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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이야기 - 제8화] 첫 번째 알츠하이머병 환자 아우구스테 데테르양현덕(하버드신경과의원 원장, Brainwise 대표이사)

[라포르시안] 의사 알츠하이머의 이름은 병명(알츠하이머병)에 담겨 널리 알려졌지만, 첫 번째 환자사례를 학계에 보고하기 전까지 그는 신경매독 및 혈관성 치매 연구에 집중하고 있었다.

알츠하이머병이 현대 의학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크기에 이 장에서는 ‘알츠하이머병’이라는 명명의 기원과 추후 연구의 전개과정을 자세히 풀어보려 한다.

알로이스 알츠하이머(Alois Alzheimer, 1864~1915)= 알로이스 알츠하이머는 1864년 6월 14일 남부 독일 바이에른(Bavarian)의 소도시 마르크트브라이트(Marktbreight)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공증인 사무실에서 일했는데, 알츠하이머가 태어나기 2년 전에 첫 부인이 아들 하나만 남긴 채 산욕열로 사망했다. 얼마 뒤 아들의 이모와 재혼해서 여섯 자녀를 두었는데, 알츠하이머는 그 중 첫째였다. 부모는 자녀들을 위해 알츠하이머가 어렸을 때 교육여건이 더 나은 곳으로 이사했다. 특히 알츠하이머는 과학에 재능이 돋보였으며, 베를린(Berlin), 튀빙겐(Tübingen), 뷔르츠부르크(Würzburg) 대학 등에서 의학을 수련했다.

그는 현미경을 통한 미세조직 관찰과 해부학에 열의가 있었으며, 1887년 뷔르츠부르크 의과대학을 우등생으로 졸업했다.

흥미롭게도 알츠하이머는 의과대학 재학시절 정신과에는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1888년 다소 우연한 기회에 어느 부유한 집에서 정신질환을 앓고 있던 여성환자를 돌보며 5개월 동안 독일 각지를 다녀온 후, 프랑크푸르트 정신병원에서 수련의로 근무를 시작했다. 그곳에서는 정신과와 신경병리학 연구를 병행했다.

한 해 뒤인 1889년 정신과 의사이자 신경병리학자였던 프란츠 니슬(Franz Nissl, 1860~1919)이 알츠하이머의 연구팀에 합류했다. 그는 신경세포 염색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그의 염색법은 현재까지도 활용되고 있다. 둘은 수년 동안 친구처럼 지내면서 함께 연구했으며, 니슬의 염색법은 알츠하이머의 뇌세포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훗날 알츠하이머는 니슬의 도움이 없었다면 자신의 연구가 불가능했으리라고 인정하기까지 했다. 1895년 니슬은 스승인 에밀 크레펠린과 함께 일하기 위해 하이델베르크로 자리를 옮겼다. 1904년 스승이 뮌헨으로 떠나자 니슬은 자리를 넘겨받았다. 그 사이에 알츠하이머는 더 이상 친구와 더불어 연구할 수 없게 된 현실을 안타까워했고, 친구 니슬 역시 그랬다.

알츠하이머는 1894년 부유한 은행가의 미망인 세실리아(Ceacilia Geisenheimer)와 결혼해서 세 자녀를 두었다. 풍족한 아내 덕분에 그는 경제적 어려움 없이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7년 후 세실리아는 막내를 분만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갑자기 사망했다. 알츠하이머의 여동생 엘리자베스가 조카들을 키워주기 위해 프랑크푸르트로 왔다. 알츠하이머는 사별의 슬픔을 잊기 위해 진료와 연구에 더욱 몰두했다. 새로 입원하는 모든 환자들을 자진해서 담당하면서도 보다 상세하고 방대한 기록을 남겼다. 

그러던 중 1901년 11월 25일 프랑크푸르트 정신병원에서 아우구스테 데테르라는 51세의 여성환자를 만나게 된다. 그 환자는 알츠하이머의 조부 요한 알츠하이머(Johann Alzheimer)가 카셀에서 가르쳤던 학생이었다. 그녀는 단기 기억장애, 지남력 장애, 언어장애 외에도 여러 가지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알츠하이머는 이후 수년 간 그녀의 증상을 면밀히 연구했다.

이듬해 여름, 하이델베르크로 옮겨간 친구 니슬의 스승인 크레펠린이 알츠하이머에게 공동연구를 제안했고, 알츠하이머는 곧 하이델베르크로 자리를 옮겼다. 거기에서 니슬을 다시 만났지만, 일년 뒤 크레펠린을 따라 뮌헨 의과대학부속 정신병원으로 근무지를 다시 옮겼다.

그가 하이델베르크를 떠난 지 4년 만에 환자는 사망했고, 서약한 대로 아우구스테의 진료기록과 뇌는 뮌헨으로 보내졌다. 첫 번째 알츠하이머병 환자가 탄생한 것이다.

우선, 진료기록과 증상 간의 연관성을 찾고자 뇌 조직검사를 시행했다. 환자의 뇌는 대뇌피질이 전반적으로 얇아져 있었고 기억, 언어, 판단, 사고를 담당하는 부분이 심하게 손상되어 있었다. 신경원에 노인반이 형성되고, 신경섬유에서는 농축체가 발견되었다. 노인반은 대개 70대 환자들에서 볼 수 있었던 증상이었고, 신경섬유 농축체는  처음으로 발견된 것이었다. 그녀의 나이를 고려하면 두 가지 모두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었다.

요즘이라면 조기발병 알츠하이머 치매로 진단될 환자였다. 알츠하이머 치매는 65세 전에는 잘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조기발병 알츠하이머 치매는 전체 알츠하이머병의 10%를 넘기 어렵다.

1906년 11월 3일 크레펠린의 제안에 따라 알츠하이머는 의학 역사에 길이 남을 중대발표를 한다. 대뇌피질에서 발생한 낯선 이상증세를 보고한 것이다. 그는 튀빙겐(Tübingen)에서 개최된 제37차 남서독일 정신과 학술대회에서 아우구스테 D(Auguste D)라는 51세 여성환자의 증상과 뇌 조직검사 결과에 대하여 발표했다.

환자의 증상은 진행성 인지장애, 국소 신경학적 증상, 환각, 망상, 그리고 심리사회적 무능력 상태를 포괄하는 것이었다. 뇌 조직검사에서는 노인반, 신경섬유농축체, 그리고 동맥경화성 변화가 한꺼번에 관찰되었다. 하지만 그 발표가 처음부터 학계의 관심을 끈 것은 아니었다.

그는 내용을 더욱 보강하여 일년 후 학술지에 연구논문을 게재했다. 그 후 1910년 발간된 크레펠린의 책에서 그 증상은 알츠하이머병(Alzheimer disease)으로 명명되기에 이른다.

알츠하이머가 뮌헨대학교(Ludwig Maximilian University in Munich)에서 정신과와 신경해부학을 가르치고 있었을 때, 프로이센 황제 빌헬름 2세가 그를 브레슬라우 대학교(Friedrich-Wilhelm University in Breslau, 현재의 폴란드) 정교수로 초빙했다.

알츠하이머는 새 임지로 향하던 열차 안에서 병을 얻었는데, 그곳에 부임하여 3년간 더 연구하다 결국 심내막염에 의한 심부전과 신부전으로 인해 1915년 12월 19일 5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유해는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와 아내 곁에 묻혔다.

알츠하이머는 당시 그저 해부학자일 뿐이라고 홀대 받았지만, 현재는 근대 신경병리학에 지대한 공적을 남긴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의 업적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은 해부학적 병변을 임상증상과 연계해서 탐구했다는 점이다. 당시는 그런 안목과 관점으로 뇌 현상을 바라보고 접근하기란 상상조차 힘든 시절이었다.

그가 작성한 아우구스테의 진료기록과 면담내용은 1909년 이후에 사라졌다가 87년이 지나서야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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