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역의 종식 / 야마노우치 카즈야 지음 / 조정연과 천명선 옮김 / 한국학술정보 펴냄, 2016년

[라포르시안] 지난 해 중동에서 유입된 메르스 때문에 보건의료계가 큰 홍역을 치렀습니다. 감염병도 시대에 따라서 변하는 것 같습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감염병(感染病, infectious disease)은 세균, 스피로헤타, 리케차, 바이러스, 진균, 기생충과 같은 여러 병원체에 의해 감염되어 발병하는 질환을 말하고, 여러 사람에게 전파되는 감염병을 전염병(傳染病)이라고 합니다. 과거에는 빠르게 확산되는 전염병이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았습니다만,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전파되는 모든 감염병을 관리해야 한다는 취지로 보건복지부가 2015년에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면서 전염병이라는 용어가 감염병이라는 용어로 바뀌었습니다.

돌이켜보면 60년대만 해도 콜레라, 장티푸스 예방접종을 받고, 여름이 되면 이들 감염병 발생이 뉴스가 되곤 했습니다. 물론 홍역이나, 볼거리와 같은 바이러스 질환도 꾸준하게 발생하여 예방접종이 권장되었고, 결핵이나 성매개질환을 근절하려는 당국의 노력이 경주되어 왔습니다. 21세기를 넘어오면서는 생활환경의 개선으로 콜레라, 장티푸스와 같은 수인성질환은 드물어졌지만, 바이러스성 질환 특히 조류독감등 인수공통 감염질환에 대한 관심이 커졌습니다. 지난해 유행했던 메르스 역시 낙타에서 유래한 인수공통 감염질환입니다.

방역당국이 조류독감에 대하여 민감하게 대응하는 이유는 20세기 초에 대유행했던 스페인독감에 대한 공포 때문일 것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시작해서 종전 직후에 정점을 찍었던 스페인 독감은 인플루엔자 A형 바이러스의 변형인 H1N1 바이러스가 원인균입니다. 당시 세계인구가 약 16억명이었는데, 약 6억명이 감염되었고, 사망자는 최소 2,500만에서 최대 1억 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되었으니, 중세 유럽을 초토화시켰던 페스트에 버금가는 재난이었던 것입니다. 2005년에 들어서야 스페인독감은 조류독감에서 유래한 것으로 새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조류독감이 돼지 체내에서 사람의 독감과 섞여 변종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2008년에 우리 사회를 뒤흔들었던 광우병 역시 인수공통감염병으로 페스트에 버금가는 피해를 입히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감염체와 확산경로가 파악되면서 방역이 가능하였고, 특히 사람으로 전파되는 과정에 우려했던 것보다는 파급력이 크지 않았던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이런 사실은 2008년에 어느 정도는 밝혀져 있기도 했습니다. 당시에는 광우병이 인간에게 전파될 위험을 제로 수준에서 관리하라고 목청을 높이던 분들이 지난 해 메르스 사태에서는 어디로 갔는지 오리무중이었던 점도 묘한 일입니다.

이번 주 Book소리에서 <우역의 종식>을 고른 것은 인수공통질환이 사회적으로 주목받고 있다는 점과 천연두에 이어 두 번째로 박멸이 공식적으로 선언된 감염병이라는 점을 고려하였습니다. 우역 (Rinderpest, 牛疫)은 다행히도 사람에게는 감염을 일으키지 않지만 소들 사이에는 전파력이 강하고 폐사율이 70%에 달하는 치명적인 감염병입니다. 이름에 페스트라는 단어가 들어갈 정도로 피해가 심각했는데, 이 때문에 이 병의 정체가 헷갈리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우역의 감염체는 사람에서 유행하는 홍역, 볼거리, 파라인플루엔자 등을 일으키는 파라믹소 바이러스과에 속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1931년까지 주로 평안도와 함경도를 중심으로 유행하였다고 합니다.

‘근대 전염병 연구의 역사’라는 부제에도 불구하고 <우역의 종식>은 역사기록에 등장하는 우역의 존재를 살펴보았고, 가의 근간을 흔들기도 했던 이 질환이 근절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을 정리하였습니다. 이 책을 쓴 야마노우치 카즈야(山内一也)는 기타사토 연구소와 국립예방위생연구소, 도쿄 대학 의과학연구소 등을 거치면서 40년 넘게 우역바이러스 연구에 종사하였고, 지금은 도쿄대학 명예교수이기도 합니다. <우역의 종식>에서는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우역이라는 감염병의 존재, 우역이 근대 수의학이 성립하는데 미친 영향, 우역의 본질과 예방법이 개발된 경위, 일본에서의 우역대책(여기에는 우리나라에서의 우역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는데, 일제의 식민정책 가운데 우리나라를 일제의 우역방역의 실험무대로 이용한 정황이 있습니다.) 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역에 걸린 소는 처음에 열이 나다가 2,3일이 지나면 먹지 않고 호흡이 거칠어지면서 눈물, 콧물, 침 등 분비물이 많아집니다. 이어 구강점막이나 잇몸에 미란과 궤양이 생기고 설사가 심해집니다. 설사가 심해지면 탈수증에 빠지면서 6-12일 사이에 폐사에 이릅니다. 관찰한대로 기록했을 것으로 짐작은 하지만 사실 역사기록에 등장하는 감염병을 오늘날의 감염병과 견주는 일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이집트 카훈에서 기원전 2130년부터 1930년 사이에 쓰인 것으로 추측되는 파피루스에는 심한 장염 증상을 보인 수소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이 사례가 우역으로 추정된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장염을 일으키는 질병이 우역만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성만 열어놓고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가축은 무탈하고 이집트 백성의 가축만이 죽어나간 역병을 우역이라고 보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역바이러스에 눈이 달려서 이집트 소와 이스라엘 소를 구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며, 당시 우역바이러스의 예방법이 개발되어 있던 것도 아닐 테니 말입니다.

어떻든 우역으로 보이는 소의 감염병은 그리스, 로마 시절에도 꾸준하게 발생하였다는 기록을 검토하고 있고, 18세기에는 유럽 전역을 통하여 모두 2억 마리의 소가 우역으로 폐사하였다고 주장합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오늘날 지구상에 모두 14억 마리의 소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한다면 지나치게 부풀려진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나아가 서고트족이 보유하던 소들이 우역으로 폐사한 것 때문에 폭동이 일어났고, 진압에 실패한 것이 계기가 되어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열되었다는 해석도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프랑스 혁명에도 우역이 기여한 바가 있다는 해석도 지나친 아전인수 격이 아닌가 싶습니다. 13세기 유럽을 침공한 몽골군이 들여온 소가 가져온 우역 때문에 유럽 소들이 폐사하였다는 설명도 있습니다. 그레이 스텝 소라고 부르는 몽골의 소는 질병에 강한 저항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유럽국가들이 몽골의 소를 들여오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병리학을 전공해서인지 ‘우역이 병리해부학의 출발점이라고 볼 수도 있다(36쪽)’는 저자의 주장을 검증해보고 싶었습니다. 우선은 병리해부학이라고 뭉뚱그린 것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병리학이 해부학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별개의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해부학의 역사는 기원전 280년 무렵의 고대 알렉산드리아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당시 이룩한 성과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12세기 이탈리아에서 인체해부가 재개될 때까지는 암흑이었습니다. 결국 베살리우스(Andreas Vesalius·1514~1564년)의 명저 <인체 구조에 관하여>(De Humani Corporis Fabrica)가 최초의 현대적인 해부학 책이 될 때까지 해부학의 연구는 지지부진했습니다. 위대한 의학자 갈레노스를 맹신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도 돌보던 환자가 죽게 되면 사인이 궁금했던 의사들은 많았을 것입니다. 죽음의 원인을 밝히는 병리학은 이런 배경에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환자가 죽은 다음에 원인을 밝히기 위하여 해부를 시행하는 것을 부검이라고 합니다. 이 책의 저자는 이탈리아의 해부학교수 란치시는 동물의 질병과 사람의 질병을 비교하는데 관심이 많았는데, 가장 유명한 육안병리학자로 알려진 지오반니 모르가그니(Giovanni Morgagni; 1682-1771)가 란치시의 제자였기 때문에 우역이 병리학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한 것은 무리가 아닐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근대적 의미의 병리부검은 아라비아의 의사 아벤조아르(Avenzoar; 1091-1161)가 처음이었으며, 서양에서는 이탈리아 의사 안토니오 베니비에니(Antonio Benivienni; 1443-1502)가 죽음의 원인을 찾기 위하여 해부를 시행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우역때문에 현대병리학이 시작되었다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수의과대학이 개설되고 국제수의학회가 발족하고, 나아가 세계동물보건기수가 창립되는 데는 분명 우역이 기여한 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처럼 오랜 세월에 걸쳐 엄청난 피해를 준 우역의 원인체는 1902년 프랑스 파스퇴르연구소의 의사 모리스 니콜과 터키의 수의사 무스타파 아딜 베이에 의하여 발견되었습니다. 원인균이 발견되기 전부터 우역을 예방하는 방법이 연구되었습니다. 18세기 초 오스트리아의 요한 카놀드는 우역의 의학적 특징이 천연두와 닮았다고 했습니다. 제너가 종두법을 개발하기 전까지는 천연두 환자의 부스럼을 소량 흡입하는 인두접종법으로 천연두를 예방했던 것입니다. 1714년에 인두접종법을 완성한 사람은 콘스탄티노플의 의사 엠마누엘 티모니였습니다. 우역의 접종은 이보다도 앞선 1711년 이탈리아에서 우역이 발생하였을 때 라마니치가 제안했지만, 시행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기록상으로는 1745년 영국에서 성공적인 우역접종실험결과가 보고되었습니다. 하지만 18세기 무렵 만해도 우역의 접종이 오히려 병원체를 소떼에 확산시키는 부작용이 나타나는 등 효과적인 방법은 아니었습니다.

19세기 후반에 우역에서 회복한 소의 혈청을 가지고 우역을 치료하는 면역혈청법이 개발되었습니다. 우역바이러스를 불활화하여 백신으로 개발하는 실험이 1911년 일제가 부산에 설치한 우역혈청제작소에 근무하던 카키자키 치하루에 의하여 1917년 완성되었습니다. 부산의 혈청제작소는 뒤에 나카무라 준지가 약독화백신을 개발하는 등 우역예방에 크게 기여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일제는 왜 본토가 아니라 부산에 혈청제작소를 세웠을까요? 1924년 3월에 조선과 중국의 국경 부근에서 다수의 소에 불활화백신을 접종하였는데, 우연히 12월에 우역이 발생했던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백신을 접종한 소는 대부분 발병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답이 보일 것 같습니다.

키시 히로시에 따르면 중국에서는 6세기 전반에 저술된 서적에서 우역이 언급되기 시작했고, 조선에서는 1399년 간행된 저술에 우역이 기술되었고, 일본의 고서에는 1697년의 저술에 우역이 등장했다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우역이 조선으로부터 들어와 유행을 했던 것으로 파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저자는 조선에서 소와 피혁의 수입을 자제토록 한 적도 있지만, 밀수 등의 경로까지 막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 조선의 농가에서는 소가 중요한 재산이었기 때문에 중앙정부는 물론 지방정부에서도 소를 적극적으로 관리해왔다고 알고 있기에 다소 의문이 드는 대목입니다.

20세기 초반, 일본정부의 우역방역의 최대 과제는 조선에서 수입되는 소를 통하여 유입되는 우역을 막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우역방역의 제1선을 조선에 마련하고 한반도에서 우역을 박멸할 것과 중국에서 조선으로 우역이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국경의 방비를 철저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당시만 해도 유행병을 예방하기 위한 백신의 실험도 완벽하지 않아서 그로 인해서 유행병이 번질 수 있다는 것을 일본 수의학자는 물론 정부에서도 잘 알고 있었기에 일본 국내에서 백신제조실험을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조선을 시험장소로 삼았던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아프리카지역에서 우역의 발생이 이어져,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우역박멸작전이 전개되었습니다. 그 결과 2011년에 UN은 우역이 멸종했음을 선언하게 되었습니다. 우역은 천연두에 이어 두 번 째로 지구상에서 공식적으로 멸종된 바이러스성 전염병이 되었습니다.

조류독감, 메르스에 이어 지카바이러스까지 인수공통 감염병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습니다. 전염성이 강한 감염병은 방역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역의 종식>을 통하여 감염병 관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저작권자 © 라포르시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