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와 괴짜들의 일본 과학사 / 고토 히데키 지음 / 허태성 옮김 / 부키 펴냄, 2016년

[라포르시안] 2016년 노벨상 수상자가 모두 결정되었습니다. 금년에 선정된 수상자 가운데 문학상부문의 밥 딜런이 단연코 화제의 중심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른 부문 수상자에 대한 관심이 덜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만, 요시미 요시노리가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것에 관심이 가는 것 같습니다. 일본은 1949년 유카와 히데키가 처음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이래 금년까지 22명이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최근 10년 동안 2007년, 2009년 그리고 2011년, 2013년을 제외하고는 매년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고 있습니다. 2014년과 2015년에는 두 명의 수상자를, 심지어 2008년에는 네 명의 수상자를 배출하기도 했습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했던가요?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받은 노벨 평화상 말고는, 특히 학문적 영역에서의 노벨상 수상자를 내지 못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과연 노벨상을 받을 수는 있는 것인지 자조 섞인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서구식 학문이 이 땅에 들어온 것이 불과 70년이고, 초창기 어수선한 마당에 전쟁까지 치르면서 먹고 사는 문제해결이 급선무였던 수십년을 빼고 나면 학문다운 학문을 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할 수 있으니 우리나라 사정을 일본과 바로 비교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대체적으로 노벨상 수상자의 연구업적을 보면 평생을 바쳐 연구한 끝에 얻은 것들임을 본다면 말입니다.

제 생각에는 일본이 받는데 우리나라가 못 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틀린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의 사정이 비교가능하지 않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노벨상 수상자 가운데 교토 대학 출신이 6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토대학은 노벨상을 많이 받는데 도쿄 대학은 그렇지 못한 사연을 비교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사회적 여건이 같은데도 수상자를 내지 못하는 것은 문화적 혹은 개인적 차이에 기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재와 괴짜들의 일본 과학사>는 그런 궁금증을 시원하게 풀어낼 수 있는 책읽기가 될 것입니다. 신경생리학을 전공한 저자인 고토 히데키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과학부문의 노벨상을 받은 유카와 히데키를 동경해 물리학자를 꿈꾸며 물리학과 원자핵공학을 연구하였습니다. 그러다 중도에 의학으로 방향을 바꾸어 신경생리학을 연구해온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자는 일본의 과학연구 수준이 서구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을 잘 정리해냈습니다. 먼저 일본과학의 여명기를 소개하고, 이어서 일본과학 발전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그리고 패전 후의 일본과학계의 동향을 소개합니다. 4장에서는 저자의 전공분야에 해당하는 의학에서의 연구동향을 그리고 5장에서는 일본사람들이 노벨상과 인연이 깊은 이유를 정리하였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책에는 집필 동기나 책의 얼개를 설명하는 서론이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옮긴이의 말을 앞에 두었습니다. 옮긴이는 “언젠가 노벨상을 꼭 받고 말겠다고 결심했던 젊은 날의 유카와처럼 이 책을 읽은 독자 가운데도 노벨상 수상을 목표로 하는 야심 찬 젊은이들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8쪽)”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어쩌면 이 책의 기획방향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는 국가행정과 과학의 관계에서의 문제점을 과감하게 지적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즉, ‘원자력 발전의 진행 여부, 구체적인 진행 방안에서 기술과 행정의 문제, 그밖에 연구에 대한 과학자들의 사회적 책임 등 우리의 현실과 매우 밀접한 많은 문제를 제기’한다고 했습니다.

저자의 설명이 때로는 변명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때로는 지나치게 소극적인 면이 있어 읽기에 거북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특히 20세기 중반 동아시아의 세력판도를 요동치게 만든 결정적 요인을 지나치게 일본적 시각으로 해석한 듯한 부분도 있습니다. 조금 길다 싶습니다만, 이런 대목입니다. “개국에 즈음해 일본은 서양의 기술과 학문을 배우고 스스로의 인프라를 갖추고자 혼신을 다했다. 그러한 태도는 중국이나 조선 등 여타 동아시아 국가와는 대조적이었다. 중국의 서태후는 독일의 업자로부터 뇌물을 받고 전력 배선을 맡겼다. 조선에서도 여자 군주를 칭한 정순왕후 김씨가 일족의 이익을 중시해 전대의 개혁 노선을 말살하여 나라를 정체시켰다. 일본은 얼마 되지 않는 외화를 쏟아 부으며 목숨을 걸고 서양에서 배우고자 하였다.(25쪽)” 그와는 달리, 동아시아로 몰려온 유럽제국들이 청나라는 물론 동남아시아 지역을 유린하는 모습을 보면서 일본은 반드시 독립을 지켜야 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동아시아 3국은 지정학적 위치에 따라 처한 상황이 달랐습니다. 중국은 서구세력의 목표가 되었던 것이고, 조선은 서구 세력의 관심권의 밖에 있었으며, 일본은 목표가 되는 중국을 향하는 길에 숨을 돌리기에 맞춤한 곳이었던 것입니다. 동남아시아처럼 자원이 풍부하지도 않아 식민지배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중국은 서구의 실체를 여전히 별 것 아닌 것으로 믿고 있었으며, 일본은 외세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고, 조선은 중국과 일본의 시각이 섞였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이 아시아를 집어삼키던 시기를 지나서 네덜란드가 동아시아항로를 이어받던 시기였다는 점에서 일본이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외국인들의 본토상륙을 제한했던 막부였지만 서구문명에 대한 호기심을 가졌던 것도 한몫했습니다. 지금까지 중국이나 조선에서 받아들이던 문명과는 차별화된 서구문물이 대륙진출을 꿈꾸어 온 그들의 야심을 채워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을 것입니다.

1866년 사쓰마 번의 사이고 다카모리와 조슈 번의 기도 다카요시가 삿초 동맹을 맺어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고 천황을 중심으로 지배구조가 성립하였습니다. 1867년 1월 9일 메이지 천황이 즉위한 뒤에 들어선 메이지 정부는 구미 열강 국을 따라 잡기 위한 사회개혁을 모색하였습니다. 개혁의 목표를 부국강병에 두고 유럽과 미국의 근대 국가를 모델로 자본주의 육성과 군사적 강화를 천황을 중심으로 추진했던 것입니다. 1872년 외무대신 이와쿠라 도모미의 견구사절단이 유럽으로 떠났는데, 도쿠가와 막부시절 서구 열강과 맺은 불평등조약을 개선하고, 서구의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기 위한 초석을 다지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었습니다. 메이지정부는 다양한 분야에서 우수한 인재들을 선발하여 서구로 유학을 보냈고, 그들은 서구사회에서 인정을 받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예를 들어 코흐연구소에 갔던 세균학자 기타사토 시바사부로는 연구소의 난제였던 파상풍균의 배양에 성공하였을 뿐 아니라 항독소를 제조하는데 성공하여 파상풍치료에 중요한 진전을 이루었고, 그 업적으로 제1회 노벨 의학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당시 유럽과학계의 분위기 때문에 베링이 수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1910년대 초기 일본 이화학연구소 전경.

일본 과학계가 두드러진 연구성과를 내기 시작하면서 국가로부터 독립된 민간연구소의 설립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고, 1913년 초에는 재계가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민간연구소 설립이 힘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민간이 추진하면서도 상업화와는 무관한 순수과학에 집중하는 연구소를 만든다는 것이 과연 가능했을까 싶습니다. 그 무렵 터진 러일전쟁에서 일본은 정보전, 공학, 외교전, 전비 조달, 군진의학 등 다방면에서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한 끝에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일본은 러일전쟁을 통하여 기술력에 따라 전쟁이 좌우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정부가 다양한 영역에서 과학에 투자를 한 것은 궁극적으로 대륙을 목표로 하였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주축국의 일원이 되어 아시아 각 지역에서 전투를 벌였고, 종국에는 하와이를 침공하여 미국을 아시아지역의 전장에 끌어들였습니다. 일본이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핵물리학자 니시나 요시오는 “바보스러운 전쟁을 시작했군. 미국의 진정한 힘을 모르니 이런 짓을 하는 거지. 곧 큰일이 날거야”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일본의 과학자, 의사들은 전쟁을 치르는데 필요한 과학적 뒷받침에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일본 육군은 그때로서는 상상도 못할 규모의 세균전을 기획하였는데, 연구책임을 교토대학 출신의 이시이 시로가 맡았습니다. 바로 유명한 731부대입니다. 이 부대는 페스트, 콜레라, 파상풍, 이질, 티푸스 등 약 20종의 세균은 물론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독극물에 대한 실험도 진행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731부대가 800명의 희생시켜 실험을 진행했다고 적었지만, 위키백과의 731부대 항목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한국, 중국, 몽골, 러시아의 군인과 시민, 여자와 어린이를 포함한 약 1만 명의 사람들이 생화학 병기의 실험 재료로서 살해되었으며, 731부대에서 개발된 생화학 무기로 인해 수십만 명의 중국인이 학살되었다.’라고 되어있습니다.

731부대에 대한 기록이 불충분한 이유는 전후 일본정부가 미군측과 비밀협상을 통하여 실험에서 얻은 자료들을 미국에 넘겨주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나아가 러시아에는 넘겨주지 않는 대가로 관련자들의 처벌까지 면제받았다고 하니 아우슈비츠의 전범재판과는 처리과정에서 너무나도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일본은 사람을 대상으로 인체실험을 주도한 책임에 대한 구체적인 잘못은 인식하지 않고 그 비밀을 묻은 미국에 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호도하고 있습니다. 독일이 전후에 보여준 끊임없는 자기반성과 성찰에 대하여, “일본의 맹우 독일은 전쟁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를 완전히 부정했다. 독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존재이유를 잃고 말았다. 반세기가 지나도 바닥 모를 상실감에 괴로워했다.(140쪽)”라고 적은 것을 보면, 같은 사안에 대한 저자의 편향적 시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원자물리학 분야의 연구에서도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미국이 독주하듯 만든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에 투하하여 종전을 앞당긴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원자폭탄제조는 미국만이 아니라 독일도 은밀하게 추진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진 것입니다. ‘전쟁이 격렬해지면서 원자폭탄을 빨리 완성하라는 군부의 압박이 심해졌다’라고 적고 있는 것을 보면 일본의 핵물리학자들 역시 전쟁 중에 원자폭탄 제조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국력이 달려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도 해군은 반년 안에 원폭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는데, 과학계는 이미 지난 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답변했다는 것입니다.

러일전쟁에서 보았던 것처럼 일본은 전쟁과 관련된 기술개발에 상당한 투자를 해왔던 것입니다. 원천기술을 일찍 확보한 경우도 있는데 이를 사용가능한 수준으로 향상시키지 못한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일본의 GDP는 놀랍게도 세계 6위의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일찍 수용한 서구문물을 바탕으로 조선을 비롯한 주변국가들을 식민지배하면서 부를 쌓아올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게 쌓은 부를 좋은 일에 사용하지 못하고 이웃을 괴롭히는 일에 사용하였으니 결과가 좋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한편으로 저자는 패전 후 일본은 보유한 군사기술을 조선, 여객기, 신칸센 등 평화산업으로 전환하여 세계 2위의 국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자부심의 한 자락을 내비쳤습니다만, 동아시아에서 일본이 지배적 위치를 차지한 기간이란 것도 장구한 역사의 한 토막에 불과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아! 옛날이여!’라고 할 날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2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다나카 고이치처럼 일본화학회에서조차도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인물이 있다는 점이 일본 과학계의 힘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묵묵히 자신에 세운 학문적 목표를 향하여 매진하다 보면 언젠가는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성과를 재촉하지 말고 과학자들이 자신의 학문에 매진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것이 필요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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