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국가의 사회보장이 확대되느냐 축소되느냐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사실 몇 가지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경제 상황은 물론이고 집권 정부의 정치적 성향, 국민적 공감대, 역사적 배경 등 수 많은 변수들이 서로 맞아떨어져야 제도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정치사회적 요건과 선진국의 역사적 경험을 종합해 보았을 때 2012년이야말로 의료보장 확대를 포함한 사회안전망 강화의 교두보를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다.

그 이유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나라가 경제수준에 비해 복지제도의 확충이 더딘 근본 이유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 원인이 제거될 때 비로소 획기적인 복지제도의 발전이 비로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 원인이 무엇보다 1970년대 이후 압축적인 고성장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 기성세대의 머릿속에 생긴 ‘성공에 대한 신화’와 그 이면에 박혀버린 ‘가난에 대한 편견’이라고 본다.

고성장기에는 가진 것이 없는 사람도 개인의 노력과 재능만으로 부와 성공의 신화를 일궈낼 수 있는 기회가 비교적 많다. 실제로 우리 기성세대는 경험적으로 주변에 이런 사람들을 흔치 않게 발견하며 한 세대를 살아왔다. 문제는 이런 성공 신화의 인식 너머에는 자연히 가난이 게으름에서 비롯된다는 편견도 뒤따르게 된다는 점이다. ‘젊고 사지 멀쩡한 놈이 왜 저러고 있어’라는 흔히 듣는 비난은 가난 혹은 실업에 대한 이러한 인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성공과 가난에 대한 이런 사고의 틀 안에서 복지정책은 장애인이나 노인, 극빈층 등 예외적인 대상에 대한 잔여적 복지를 벗어나기 어렵다. ‘젊고 사지 멀쩡한 놈들’에게 주는 보편적 복지란 마치 한 여름을 놀며 지낸 베짱이들을 배불리는 것만큼이나 괘씸하고 소모적인 것이 된다. 그리고 실제로 고성장 시대에는 국가 경제의 전체의 규모가 커지면 특별히 분배 정책을 시행하지 않아도 빈곤층이 줄어드는 낙수효과가 유효했다.

그런데 이런 뿌리 깊은 국민들의 인식이 송두리째 변화한 것이 바로 이명박 정부 시기, 특히 무상 급식 논쟁이 거세게 벌어진 2011년이다.

사실 이러한 의식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사회경제적 배경은 이미 1997년 IMF 사태를 통해 마련된 지 오래이다. 이 때 이미 낙수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고성장의 시대가 끝났고, 세계의 신자유주의적 질서에 편입된 우리 경제는 무한경쟁으로의 되돌이킬 수 없는 정글 속에 내던져지고 말았다. 이는 비단 한국만의 특수한 경험이 아니다. 대다수의 선진국들이 일정 규모 이상 경제가 발전하면 그 후로 경제적 형평성이 후퇴하기 시작한다.

IMF 이후 10여년을 보냈지만 많은 국민들은 고성장 시대의 성공 신화에 대한 미련의 끈을 놓지 못했다. 다시 그 시대를 재현해줄 지도자를 기대했고 2007년 대선에서 ‘국민성공시대’를 슬로건으로 내건 이명박 대통령을 당선시켰다.

하지만 적어도 다수의 서민들에게 ‘국민성공시대’는 재현되지 않았다. 글로벌경제 위기에 대한 대응에 있어 비교적 선방을 했고 삼성전자로 대표되는 대기업 주도의 경제발전과 G20회담 등 일정 수준의 국위 선양을 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아무런 성과도 체감할 수 없었다. 오히려 양극화의 심화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과 물가 인상으로 인한 경제적 고통은 그 전보다 더욱 삶을 팍팍하게 했다.

국정운영의 기본 방향을 경제부양에 맞춘 이명박 정부 시기를 지나오면서 국민들은 이제야 비로소 경제가 성장하면 그 과실이 서민들에게 자연스럽게 흘러들어오는 고성장 시대가 다시 오지 않는다는 냉혹한 진실을 온몸으로 각성하게 된 것이다. 국가가 적극적으로 분배에 나서지 않으면 아무리 경제가 성장해도 그 열매는 그저 가진 자들이 독식할 뿐이라는 각성이었다.

당연히 이에 뒤따르는 좀 더 보편적이고 적극적인 복지정책에 대한 갈증은 서울시의 무상급식 투표와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통해 뜨겁게 표현됐다. 국민의 60%가 가난이 사회구조 탓이라고 생각한다는 최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결과도 이러한 국민의 의식변화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거대한 의식 변화의 끝자락에 공교롭게도 국회의원선거와 대통령 선거라는 두 번의 가장 중대한 선거가 있다.

여러 선진국의 경험에서 볼 때 보수정당의 정치적 입지가 축소되었을 때 좀 더 적극적인 복지정책을 표방하는 경향이 있다는 기존의 연구결과들처럼 지금 한나라당 역시 매우 공격적인 사회보장 확대 정책들을 내놓고 있다. 진보 정당들 역시 이런 국민 의식의 변화를 모를 리 없다. 즉 여야 모두 복지 확대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돼 있는 상황에서 더 나은 복지 공약을 내놓기 위한 치열한 정책 경쟁을 벌일 것이 불 보듯 뻔하다.

특히 의료보장의 경우 두 번의 선거를 거치면 가장 치열한 정책경쟁이 예상되는 분야이다. 왜냐하면 공공부조 중심의 우리 복지제도의 특성상 복지혜택을 확충한다 한들 주로 저소득층에게 집중이 되기 때문에 그 정치적 효과는 매우 제한적이다. 반면에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사회보험 중심의 의료보장제도는 보육 및 교육정책이나 일자리 정책 등과 함께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게다가 그 이유야 어찌됐건 건강보험 재정 상황도 그다지 나쁘지 않다.

정치 사회적으로나 국민의 인식 측면에서나 이처럼 의료보장 확대를 포함한 복지제도를 확충할 수 있는 이런 좋은 조건들은 앞으로 수 십 년간 다시 오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정치사회적 조건이 좋다고 해도 그 좋은 조건들을 엮고 모아 줄 하나의 구심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복지 확충에 대한 신념을 가진 정치지도자는 물론이고 시민단체, 학계의 지식인, 언론인들을 중심으로 일정한 조직체가 구성될 필요가 있고 이를 통해 선거를 앞두고 이뤄지는 정당의 정책의제설정 과정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다. SNS 등을 통한 전 국민적인 캠페인도 필요할 것이고 특히 직접 정당의 공약 개발에 참여하는 학계 인사 등을 중심으로 의견을 모으고 힘을 실어주는 노력도 필요하다.

여러 국가의 복지와 정치의 상호 영향에 대한 많은 연구들이 공통적으로 고백하는 것은 복지정책이 매우 경로 의존적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정책이 특정한 발전 방향으로 들어서면 이를 나중에 뒤집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보건의료 분야에 적용을 해보자면 민간의료기관이 전체의 90%를 차지하는 현실을 뒤집고 무작정 공공의료기관을 양적으로 늘리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아무리 변화의 흐름이 거세다고 해도 민간의료가 90%를 차지하는 현실에서 전면 무상의료와 같은 급진적 변화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질병으로 인한 가계 파탄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정도의 의료보장 확대는 결코 불가능한 목표가 아니다. 역사의 물길을 완전히 되돌릴 수는 없을지라도 2012년이 의미 있는 변화의 큰 흐름이 시작될 한 해로 기억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전경수는?

고려대학교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보건학석사, 서울시립대에서 행정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의료전문지 메디게이트뉴스 기자와 고경화 국회의원 보좌관을 거쳐 현재 한나라당 이애주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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