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서 죽는다는 것 / 김형숙 지음 / 뜨인돌 펴냄, 2012년

[라포르시안] Book소리에서 ‘죽음’을 주제로 한 책을 잇달아 소개하는 것이 마음에 쓰이기는 합니다. 책읽기에도 우연이란 것이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제가 ‘죽음’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많은 탓이 아닐까 싶습니다. 최근 들어 죽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버리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는 있습니다. 그래도 ‘죽음’처럼 오랫동안 입에 올리기를 꺼려하는 금기어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주 소개하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지난주에 소개한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이, 작가 자신의 가족과 지인들, 그리고 그가 알고 있는 예술가들의 죽음에 관한 일화를 통하여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방법에 대한 사색을 담았다고 한다면, 이번 주에 소개하는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은 병원, 특히 중환자실에서 근무하는 의료인이 경험한 죽음들에 얽힌 사연과 그 죽음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병원은 도시에서 대표적으로 죽음이 일어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을 쓴 저자는 저와는 띠동갑이라는 것과 어쩌면 같은 병원에서 잠시 스치듯 일했을지도 모르는 공통점이 있는 듯합니다. 경남 거창에서 태어나고 자란 저자는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만났던 옛날 방식의 죽음과 사뭇 달라진 요즈음의 죽음을 같이 경험한 특별한 분이라고 하겠습니다. 70년대 말에 의과대학을 졸업한 저 역시 응급실 근무를 하면서 적지 않은 죽음을 만났습니다. 대부분 병원에서 운명하지 않고 죽음에 임박해서는 댁으로 모셔가곤 했습니다. 객사한 주검은 집으로 들이지 않는다는 우리네 전통 때문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병원의 장례식장에서 초상을 치른다는 것이 부담스러우면서도 체면이 서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장례식은 한 집안의 문제가 아니라 온 동네가 나서야 해결되는 마을의 큰 행사였던 것입니다. 오랜 세월을 부대끼며 정을 나눠온 이웃을 작별하는 의례일 뿐만 아니라 아무리 대가족이라고 해도 장례절차는 힘에 부치는 일이었기 때문에 서로 도와주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요즈음에는 이웃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지내는 경우가 훨씬 많아서 이웃의 힘든 일에 힘을 보태거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생각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파트라는 것이 돌아가신 분을 모시고, 문상 온 분들을 대접하고, 출상하는 과정이 불가능한 구조로 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이웃에 주검이 누워있다는 사실을 주민들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세태의 변화에 맞추어 장례절차를 대행해주는 장례식장 사업이 발전하고, 장례절차를 안내하는 장례지도사라는 전문직종이 생겨나기까지 했습니다. 더욱이 병원에 딸린 장례식장은 예약이 안될 뿐더러, 병원에서 돌아가신 분들을 위한 공간을 내기도 어려워 임종을 앞둔 환자를 병원으로 모시는 해괴한 현상이 생긴 것입니다.

<도심에서 죽는다는 것>은 모두 다섯 개의 장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자연스러웠던 죽음을 추억한다’라는 제목의 첫 번째 장에서는 저자가 중환자실 간호사가 되기까지의 삶을 요약하였습니다. 그리고 스물세개의 사연을 각각 ‘중환자가 된다는 것, 나에 대한 결정에서 배제된다는 것’, ‘중환자실에서 죽는다는 것, 이별이 어렵다는 것’, ‘죽음 이후, 당신이 아무 것도 결정하지 않았을 때 생길 수 있는 일’, ‘다른 가능성’ 등의 제목으로 구분하여 중환자실에서 맞는 죽음에 얽힌 문제를 짚고 있습니다.

제1장에서 저자는 자라면서 겪은 죽음들을 되돌아보면서 지금은 우리가 일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죽음들보다 그때의 죽음이 훨씬 인간적이었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그 산마을에서는 어린아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예감하면서 다음을 준비하는 마음을 품는 것이 그리 이상스런 일만도 아니었다.(22쪽)”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예전의 시골에서는 집안 어른이 죽음을 맞는 과정에 어린아이들을 동참시키지 않는 것이 관행이었던 것 같습니다. 죽음은 언제나 갑자기 통보되고, 엄숙하고 황망한 가운데 치루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죽음이란 특별하지 않았을 뿐더러 일상적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할아버지 그리고 할머니께서 죽음을 준비하신 과정은 저에게도 큰 울림이 되었습니다.

단지 중환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치매 혹은 암과 같이 치명적인 진단이 결정된 경우, 대부분의 의료진과 가족들은 이 사실을 환자에게 알릴 것인가를 두고 고민을 하게 될 것입니다. 병명을 알리지 않는다고 해도 눈치가 빠른 환자들은 치료과정에서 자신의 병명을 유추할 수도 있습니다. 이번에는 오히려 환자가 자신이 병명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기에 급급한 웃지 못 할 상황도 생기는 것입니다. 저는 환자에 따라서는 병명을 감추는 것이 옳은 선택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모든 환자들이 스스로 왜 죽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알리는 과정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일단 알리게 되면 치료과정에서 환자의 적극적 참여가 가능해지고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무의미한 치료를 중단하는 결정도 환자 스스로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제2장 ‘중환자가 된다는 것, 나에 대한 결정에서 배제된다는 것’에서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환자가 고립되고, 소외되고, 배제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공포에 빠지거나, 침묵하거나, 심지어는 분노를 표출하는 경우도 있어 의료진을 힘들게 만들 수 있습니다.

온 가족과 죽음의 과정을 함께 하면서 서로에 대한 이해를 높여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생각에 크게 공감합니다. 공교롭게도 저의 부모님께서는 모두 돌아가시기 전에 뇌졸중으로 입원하셨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뇌출혈로, 어머님께서는 뇌경색으로 각각 입원하셨는데 불행하게도 고비를 넘기지 못하셨습니다. 신경외과를 하는 막내 동생이 주치의를 맡았고, 서울에 살고 있는 나머지 3형제들은 주말마다 내려가 한 주일 동안의 병세도 알아보고 시간을 같이 보냈습니다. 이런 시간들이 그만 이별여행이 되고 말았습니다만, 두 분 모두 퇴원이 힘들 수도 있다고 예감하셨던 것 같습니다. 나름대로는 희망을 불어넣어드리려고 힘을 썼습니다만, 안타깝게도 예감대로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런 경험 때문인지 “늘 죽음 자체보다는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고통이나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홀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작별인사도 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게 되는 상황을 더 두려워한다.(34쪽)”라고 적은 저자의 생각에 공감하였습니다. 지난 해에는 장인어른께서 돌아가셨는데, 오랜 투병 끝에 임종에 가까워지면서 중환자실 입실을 권유받았습니다. 그때 가족들은 의논 끝에 차라리 1인실로 옮기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평소 비싼 입원료 때문에 1인실 이용을 거부하셨던 장인어른께서도 마지막에는 참 잘했다는 말씀을 하셨던 것은 출입이 자유롭지 않은 중환자실보다는 시간이 되는대로 찾아온 가족들과 함께 지내시면서 죽음을 준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환자실에 입원해서는 이와 같은 이별이 어렵다는 사례들은 제3장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죽음이 일상처럼 일어나는 중환자실에서 근무하면서 안타까운 죽음을 많이 지켜본 탓인지 저자는 자연스럽게 호스피스간호에 관심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과 맞서 싸우는 곳이 중환자실이라고 한다면 호스피스는 그야말로 평안한 가운데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곳입니다. “호스피스란 죽음을 앞둔 말기환자와 그 가족을 사랑으로 돌보는 행위로서, 환자가 남은 여생 동안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높은 삶의 질을 유지하면서 삶의 나머지 순간을 평안하게 맞이하도록 신체적, 정서적, 사회적, 영적으로 도우며 사별가족의 고통과 슬픔을 경감시키기 위한 총체적인 돌봄(126쪽)”이라고 정의합니다.

저자는 특히 환자의 자기결정권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해온 것 같습니다. 갑작스럽게 병원에 입원하는 경우를 상정하여 평소에 자신의 입장을 밝혀둔다면 가족들은 물론 의료진도 진료방향을 결정하기가 쉬워질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말기환자에서 심폐소생술을 비롯하여 의미가 없는 고가의 적극적 치료제를 투입하는 것은 짧은 생명의 연장 이외에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의미 없는 연명치료는 하지 않도록 사전에 의사를 분명하게 밝혀둘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다양한 항암치료제가 개발되어 임종에 이를 때까지 항암제를 투여하는 경우도 왕왕 있습니다. 생에 대한 환자의 욕망과 가족들의 의무감, 그리고 의료진의 안타까움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심평원에서 준비하고 있는 사망률평가에서 말기암환자에서 적극적 치료를 하지 않은 기간을 설정하는데도 이견이 많은 것은 이런 상황 때문인 것입니다.

특히 제4장에서는 장기기증과 관련한 뇌사자의 사례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 뇌사판정을 받은 환자에게 장기기증을 적극적으로 권하던 시절이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보라매사건 이후로 뇌사자라 할지라도 연명수단을 인위적으로 제거할 수 없게 되었지만, 생명이 유지되는 동안에 장기적출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특수성 때문에 뇌사자라고 하더라도 장기기증 의사를 밝히게 되면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정이 힘든 가정에서 뇌종양에 걸린 동생이 뇌사상태에 빠지자 신부전으로 고통 받는 형이 동생의 신장을 이식받기를 희망하지만, 노모는 치료비를 걱정할 수밖에 없던 사례에서 결국은 동생의 정신질환 증상이 문제가 되어 이식을 논할 필요가 없게 된 사례를 두고 저자는 만약 동생이 사정을 알게 되었다면 장기이식에 동의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제기하기도 합니다.

의료현장은 같은 상황을 두고서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장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해진 답이 있을 수 없다는 열린 생각으로 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마지막 장 ‘다른 가능성들’에서는 열린 생각으로 상황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새삼 되짚어보고 있는 이유일 것입니다. 응급수술을 중단시킨 할머니가 자기 고민의 시간을 거친 뒤에 수술을 받아들이게 된 사연에서는 분초를 다투어야 할 상황에서 환자에게 상황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잘못과 함께 환자의 의사결정권이 재삼 강조됩니다. 분초를 다투는 수술이라면 더더욱 불필요한 갈등으로 시간을 지연하는 불상사를 피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임종을 맞는 어머니에게 병원의 금기를 깨고 어린 아이에게 면회를 허용한 것은 죽음을 맞이하는 어머니로서도 눈을 감지 못할 일이며, 아들 역시 오랫동안 정신적 상처로 남을 수도 있는 생이별을 막은 참 잘한 일 같습니다. 우리는 때로 규정에 매몰되어 인간을 상실하는 우를 범하기도 합니다.

<도심에서 죽는다는 것>을 읽고서 이 책을 읽은 분 가운데 병원의 중환자실에 대하여 오해를 하실 수도 있겠다는 걱정이 들었다는 말씀을 사족처럼 덧붙입니다. 예를 들면 중환자실이 수술을 준비하는 장소, 혹은 수술 후 회복을 위한 장소로 오해하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과 함께, 임종을 앞둔 환자가 죽음을 준비하는 장소라고 오해하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당연히 중환자실은 말 그대로 중환자들이 집중치료를 받는 곳입니다. 당연히 중환자가 많기 때문에 죽음을 맞는 환자도 많습니다만, 고비를 잘 넘겨 일반병실로 옮겨가는 환자가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다만 저자는 중환자실에서 불행하게도 고비를 넘기지 못했던 환자들에 더 마음이 쓰였던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은 죽음을 되돌아보면서 당시의 자신의 역할에서 아쉬움은 없었는지를 짚어보았다고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최근에는 중환자실이 그야말로 중환자를 위한 시설로 운영되고 있고, 그에 대한 특별한 수가가 지불되기 때문에 그저 수술을 준비하거나 수술 후 회복을 기다리는 곳이 아니라는 점도 분명히 합니다.

저자가 중환자실에서 드물지 않게 생기는 죽음을 모아 살펴본 것은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환자가 고통스러운 처치를 받으면서 중환자실에서 죽음을 맞아야 하는가 고민해보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만약 당신이라면 가족들과 떨어져 다가오는 죽음을 맞고 싶으시겠습니까?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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