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건강증진연구소 서리풀 논평] 시민이 이끄는 개헌 논의를

[라포르시안]  17일인 제헌절이 막 지났다. 제대로 공휴일 취급을 받지 못해서 그런지, 아니면 ‘헌법’이 크게 의미가 없어서인지, 별 ‘임팩트’가 없다. 의례적인 언론 보도와 특집 기사가 있지만, 공론장에 도달하는 데에는 크게 미치지 못한다.

이런 조용함은 헌법의 현실과 그것의 전(全) 사회적 기초를 동시에 반영하는 것일 터, 꼭 올해만의 일은 아니다. 되돌아봐도 꽤 오랜 기간 헌법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한 기억이 희미하다. 지금의 헌법체계가 안정적으로 잘 작동하기 때문이라면 크게 문제로 삼을 일이 아니지만, 그보다는 관심과 논의의 ‘효능’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들어 여러 경로로 개헌 이야기가 나오는 것까지 생각하면, 이런 상황은 걱정스럽다. 그냥 지나간 제헌절이 미약한 관심과 치우친 논의 공간을 상징한다면, 새롭게 헌법을 논의하더라도 투입-과정-결과가 모두 ‘그들’만의 것이 될 공산이 크다. 누가 무엇을 논의하든 정략의 산물이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지금부터라도 헌법을 논의하는 시민의 힘을 키워야 한다. 헌법 논의에서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문제는 으레 나오는 형식적, 일반적 과제가 아니다. 현행 헌법은 진작부터 평범한 시민의 삶과 행복을 잘 보호하는 ‘가이드’나 ‘스폰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태다.

사드 배치가 그렇고, 성적 소수자 차별이 그러하며, 건강보험료 부과 논란도 마찬가지. 개인정보 유출과 통신 감청은 또 어떤가. 이런 중요한 문제에 대해 헌법은 무엇을 해 왔는지, 그리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고 또 잘 모르겠다. 헌법의 소외, 그리고 헌법으로부터의 소외다. 

지금까지 말한 배경을 염두에 두면서, 우리는 새로운 헌법이 포함해야 할 가치와 목표 몇 가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이에 앞서, 개헌 논의가 권력구조, 특히 대통령과 선거제도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에 반대한다는 점을 명확하게 해 둔다.

대통령제, 의원내각제, 이원집정부제 가운데 무엇인가, 또는 4년 중임인가 5년 단임인가 등등이 그렇게 문제인가. 전혀 중요성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수선’이 필요한 일부분일 뿐이며, 구조와 법체계보다 운영이 더 중요한 소프트웨어의 과제일 가능성이 크다. 권력구조가 개헌 논의의 ‘블랙홀’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정치권이 추진하는 개헌 논의가 특히 위험하다. 

새로운 헌법이라지만, 방향 없는 새로움이 아니라 이 시기 우리 사회에 필요한 가치와 지향을 반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형식을 갖추는 것 이상으로 사회구성원의 더 좋은 삶에 봉사하는 헌법이 되어야 한다.

첫째, 민주주의와 시민 통제를 강화하는 것. 비단 대통령 한 사람에 집중된 권한을 분산하는 논의에 그치지 않고, 지방분권과 자치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정도도 훌쩍 넘는다. 전면적인 민주주의의 심화를 목표로 해야 한다.

현실의 필요는 거시적 권력구조보다 훨씬 더 긴급하다. 선출되지 않은 것은 물론, 시민으로부터 위임받지도 않은 권력이 시민을 억압하는 경우가 어디 한둘인가? 사드 배치와 밀양의 송전탑, 곳곳의 핵발전소 건설을 둘러싼 논란과 파열은 단지 행정체계와 과정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에서 민주주의의 문제다.

미시적 권력구조만 하더라도 손대야 할 곳이 여럿이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조사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사법부와 헌법재판소, 자의적인 행정부와 공무원, 검찰과 경찰, 무소불위인 준(準) 사법권력, 그리고 독점 권력을 뒷받침하는 정책과 행정체계가 모두 걸린다. 구조를 넘어 과정과 운영, 원리에서 민주주의를 관철하는 것, 그리고 그 조건을 만들어가는 과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둘째,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답해야 한다. 불평등과 양극화가 공동체 자체를 붕괴시킬 수도 있을 정도로 나빠진다는 데 다들 이의가 없다. 소득, 교육, 건강, 문화, 지역 등 삶의 모든 영역이 피폐하나, 결국 책임과 피해는 일방적이고 편파적이다. 더구나 구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헌법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경제민주화’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얼버무릴 일이 아니다. 불평등의 사회적 구조와 성격을 명확하게 하고, 국가 책임을 명시해야 한다. 이에 상응하는 시장과 자본의 책임과 의무를 명확하게 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셋째, 인권과 기본권을 중심 가치로. 현행 헌법은 ‘자유권’조차 많은 비판을 받는 불완전한 상태다. 예를 들어, 21조 3항은 언론 자유를 자의적으로 제한하는 대표적인 조항으로 꼽힌다(인터넷 매체). “통신·방송의 시설기준과 신문의 기능을 보장하기 위하여 필요한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 

37조 2항은 또 어떤가.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많은 기본권이 안전보장, 질서유지, 공공복리의 이름으로 침해되었고 지금도 그렇다.

적극적 권리인 ‘사회권’은 기본권 가운데서도 더욱 강조되어야 할 권리다. 현재의 헌법, 예를 들어 “국가는 사회보장·사회복지의 증진에 노력할 의무를 진다”(제34조 2항)나 “모든 국민은 보건에 관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제36조 3항)와 같은 조항으로는 어떤 긍정적 변화도 불러오기 어렵다. 국가가 할 일을 가리켜 ‘노력’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면피용’ 말고는 무슨 소용이 있을까.    

선언에 지나지 않는 조항을 바꾸어 더 구체적으로 권리를 열거하고 국가 책임을 명확하게 하여야 한다. 다른 많은 사회권적 권리가 마찬가지지만, 건강권을 예로 드는 것이 좋겠다. 2014년 10월 <서리풀 논평>에서 설명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건강권 조항을 다시 불러온다(서리플 논평 바로가기).

첫째는 모든 사람이 보건의료 서비스(생식보건과 응급의료 포함)를 받을 수 있는 권리이고, 둘째는 어린이들이 기초 보건서비스를 제공받을 권리이다. 여기에 더해서, 형무소 수감자를 비롯한 수용인이 국가 부담으로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포함되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설명.

큰 차이가 없는 듯 보이지만 헌법에 좀 더 상세하게 규정했다는 것이 크다. 사회권에서 뜨거운 논쟁거리인, 국가의 책임을 엄격하게 규정한 부분은 그 의미가 더욱 중요하다. 바로 다음과 같은 헌법 27조 2항. “국가는 이들 권리의 점진적 실현을 위해, 가능한 자원 범위 안에서, 합당한 법률적 수단과 다른 수단을 마련하여야 한다.”

이는 단순히 선언적 조항이 아니다. 국가는 책임을 무한정 미룰 수 없으며, 가능한 한 신속하게 권리 실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요구한다(인권 논의에서는 보통 ‘림버그 원칙’이라 부른다). 국제 사회의 기본권 논의와 실천을 반영했다는 것도 중요하다.“

이와 연관된 중요한 한 가지 추가 사항이 있다. 기본권을 보장해야 하는 대상은 ‘국민’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 이미 ‘국민’과 ‘비국민’이 같이 살아가는 현실도 있지만, 국민국가의 도덕적, 정치적 의무로도 헌법에서 국민은 새로 표현되고 규정되어야 한다(예를 들어 제2장 ‘국민의 권리와 의무’). ‘인민’이 마땅치 않으면, 차라리 ‘인간’이나 ‘사람’은 어떤가. 

지금까지 세 가지 새 헌법이 담아야 할 가치를 강조했지만, 어디 이뿐이랴. 이제 출발이라 생각하면, 논의해 가면서 더 많은 과제가 곧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개헌이 목표로 하는 헌법 내용보다 그곳에 이르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앞서 우리가 주장한 헌법 내용조차 논의 과정에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누가 개헌을 이끌고 과정을 지배하는 주체인가? 형식적 절차를 준수해야 한다는 뜻보다는 헌법이 실질적인 ‘권력’을 가질 수 있다는 의미가 더 중요하다. 논의가 민주적이고 참여적일 때, 결과로서의 헌법은 비로소 보통 사람들의 일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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