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의사다 / 셔윈 B 눌랜드 지음 / 조현욱 옮김(세종서적 펴냄)


<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 <사람은 어떻게 나이 드는가> <닥터스 : 의학의 일대기> 등을 통하여 삶에 대한 의학적 통찰을 우리에게 전한 예일대학교 의과대학 셔윈 눌랜드교수님의 신작 <나는 의사다>를 소개합니다. 전작들과는 달리 <나는 의사다>에서는 그를 포함한 20명의 의사들이, 대부분 그가 존경하는 분들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예일대학에 근무하는 원로의사들일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 책은 삶을 통하여 가장 기억할만한 환자에 관한 에피소드를 소개하면서 해설자로 나선 저자가 ‘그 이후의 이야기’라는 형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가감없이 적고 있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자는 제프리 초서가 양해한다면 이런 구성을 ‘의학판 켄터베리 이야기’라고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 겸양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보는 것처럼 다수의 화자(話者)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 옴니버스 형식의 책으로는 14세기 지오바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과 제프리 초서의 <켄터베리 이야기>가 효시일 듯합니다. 평자들은 <데카메론>이 지극히 형식적이고 기계적이라고 한다면 <켄터베리 이야기>는 치밀한 예술적 장치를 가지고 이야기를 이어주는 특유의 내면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의학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이야기들로 구성이 되었으니 저자가 <켄터베리 이야기>에 비유한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나는 의사다>의 편집자는 ‘환자의 마음을 공유하는 의사들 이야기’라고 부제를 달았습니다만, 원제 ‘The Soul of Medicine; Tales from the bedside'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다만 제가 보기에도 남들에게 전하기 부끄러울 수 있는 의학적 오판에 관한 기억까지도 내놓고 있어 <나는 의사다>라는 번역서의 제목은 화자들과 해설자의 진심을 충분히 반영할 수 있겠다 싶습니다.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신경과, 신경외과, 마취과 등 다양한 임상의학자들의 기억에 남은 사건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전공한 병리의사의 고백(?)은 없어 다소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내과의사의 이야기에서 환자가 죽음에 이른 다음에도 원인이 밝혀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설명에서 병리의사의 곤혹스러운 경험을 간접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내가 참석했던 부검들 중에는 심지어 죽음이 그 비밀을 드러내기를 거부하는 사례도 여러 건 있었다. 사체의 장기, 조직, 체액에 대한 해부학의 면밀한 조사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는 가장 박식한 병리학자들이 그들의 동료 임상의들만큼이나 의혹에 가득한 얼굴을 한 채 연구실에서 나가는 것을 보았다.(186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내과의사는 환자의 신뢰를 얻는 것이 치료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병의 원인을 찾지 못하고 나날이 악화되어가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하여 환자의 병세에 관한 모든 정보를 공유하면서 쌓은 환자의 무한한 신뢰가 결국에는 극적인 병세의 반전을 불러 완치로 이끌었지만, 자신이 한 일은 없었다고 고백하는 내과의사의 이야기를 통하여 의사-환자 관계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이때 필요한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환자와 가족 뿐 아니라 간호사와 의료기술인력 그리고 환자를 돌보는 보조인력에 이르기까지 하나가 되는 동지애야 말로 “의학이 매일 통상적으로 이룩하는 승리의 원동력이 된다”고 강조하고 있는 그분이야말로 편집인이 책의 제목을 <나는 의사다>라고 정한 이유일 것이라 짐작하게 합니다.

외과의사 이야기도 배울 점이 많습니다. 첫 번째 외과의사는 자상에 의한 횡경막의 손상을 다루고 있습니다. 4년 전에 입은 자상을 세밀하게 치료하지 못한 탓에 생긴 횡경막 결손부위에 대장의 일부가 밀려들어가면서 생긴 흉부농양을 치료한 사례입니다만, 이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는 의무기록의 중요성과 최초의 사례는 의료계에 발표되지 않았지만, 누군가 이미 경험한 것일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뇌경막 이식수술을 받은 환자에서 발생한 의인성 크로이츠펠트-야콥병(iCJD)이 보고되는 과정에서 인간광우병이 발견되었다느니 하면서 떠들썩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환자가 CJD의 위험성이 있는 처치를 받았다는 병력 이외에는 iCJD를 진단하는 결정적인 기준이 없다는 점이 마음에 걸립니다. iCJD 발병 사례가 많지 않아 관련 기준을 정하는데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쿠루, 변종CJD 그리고 일부 iCJD 환자 등 2차성 CJD 환자의 뇌에서 꽃모양 플라크를 발견할 수 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꽃모양 플라크를 iCJD의 진단기준으로 고려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첫 번째 외과의사의 환자와 관련해서 특히 복부에 자상을 입은 환자의 경우, 상처의 깊이가 생각보다 깊을 수 있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의과대학에서 배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유명하다는 미국병원 응급실에서도 이를 놓치는 수련의가 있었구나 싶습니다. 의료현장에서 기본의 중요성을 다시 깨닫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대학 의무실에서 만난 젊은이의 증상을 보고 비장출혈을 진단하고 응급수술을 통하여 생명을 구했다는 두 번째 외과의사의 이야기에서는 지나치게 검사와 데이터에 의존하는 최근의 의료현장의 분위기에 대한 경종을 읽었습니다.

수련시절 동맥관 열림증(patent ductus arteriosus)의 수술을 참관하는 과정에서 전율(thrill)을 느껴보기 위하여 맨손으로 노출된 동맥관을 움켜쥐었다는 흉부외과 분야의 대가의 회고는 황당하기만 한데, 특히 사회적 통념상 비난받아 마땅한 그의 행적에 대하여 저자 역시 따끔한 일침을 놓고 있는 점에서 저자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지킬 수 있게 됩니다.

기관지경수술의 대가가 세기관지에 들어간 이물질을 꺼내는 시술을 하는 과정에서 마지막순간 집중력을 잃는 바람에 결국 어린환자가 개흉술을 받게 되었다는 자신의 치명적 실수에 대하여 “이제 보투군. 이런 짓을 하지 않는 법을 알았겠지! 아마도 이제는 말이야. 빌어먹을. 수술은 정말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라는 것을 우리 한 명 한 명이 기억하게 되었을 거야(182쪽)”라고 자신을 준열하게 꾸짖는 모습에서 대가 역시 오만하면 실수할 수 있다는 점을 새기게 합니다.

의료과오의 범위에 대한 성찰은 ‘환자에 대한 죄의식’이라는 제목으로 된 마취과의사의 고백입니다. 평소 양극성 장애를 약물로 관리해오던 외과의사가 수술장에 들어와 평소와는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을 바로 통제하지 않음으로써 환자에게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심각한 위해를 입힌 상황의 현장에서 환자의 생명장치를 관리하고 있는 마취과의사로서 심각한 죄의식을 느낀다는 고백은 “해를 끼치지 말지어다(primum non nocere)”라는 라틴어 경구로 남은 히포크라테스 시대의 치유자의 의무 “도움을 주는 것, 즉 적어도 해를 끼치지 않는 것”는 이 시대의 의료인에게도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최근에는 유방암 치료에서 상당한 진전이 이루어져 5년 생존율이 놀라울 만큼 개선되었는데 궁극적으로는 치료법의 발전이 가장 큰 기여를 했지만, 1974년 미국 대통령 영부인 베티 포드여사와 부통령의 아내 해피 록펠러가 유방암을 진단받고 유방절제술을 받았다는 사실을 공표한 것이 계기가 되어 유방암을 조기에 발견하기 위한 정기검진의 필요성이 여성들의 수치심을 몰아내게 되었던 것도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도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환자의 수치심과 관련하여 최근에 우리나라에서도 여성환자가 심지어는 수련의의 진료현장 참여를 거부하는 사태에 이어 환자의 동의를 얻어야 진료현장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법개정으로 이어지는 사회적 분위기를 우려하면서 의료선진국인 미국에서도 수련의는 물론 의과대학생들이 환자진료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내원하는 모든 여성은 골반 내진을 받아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는데, 이 검사는 보조 레지던트의 감독 하에 의대 재학생이 시행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렇게 하는 목적은 두 가지였다. 우선은 검사하고 기록하도록 하는 것이고, 다음은 레지던트가 학생의 어깨 너머로 환자를 보면서 일종의 선생 역할을 맡아 검진이 제대로 되는지 확인하면서 학생이 학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34쪽)”는 저자의 기록을 새길 필요가 있겠습니다.

의학은 교과서만으로 전수할 수 없는 영역이 아주 많은 학문입니다. 즉 선배의사의 경험을 보고 배우는 것이 많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의학교육이 이루어지는 병원에 입원하는 환자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의학교육의 현장에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이에 동의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고 싶은 환자는 전문의료진 만으로 구성된 개인병원을 찾아 프라이버시를 지키는 특별한 진료를 받도록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보편적 진료를 모든 환자들이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의료환경조성을 추구하는 우리사회의 분위기가 몰아가고 있는 이상한 사회현상이 아닐 수 없으며, 이런 풍조에서는 우리나라의 의료수준의 퇴보가 불가피할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입니다.정리를 해보면, <나는 의사다>에서 우리는 쉽게 풀어놓을 수 없는 자신의 뼈아픈 의료과오의 기억으로부터 다른 의료인들과 공유함으로써 의학발전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 보이는 다양한 에피소드에 저자 나름대로의 가치중립적인 코멘트를 읽을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의사로서 정체성을 세우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환자의 아픔까지도 품을 수 있었던 선배의사에게서 진정한 의사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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