 등 가정상비약 수준의 간단한 의약품을 구입하는 것조차 힘든 상황이다.

한 예로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2010 농림어업총조사 지역부문 결과'를 들 수 있다. 조사 결과를 보면 전국 각 지자체의 읍․면 지역에 설치된 마을 중 약국이 설치된 곳은 약 10% 정도에 불과했다. 특히 차를 타고 인근 지역의 약국으로 가는데 20분 이상 시간이 소요되는 마을도 약 20%에 달했다.

이런 불편함을 해소하고자 일반의약품 중 소화제, 해열진통제 등 가정상비약에 대해서는 약국이 아닌 24시간 편의점 등을 통해 판매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해 전국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일반약 슈퍼판매에 대해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83.2%가 상비약의 약국 외 판매에 찬성한다고 답했다. 경실련이나 일부 경제단체가 조사한 설문조사에서도 이와 비슷하거나 더 높은 찬성률을 보였다.

사실 일반약 슈퍼판매 허용 논의가 시작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앞서 1997년도 의료개혁위원회 및 2006년 총리실 산하 규제개혁추진단 등에서 일반의약품의 약국 외 판매를 추진한 바 있다. 하지만 당시엔 일반의약품 중 일부를 의약외품으로 전환하는 수준에서 마무리됐다.

현 정부 들어서도 경실련 등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일반약 슈퍼판매 허용을 촉구하는 요구가 지속해서 제기돼왔다. 이에 따라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약사법 개정을 위한 전문가 간담회 및 공청회를 거쳐 같은 해 9월 약사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약사법 개정안은 국회에 제출된 이후 해당 상임위에서 단 한 번의 논의도 없이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러다 18대 국회 임기를 3개월여 남겨둔 지난 7일에야 비로소 전체회의에 상정됐다.

앞으로 법안 처리 전망도 상당히 어둡다. 지난 7일 전체회의에서 복지위 소속 여야 의원들은 일제히 일반약 슈퍼판매에 따른 약물오남용과 부작용 문제를 제기하며 약사법 개정안 처리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렇다면 국회의원들이 우려하는 것처럼 일반약의 슈퍼판매가 이뤄지면 약물오남용과 부작용에 따른 약화사고 가능성이 지금보다 훨씬 높아질까. 최근 복지위 전문위원실이 작성한 약사법 개정안에 대한 검토보고서를 살펴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아 보인다.

검토보고서에 따르면 우선 미국을 비롯해 영국, 독일 캐나다, 덴마크, 호주, 네덜란드, 스위스 등의 국가에서 비처방의약품을 약국이나 드럭스토어가 아닌 장소에서 일반 판매가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프랑스의 경우 비처방의약품을 반드시 약국에서 약사에 의해 판매토록 하고 있었으며, 일본은 약국 외에 드럭스토어에서 약사가 아니더라도 일정 자격이나 교육을 받은 자가 판매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약계나 정치권이 내세우는 약국 외 판매가 이뤄질 경우 약물오남용에 따른 부작용 우려가 높아질 것이란 주장에도 해석상의 차이가 있었다.

먼저 대한약사회에 따르면 OECD 국가 중 의약품 약국 외 판매를 허용하는 국가의 국민 1천명당 약화사고 평균건수는 연간 0.35건으로 약국 외 판매를 허용하지 않는 국가의 0.18건보다 2배나 높다. 미국의 경우 0.92건으로 전체 평균 0.28건의 3.3배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대표적인 약국 외 판매 대상 일반약으로 거론되는 타이레놀의 경우 약국 외 판매를 허용하지 않는 프랑스(1988~1990년 18명)는 이를 허용하는 영국(1989~1991년 400명), 미국(매년 450명)보다 타이레놀로 인한 사망자수가 현저히 낮다고 약사회는 파악했다. 

이러한 수치 비교에는 상당한 허점이 있었다.

검토보고서가 인용한 복지부 조사에 따르면 프랑스의 경우 약국 외 판매를 허용하지 않는 대표적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인구 천명당 약화사고가 0.52명으로 약국외 판매를 허용하는 영국의 0.32명에 비해 더 높았다.

타이레놀의 약화사고 건수에도 해석상의 차이가 있었다.

복지부에 따르면 약사회가 인용하는 논문에서는 미국의 경우 타이레놀 1품목에 의한 약화사고가 아닌 아세트아미노펜 성분으로 인해 발생한 결과이며, 사망 450명 중 254건은 과다복용에 의한 사망으로 나타났다. 254건의 사망 중 OTC에 의한 사망은 140건으로 그 중 95건이 의도적인 과다복용(intentional overdose)에 의한 것이었다. 약사회가 강조한 프랑스의 타이레놀에 의한 사망자 수는 프랑스 독성센터에 보고된 건수(18건)로서 실제 건수는 보고된 건수의 2~10배에 달할 것으로 추정됐다는 복지부의 조사자료도 검토보고서는 인용했다.

앞서 작년 10월에는 대한내과학회와 임상약리학회, 소아과학회, 안과학회, 피부과학회 등 10개 학회 관계자들이 '일반의약품 약국 외 판매 관련 전문가 회의'를 갖고 약국외 판매 품목으로 거론되는 의약품의 안전성은 의학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에서는 일반약의 슈퍼판매가 허용되면 당장에 엄청난 부작용이 야기될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있다. 의료전문가인 의사들의 의견은 못들은 척 하고 정책의 직접적 이해당사자인 약사들의 입장과 의견에만 귀를 기울이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일부 의원은 “제가 약사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대다수 국민들이 가정상비약을 약국 이외의 장소에서 판매하는 것에 찬성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해소할 수 있는 정책적 방안을 모색하기보다 약사들의 입장과 부작용 우려만을 앞세워 반대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올바른 자세가 아니라고 본다.

그러면서 “국회의원들이 약사집단의 눈치 보기를 한다는 억울한 오해를 받고 있다"고 강변하다니 기가막힐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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