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포르시안] 현재 국내 보건의료 정책을 책임지는 보건복지부와 산하 기관장이 모두 의사 출신이다. 정진엽 복지부 장관을 비롯해 성상철 건강보험공단 이사장, 손명세 건강보험심사평가원장, 정기석 질병관리본부장 등이 그렇다. 역대 어느 정권에서도 이렇게 의사 출신이 보건의료정책 주무부처와 주요 기관장을 동시에 맡은 전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정부의 보건의료정책은 그 방향성 측면에서 역대 최악이고, 정책의 내용 면에서도 보건의료의 본질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보건의료정책의 암흑기'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듯 싶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의사는 보건의료 분야의 최고 전문가로 꼽힌다. 그런 이유로 보건의료 행정 분야에서도 그 전문성이 빛을 발할 것이란 기대를 갖게 한다. 그러나 현재 박근혜 정부의 보건의료정책 방향이나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런 기대가 터무니없음을 깨닫게 한다. 보건의료와 복지 정책의 알맹이는 사라진 지 오래다. 새 일자리 창출과 의료산업 육성이란 빈껍데기 구호만 요란하다. 원격의료, 의료관광, 의료세계화, 헬스케어산업 육성 등의 깃발만 보인다. 지금의 보건복지부를 '보건의료산업부'로 불려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지경이다.

상황이 이렇게 고약해진 원인이 모두 의사 출신 복지부장관과 기관장들 탓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애초부터 이들이 의료전문가로서 역할을 할 것이란 기대치가 별로 없었다. 그들이 '깜짝' 발탁된 배경이 의사 출신이란 전문성보다 정권의 입맛에 맞는 그런 특성이 고려됐음은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의사 출신이란 타이틀은 정부의 보건의료정책을 그럴싸하게 만드는 포장에 불과하다. 그들이 가진 의료전문가로서의 역량과 자질이 보건의료정책이 본질적으로 추구해야 할 공공성을 강화하는 쪽으로 발현될 여지가 처음부터 없었다. 보건의료의 상업적 가치를 극대화 하는 정책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의사 출신 장관'이란 이미지를 덧씌워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방편으로 이용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박 대통령이 지난해 8월 메르스 사태를 계기로 경질된 문형표 전 복지부장관의 후임으로 정진엽 장관을 임명하면서 국회에 제출한 청문요청 사유서를 보면 이런 점이 명확히 드러난다.

"정진엽 후보자는 1990년 서울대병원 임상교수로 시작하여 현재까지 25년 동안 서울대병원 및 분당서울대병원에서 정형외과 교수 및 병원장으로 근무해 온 보건의료 전문가이다……2012년부터 의료기기 산업발전을 위한 ‘의료기기 상생포럼 총괄운영위원장’으로 활동했고, 2015년 분당서울대병원이 사우디아라비아 국가방위군 소속 병원에 수출한 병원정보시스템(HIS)을 만드는 등 의료 IT 분야에 대한 관심과 식견이 높다"

의료전문가이면서 동시에 의료 IT 분야 전문가라고 치켜세웠다. 의료 IT에 식견이 높아서인지 몰라도 원격의료니 인공지능이니 가상·증강현실이니 하는 첨단기술과 접목한 ICT 기반 보건의료기술 발전이라는 비전을 쏟아낸다. 이렇게 유행을 따르는 트렌디한 보건의료정책이 언제 있었을까 싶다. 실현 가능성과 보건의료정책으로써 공공성의 문제는 뒷전이다.    

행정경험이 없는 의사 출신을 깜짝 발탁할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지만 국회에서는 복지부 정책 추진의 실세가 따로 있다는 말이 무성하다. 기획재정부 출신의 차관과 산자부 출신의 보건산업정책국장에게 실질적인 권한이 집중돼 있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최근 단행된 '보건복지부와 그 소속기관 직제개정'은 이런 추측이 근거없지 않음을 보여 준다. 직제개정을 통해 보건산업정책국은 2명의 국장과 6개 과(65명)를 두게 돼 복지부 내 5개국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조직으로 확대 개편됐다. 복지부 내에서 건강보험제도의 육성·발전과 재정안정화 등의 업무를 총괄하는 건강보험정책국이 4개과에 56명의 인력을 두고 있다. 국민의 건강증진사업을 총괄하는 건강정책국은 4개과에 총원이 50명에 못 미친다. 이번에 보건산업정책국의 비중이 얼마나 커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보건의료산업 육성 정책이 뚜렷하게 성과를 내는 것도 없다. 원격의료 활성화 정책은 의료계의 동의를 얻지 못한 채 의료영리화와 대기업 특혜 논란만 초래하고 있다. 의료관광 육성 정책은 지난해 메르스 여파로 되레 위축됐고, 한국의 미용성형은 최근 들어 잇따른 의료사고와 불법 브로커에 의한 바가지 요금 등으로 되레 외국인들에게 한국의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만 심어주고 있다. 박 대통령의 해외순방을 계기로 해외의료진출을 추진하고 있지만 실속 없이 성과 부풀리기에만 집착한다는 비난이 거세다. 심지어 대통령의 해외순방에 맞춰 실속없는 업무협약 체결을 맺도록 연결해 주는 브로커가 존재한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건강보험공단과 건강보험심사평가원도 다를 바 없다. 2015년 말 기준으로 사상 최고의 건강보험 재정 누적금을 쌓아두고 있지만 건강보험 보장률은 60% 중반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건강보험료 부과체계 개선은 오리무중이다. 국민이 낸 보험료로 운영되는 심평원은 자동차보험 심사 위탁도 모자라 민간보험사의 수익성 제고를 위한 실손보험 심사업무까지 기웃거리는 눈치다. 심지어 복지부장관부터 건보공단 이사장, 심평원 원장까지 모두 의사 출신이지만 폭력적인 요양기관 현지조사 관행은 여전하다. 최근에도 현지조사를 받은 개원의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도 있었다.

이러는 사이 의료전달체계 붕괴와 의료자원 수급 불균형으로 인한 의료시스템의 문제는 더는 손대기 힘들 정도로 악화되고 있다. 1977년 의료보험제도가 도입된 이래 지난 수십년 간 ‘압축성장’을 해온 한국의료가 안고 있는 문제는 심각하다. 동네의원은 의료전달체계에서 '게이트키퍼'(Gate Keeper) 역할을 상실한 지 오래다. 짧은 시간에 많은 환자를 보는 '박리다매 진료'와 비만과 성형 등의 비급여 진료에 매달려야 생존할 수 있는 상태에 놓였다. 대학병원은 끊임없이 병상을 확충하면서 몸집을 부풀리는 식의 성장을 지속하면서 이제는 동네의원의 감기 환자까지 빼앗는 의료생태계의 황소개구리가 됐다. 터무니없이 커진 병원 규모를 유지하기조차 힘든 상황이지만 생존을 위해서는 규모의 경쟁을 멈출 수도 없는 상황이다. 의료전달체계가 개선되지 않는 상황에서 외형성장을 멈추는 순간 생존경쟁에서 도태하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는 의료기관 간 갈등적 경쟁을 더 부추기는 보건의료정책을 남발한다. 원격의료 활성화부터 해외환자 유치, 의료법인 부대사업 범위 확대, 실손의료보험 활성화 등의 정책이 모두 그런 작용을 한다. 심지어 공공병원에도 경영평가 잣대를 들이대 민간병원과 환자유치 경쟁을 벌이라고 등을 떠민다. 의사 출신이 수장을 맡고 있는 복지부와 건보공단, 심평원에서 지금 그런 일을 한다. 이렇게 가면 안 된다는 걸 의료전문가인 그들이 모르진 않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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