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있고 싶은 남자 / 선안남 지음 / 시공사 펴냄, 2016년

[라포르시안] 책읽기도 묘한 흐름 같은 것이 있습니다. 물론 책 읽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흐름도 있겠습니다만, 출판계가 만들어내는 경우가 더 많은 듯합니다. 올 여름에는 특히 남성의 정체성이 주목을 끌고 있는가 봅니다. 그래서 저도 같은 맥락의 책을 이어서 읽게 되었습니다. 지난주에 소개드린 일본의 사회학자 미나시타 기류의 <갈 곳이 없는 남자, 시간이 없는 여자>에선 은퇴 이후의 남성과 여성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면, 이번 주에 소개드린 <혼자 있고 싶은 남자>는 우리나라에서의 남성의 심리를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혼자 있고 싶은 남자>는 상담심리사로 활동하시는 선안남님이 상담현장에서 만난 분들의 이야기를 정리해냈습니다. 앞서도 출판의 흐름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만, 작가의 저서 목록을 보아도 그런 흐름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사랑으로 시작해서 여성을 다루었다가 이제 남성으로 변화하기 시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회학이나 심리학이 모두 인문학의 영역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심리학이 개별 사례를 통하여 미시적으로 분석하는 미분적 접근방식을 취한다면 사회학은 개별 사례들을 모아서 거시적으로 분석하는 적분적 접근방식을 취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작은 변화가 모여 큰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적 현상으로 주목을 받았다는 것은 특정한 경향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남성의 정체성이 변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 지는 오래되었습니다. 이미 사회적 현상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남성의 정체성에 대한 미시적 분석을 통하여 새롭게 드러나는 현상이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혼자 있고 싶은 남자>는 남성 심리학을 다루고 있지만, 특히 중년 이후의 남성을 주로 다루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일본의 장년들이 갈 곳을 찾고 있다’라고 본 미나시타 기류와는 달리 <혼자 있고 싶은 남자>의 저자는 ‘한국의 남자들은 혼자 있고 싶다’라는 명제를 내놓고 있습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남자들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남자다움‘의 압력에 시달리며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는 방법을 터득하고 억압 본능을 갈고 닦게 된다(7쪽)”라고 전제합니다. 하지만 저자에게 상담을 받으러 오는 특정한 성격의 남자들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한다면 이 전제가 타당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심리상담을 받으러 가지 않는 대다수의 남성들 역시 이와 같은 압력을 받고 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말미에 보편성의 그물망에 묶이지 못하는 개개인의 특수한 경험들이 있다는 점을 서술하기는 했지만, 저자가 만나는 사람들이야말로 개개인의 특수한 경험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자는 남녀 간의 성차에 주목하고 과거와 현대의 남성상을 병렬적으로 비교, 대조하는 방식으로 남성상을 설명하고, 궁극적으로는 인식의 틀과 차이를 허물로 각자의 경험 밑에 깔린 복잡한 사정을 이야기하는 물꼬를 트고자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과거 한국의 남성상을 ‘가부장제’라는 하나의 단어로 정리하기에는 과거 한국의 가정에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의 차이를 정확하게 짚었다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앎이 많지 않아서 잘 못 이해하고 있는지 모릅니다만, 과거 한국의 여성들이 남성들의 일방적인 횡포에 눌려 살았다고 정리하는 것이 절대적 진리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구조, 특히 관직에 여성들이 참여할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는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나뉘었던 사회적 특성에 기인하는 것이지 서로의 영역을 존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를 들면 지엄하신 왕께서도 내명부의 일에는 일체 간여할 수 없었던 것이 법도였던 것처럼 사가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남녀가 평등한 사회의 전형으로 삼는 서양에서의 여성의 입지는 오히려 근세에 이르기까지도 우리나라보다 못했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저자는 한국의 남성을 ‘철들지 않는 어른 아이’, ‘허세 부르는 소년’, ‘가장은 영웅이고 싶다’, ‘아버지의 그림자’ 등 네 가지 범주로 구분하였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심리상담을 받으러 오는 남성들을 여성적 시각에서 해석한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철들지 않는 어른 아이’의 핵심은 ‘침묵’입니다. 남편 혹은 남자친구와 소통이 안된다는 불만을 들고 오는 여성 상담자로부터 듣는 이야기로부터 일반화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회사 일까지도 미주알고주알 아내에게 털어놓는 저의 경우가 일반적일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심리상담을 받으러 갈 일이 없을테니 말입니다. 물론 침묵으로 일관하는 남성의 아내나 여자 친구 가운데에도 심리상담을 받으러 가지 않는 경우도 많을 것입니다. 모든 인간관계는 상대적이므로, 남성의 침묵이 그리 불편하지 않을 여성도 있을 터이니 말입니다. 남성의 침묵을 아동기에 경험한 분리 불안에 기인하는 것으로 단정하여 심리학적 문제가 기저에 깔려있다고 단정하는 것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나름 정상인 사람을 환자로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알파걸’이니 ‘거대한 엄마’ 등의 수사가 과연 우리나라 여성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여성들이 많아진 것은 사실이나 보편적인 사회현상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사회적으로 주목받는 상황들로 인하여 만들어진 허상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최근에 강남역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은 단편적인 사회현상을 지나치게 부풀렸던 것이 바닥에 깔려있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대목입니다. “특히 삶이 더 힘들어지고 기댈 데가 없어진데다가 변화를 받아들이기 힘든 남성들은 과거에 대한 향수에 젖어 강력한 가부장제로 회귀하고자 하고 여성 혐오주의를 키우기도 한다.(43쪽)”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강력한 가부장제를 향유한 남성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이미지 출처: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한 장면.

한국 남편들을 모두 마마보이로 모는 듯한 대목도 있습니다.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독립하던 미국사회에서도 요즈음 가정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여성들은 여전히 독립을 꿈꾸고 있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어느 사회나 관계는 중요합니다. 가족은 모든 관계의 기본이 되는 것인데, 어찌 보면 부부의 관계보다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변할 수 없다는 점에서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부의 관계를 부모-자식 간의 관계보다 우위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갓이 더 큰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자식이 성장하기 전까지는 부부의 중심으로 돌아가던 가정도 자식이 장성해서 가정을 꾸리게 되면 부모-자식 관계가 중심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부모의 관계보다 부모-자식 간의 관계를 우위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을 바꿀 것 같습니다. 특히 자기중심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경우에 말입니다. 결혼은 부모로부터의 독립이 아니라 가족 관계의 가지가 더 확대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나르시스와 에코의 관계를 해석함에 있어서도 시각을 달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반년을 사귄 남자친구와 헤어지기로 한 여성이 내세운 이유를 보면 남자친구가 전형적인 나르시시스트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나르시시스트들은 관계 속에서 착취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특성을 보이고, 에코이스트는 에코이스트들은 자기 주관이 없어 상대의 욕구에 끌려 다니기 쉽다(123쪽)’라고 설명하였습니다. 만약 나르키소스가 들으면 아주 섭섭할 것 같습니다. 저자의 말대로 그가 자기중심적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착취적 특성은 나르키소스의 명예를 심대하게 훼손시키는 말입니다. 나르키소스는 단지 눈이 높았던 것이기에 에코들의 간절한 소망을 외면한 죄밖에는 없습니다. 만약에 나르키소스의 눈이 낮아서 모든 에코들의 소망을 들어주었더라면 이번에는 나르키소스가 바람둥이라고 비난할 것입니다. 문제는 에코에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옛 말도 있는 것처럼 상대가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는데 목을 맬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자신만을 사랑해줄 진정한 인연은 따로 있을 터인데 말입니다. 사례에 나온 여성의 경우에도 남자친구가 아니다 싶으면 일찍 이별을 결심하면 될 일입니다.

책의 뒷부분에 나오는 ‘개저씨’라는 단어가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책에 쓰는 어휘를 신중하게 선택할 필요가 있다는 점은 짚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대목입니다. “보통 사회적으로 민감성이 강한 여성일수록 자기 목표를 행해 가는 도중에 삼천포로 빠지는 일이 많다.(142쪽)” 이는 부정적 의미의 속담에서 나온 것으로 사실은 길을 잘 못 든 사람이 스스로를 변명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말일 것입니다. 삼천포로 가는 길이 잘 닦여서 벌어지는 일이었다고 위안을 삼으면 좋았을 터이나 삼천포에 사시는 분들로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풀어가다 보니 트집을 잡는 것으로 일관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아마도 남성의 시각으로 읽다보니 변명거리를 찾아내야 하겠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트집잡기로 책읽기를 일관하는 가운데서도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남성들의 현주소를 아는데 분명 도움이 되었습니다. 특히 부모와 자녀들의 불편한 관계가 만들어지는 원인 가운데 중요한 것에 대한 언급은 부모나 자녀 모두가 꼭 알아야 할 것이었습니다.

자녀들이 아버지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부정적 인식은 대체적으로 어머니를 통하여 어머니의 시선으로 만들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관계에 문제가 있을 때는 직접 부딪혀 문제인식을 공유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경우 의외로 쉽게 해결점을 찾더라는 것이 저자의 경험입니다. 따라서 희생자로 보이는 어머니의 입장을 객관적으로 살펴보기를 권유하였고, 또한 아내에게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생기는 불만을 자녀들에게 투사하는 일이 오히려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필자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만, 우리나라 여성들은 남편 혹은 남자친구의 동호회 활동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시간 쓰고 돈 쓰고 에너지 쓰고, 얻는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남자들은 왜 그렇게 단체를 만드는데 집착할까요?(305쪽)”하는 의문을 가지고, 그와 같은 남자들의 행태를 ‘완장에 대한 집착’이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여성들이 사적이며, 친밀한, 작은 관계 속에서 나를 찾는 경향이 강한 것과는 달리 남성들은 학연, 지연, 취미를 망라한 조직적인 관계망을 형성하는 경우가 많고, 그런 관계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넘나들기 마련입니다. 유명 배우의 상징이기도 한 ‘의리’라는 관념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남성들의 이런 특성은 은퇴 후 삶에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일본 남성들은 은퇴하게 되면 그때까지 유지해오던 관계망이 무너지는 경향이 있어 ‘갈 곳이 없는 남자’가 되어 아내에게 불편한 존재가 되는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정리를 해보면, 저자는 심리상담 현장에서 만나는 남성 혹은 여성들이 가지고 오는 문제의 원천적 원인은 ‘고립’이라고 보았습니다. 즉 소통의 부재가 모든 문제의 근원인 것인데, 소통을 단절시키는 원인은 아마도 쌍방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넌들 나를 알겠느냐’라는  노랫말처럼 타인을 모두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류를 불러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갈 곳이 없는 남자, 시간이 없는 여자>도 그렇지만 <혼자 있고 싶은 남자> 역시 여성의 시각으로 남성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 같습니다. 특히 심리상담을 통하여 경험한 사례들이 통계적으로 의미있는 크기가 되어야 한다는 점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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