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유석(단국대의대 의료윤리학교실)

■ 지난달의 딜레마 사례 - 자궁암 수술하려면 낙태해야 하는 산모

건강검진 결과를 보러 온 30대 초반의 아주머님 얼굴색이 흑빛으로 변했다. 검진결과 성병인 매독반응에 양성이 나왔다는 말을 전하고 나서다.

다소 진정이 된 다음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결혼 전에 사귀던 남자가 있었다고 한다. 물론 현 남편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성적 파트너인 남편에게도 전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반드시 검사를 해 봐야 하는데, 아주머니는 제발 남편에게 알리지 말아 달라고 통사정을 한다.

환자의 비밀을 지키는 의무는 오래된 의사들의 기본 윤리인데, 이 경우 부인의 부탁대로 침묵을 지켜야 하는 것일까? 

■ 이렇게 생각합니다!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것도 있는 것이니만큼 이러한 경우라면 부인의 사정을 들어줘야 한다고 봅니다. 아무리 배우자 사이일지라도 누구나 감추고 싶은 비밀은 있기 마련이니까요. 문제는 이 경우 부인의 비밀을 지켜준다면 남편의 건강이 위험할 수 있다는 점이겠네요. 제 생각에 남편의 감염여부를 알기 위해서는 부인과 미리 입을 맞추고 다른 검사를 하는 것처럼 하면서 매독검사를 할수도 있을 겁니다. 만일 남편도 감염이 되었다면 역시 다른 약이라고 하면서 매독 치료를 할 수도 있을거구요. 다소 무리해 보이는 방법이지만, 현재 별 문제가 없는 부부관계가 과거의 잘못 때문에 위기에 빠지는 것은 막아야 하지 않을까요?  (춘천에서 사업하는 J씨)

만일 부인의 비밀을 지켜주는 것이 남편에게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 것이라면 굳이 부인의 매독 양성 결과를 남편에게 이야기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환자가 원하는데도 불구하고 함부로 환자의 비밀을 누설하는 의사는 분명 문제가 있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그런데 남편도 검사를 해 봐야 하는 상황이라면 상황이 좀 복잡해지네요. 혹시, 불결한 대중탕 같은 곳에서 감염된 것 같다고 설명(정말 가능한지는 잘 모르지만요..)하면서 부인의 곤란함도 면해주고 남편도 검사를 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이 경우에도 부인이 의심을 받기는 하겠지만 그나마 가능한 방법이 아닐까 싶네요. (관악구 신림동 주부 K씨)

■ 긴 고민, 간략한 조언

‘나는 직업상 또는 개인적으로 내가 보거나 들은 환자의 비밀을 유지하며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은 고대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나오는 의사들이 지켜야할 기본 약속중 하나입니다.  전통적으로 의사들은 이 명령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왔습니다.

의사들은 정확한 병의 진단과 치료를 위한 정보수집 과정에서 매우 사적인 환자 혹은 환자 가족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됩니다. 술자리 같은 곳에서 환자의 개인 사생활을 심심풀이로 떠벌이는 행위는 명백히 비윤리적 것이고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만일 어떤 의사가 이러한 개인적인 정보를 함부로 누설한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어떤 환자도 그 의사에게 자신의 문제를 솔직히 털어놓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환자의 비밀지키기’가 어떤 상황에서도 반드시 지켜야하는 절대적인 규범이라고 보아야 할까요?  예를 들어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살인자 신창원 같은 사람이 경찰과 격투를 벌이다가 상처를 입고 쫓기던 중 시골 병원을 찾아들었다고 가정해봅시다.

이러한 경우는 기회를 봐서 경찰에 신고를 하는 것이 윤리적 문제를 넘어서 법적인 의무가 됩니다. 왜냐하면, 제 삼, 제 사의 무고한 희생자가 생기는 것은 막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무리 살인자라 할지라도 위급한 상처를 치료해주는 것은 의사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같은 원리를 적용하면, 위 사례의 부인의 사정이 아무리 딱하더라도 무고한 남편의 희생을 막기 위해서는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원칙대로 한다면, 부인의 비밀을 폭로하는 것이 비윤리적인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상황은 이 보다는 훨씬 복잡합니다.

제가 강조하는 바는 개별 사례를 다룰 때는 ‘이것 아니면 저것’ 식의 이분법적 접근보다는 가능한 여러 경우의 수를 고려하는 것이 지혜롭다는 것입니다. 매독 양성 반응이라고 하여 모두 전염력이 같은 것은 아니고, 때로는 실제로는 병이 없는데 검사에서만 양성 반응이 나오는 위양성(false positive)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따라서 부인에 대한 정밀 검사를 실시하여 만일 위양성이 의심되거나, 실제 감염이 되었더라도 전염력이 없는 것으로 나온다면, 의외로 쉽게 해결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정밀검사에서 전염력이 있는 진짜 매독이 확인되었다면, 남편에 대한 전염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 되므로 남편에 대한 혈액검사와 그 결과에 따른 적절한 치료가 필수적입니다.

이때 독자분들이 제안하신 것처럼 또 다른 거짓정보로 남편에 대한 진단과 치료를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면 의사도 함께 어려움에 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렵더라도 부인과 의논해 남편에게 솔직하게 과거를 털어 놓고 용서를 구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 이달의 딜레마 사례 - 종교적인 이유로 수혈 거부하는 환자

교통사고로 의식을 잃은 채 응급실로 실려 온 40대 남성 K씨를 검사해보니 신장과 비장이 파열돼 뱃속에 피가 잔뜩 고여 있었다.

즉시 수혈과 응급 수술을 하지 않으면 자칫 생명이 위급하여 수술 준비를 하는데, 환자의 주머니에서 ‘응급상황에 절대 수혈 불가’라는 문구가 적힌 카드가 발견됐다.

환자는 종교적인 이유로 수혈을 죄악시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고자 이런 자필 서명의 카드를 가지고 다니는 것이었다.

아직 보호자는 연락이 되지 않고 환자의 혈압은 시시각각 떨어지고 있는데, 담당 의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무엇일까? <* '딜레마 사례'에 대한 여러분의 소중한 견해를 e메일( drloved@hanmail.net )로 보내주시면, 다음 호에 간략한 해설과 함께 소개해 드립니다.> 

정유석은?

1990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학사1993년 가정의학과 전문의2001년 충남대학교 의과대학 박사2011년 전공의를 위한 임상의료윤리 저술2011년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의료윤리학교실 주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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