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승식(인하대학교 의과대학 사회의학교실 교수)

[라포르시안]  십수 년 전 봄이었다. 인턴 근무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지방 병원에 파견을 나왔다. 지방 병원에서 인턴의 주 업무는 응급실 환자 초진이다. 낮 시간에는 전문의 외래도 열리므로 대개 한가하고 저녁에 분주하고 야간에 어쩌다 응급 환자가 오면 겨우 대처하기 바쁘다. 그렇게 보내던 어느 한가한 봄날 오전이었다. 경찰차와 구급차가 함께 도착해 온몸에 진흙이 묻은 환자 한 명을 응급실 침상 위에 올려두었다. 함께 온 경찰관에 따르면 신고받고 논두렁에서 환자를 발견했을 때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고 했다. 사체를 살펴본 후 사망 선고를 하고 관행대로 시체검안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시체검안서 서식은 사망진단서와 동일하다. 환자가 최종 진료 48시간 이내에 사망하거나, 예측할 수 있는 질병으로 사망한 경우가 아니었으므로 시체검안서를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사망의 종류 칸에 내려와 고민이 시작됐다. 요즘 같으면 스마트폰으로 현장을 찍은 사진을 보고 ②외인사 ㉮교통사고로 기재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겠지만 당시만 해도 디지털카메라가 막 보급되던 때라 경찰관 말만 듣고 기재한다는 사실이 꺼림칙했다. 고심하다 의과대학에서 배운 대로 ③기타 및 불상에 기재했다.

사망의 원인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경찰관의 사고 현장 설명과 사체 상태를 고려하면 비 오는 날 자전거를 타고 가다 미끄러져 논두렁 바닥에 부딪혀 머리와 목에 외상을 입고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정확한 원인 확인을 위해서는 두경부 CT를 찍어야겠지만 뒤늦게 응급실에 달려온 유족도 원하지 않아 말 그대로 검안만으로 원인을 기재해야 되는 상황이었다. 한참을 고심하다 ㈎직접사인: 외상성 뇌출혈(추정), ㈏중간선행사인: 교통사고라고 기재해 유족과 경찰관에게 보여줬다.

시체검안서 내용을 살펴보던 경찰관이 갑자기 사색이 됐다. 사망의 종류가 ③기타 및 불상으로 기재되면 변사로 처리되어 담당 검사에 보고해야 하고 부검을 피할 수 없다고 했다. 검안서를 작성한 나는 경찰관의 진술만으로 확정할 수 없다고 잠시 맞서다 유족도 부검에 동의하지 않아 ②외인사 ㉮교통사고로 수정했다. 문제는 사망의 원인이었다. 경찰관이 사망원인에 교통사고는 처음 본다며 삭제를 요구했다. 사망진단서 작성 교육을 받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던 때라 사망진단서 작성의 최종 목적이 국가 사망원인통계 작성이며 외인사의 경우 구체적인 원인 행위를 기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발끈했더니 그제야 요구를 거둬들였다.

고 백남기 씨의 사망 종류를 외인사가 아닌 병사로 기재한 사망진단서가 공개되자 많은 논란이 일었고, 사망진단서 작성 원칙에 맞지 않는다며 서울의대 재학생과 졸업생의 비판 성명서가 발표되기도 했다. 서창석 서울대병원장은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모든 사망진단서는 객관적인 주치의 판단 아래 작성되는 것이 원칙이며, 이번 백 씨 사망진단서 역시 담당 주치의의 철학이 들어가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관련 기사 바로 가기) 한편 사망진단서 작성 지침을 감수한 이윤성 서울의대 교수(법의학)는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진단서는 환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도구지만 다른 한편은 그로 인하여 불이익을 보는 사람이나 집단이 있을 수 있다"며 "당연히 진단서는 공정하고 근거를 갖춰야 한다"고 조언했다.(관련 기사 바로 가기)

전공이 예방의학이라 십 년 넘게 장롱면허인 관계로 직접 발부한 사망진단서는 채 몇 장이 안 되지만 매년 의과대학생을 대상으로 사망진단서 작성을 교육하고 있는 관계로 뒤늦게 의견을 남긴다. 지난 2011년 고 김근태 의장이 뇌정맥혈전증으로 사망했을 때 사망진단서에 선행사인으로 '고문(Z65.4: 고문 피해자)'을 기재해야 마땅하지 않냐고 한탄한 적이 있다. 고 백남기 씨 사망원인 논란이 아무리 증폭돼도 국가폭력에 의한 희생자라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사망진단서의 철학이 언급되는 시대는 퇴행의 시대다. 서울의대 재학생 성명서 본문에 “전문가란 오류를 범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오류를 범했을 때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대목이 있다. 권력의 총애와 전문가 권위를 맞바꾸는 전문가는 최악의 전문가다.


[알립니다] 이 글은 황승식 교수가 개인 페이스북 계정에 올린 글입니다. 본지는 황 교수로부터 사전에 양해를 구하고 글 전문을 전재합니다. 원문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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