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기종(한국백혈병환우회 대표,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대표)

[라포르시안] 한국에서 '환자운동'의 역사는 일천하다. 보건의료 제도나 의료시스템의 영역에서 환자의 위치는 피동적인 수혜자이자 제3자의 자리에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문가집단과 정부가 구축해 놓은 의료체계에서 환자는 당사자가 되지 못했다. 보건의료정책이나 의료시스템에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지만 주체적으로 제도나 시스템을 바꿀 수 있는 역할을 부여받지 못했다. 환자운동의 개념은 정립되지 못했고, 수많은 환자단체가 생겨났지만 여전히 제도권 보건의료 영역의 문밖을 서성일 뿐이다.   

외국의 환자운동이 에이즈, 유방암 등의 질환을 가진 환자단체를 중심으로 인권으로서 건강권 문제에 접근해 환자의 권익강화로 이어진 반면 한국의 환자운동은 특정 질환을 가진 환자들의 투병지원과 의료비 부담 문제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이런 상황은 한국의 취약한 건강보험 보장성 문제와 무관치 않다. 특히 중증질환의 경우 ‘재난적 의료비’로 불릴 만큼의 과도한 의료비 지출로 경제적 부담을 지울 때가 많다. 그런 상황에서 보건의료제도의 구조적 문제에 관심을 갖기란 언감생심이고,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를 위한 급여기준 확대, 병원의 비급여 진료비 등의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2000년대 초, 백혈병 환자들의 '글리벡 약가인하 투쟁'을 계기로 환자들이 당사자로 목소리를 내면서 비로소 환자운동에 눈을 뜨게 됐다. 글리벡 약가인하 투쟁의 산물이 바로 '한국백혈병환우회'의 창립이었다. 한국의 환자운동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낸 백혈병환우회가 올해로 창립 14주년을 맞았다. 지난 24일 안기종 대표를 만나 한국의 환자운동의 의미와 성과, 방향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 한국의 환자운동에 있어서 '글리벡 약가인하 투쟁'은 어떤 의미인가. 

= 글리벡 약가인하 투쟁을 이야기하면서 가족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나의 아내는 2001년 11월 28일 만성골수성백혈병 가속기 진단 진단을 받았고, 그해 12월 5일부터 글리벡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하루에 6알씩. 당시 인도적 차원의 무상공급프로그램을 통해 글리벡을 복용할 수 있었고, 이후 한 달 만에 만에 혈액수치가 정상으로 나왔고 10개월 후 골수이식까지 받게 됐다. 초기에 아내가 6개월 밖에 살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는데, 그때부터 백혈병 환자 가족으로 글리벡 약가인하 투쟁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사무실에 나가 봉사도 하고 집회에 나가 피켓을 들고, 환자의 생명과 직결되는 치료제의 약가를 인하해 달라고 목소리를 냈다. 글리벡 약가인하 투쟁에 참여하면서 약가나 건강보험제도를 정하는 데 있어서 환자의 목소리가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심지어 환자들의 목소리를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획기적인 신약이 나오면 환자가 우선 살 수 있도록 복용하게 해주는 게 최우선일 텐데 건강보험 재정이나 급여기준, 제도 이야기만 했다. 그러다가 환자들이 집단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니까 여론이 움직이고 정부나 제약사가 움직이더라. 그렇게 15개월 정도 약가인하 투쟁이 지속되니까 환자가 목소리를 내면 제도나 정책에 반영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그리고 환자단체의 이름으로 의견을 내고 하니까 정책에 반영되고 하는 경험을 하게 됐다.

글리벡 약가인하 투쟁이 환자운동을 촉발시켰다는 말인가.

= 환자운동에 있어서 글리벡 약가인하 투쟁을 통해 출범한 한국백혈병환우회의 경험은 정말 중요하다. 글리벡 약가인하 투쟁이 환자단체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을 깨웠고, 환자들이 보건의료운동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쳐줬고, 그것이 처음으로 실현된 게 백혈병환우회다.

외국에서는 유방암이나 에이즈 환자단체를 중심으로 환자운동이 발전했는데 한국에서는 특이하게도 글리벡 때문에 실질적인 환자운동이 시작됐다. 이후로 위장관기저종양(GIST)환우회 등의 환자단체가 만들어지게 됐고, 환자가 보건의료제도의 당사자로서 위치를 갖게 됐다. 기존의 환자모임이 같은 질환을 가진 사람들끼리 투병 경험을 공유하는 정도였다면 글리벡 투쟁을 통해 환자가 보건의료제도의 당사자로서 위치를 확립하는 전환점이 마련된 셈이다.

많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환자운동이 아직도 특정 질환을 가진 소수 환자당사자 운동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  환자단체는 개별 질환의 투병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는 것이 최우선 목표다. 치료비 문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방법(복지) 등에 활동을 집중할 수밖에 없다. 초기에는 환자들의 투병을 지원하기에도 벅찬 상황이었고, 보건의료제도와 같은 큰 틀의 구조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했다. 환자운동을 시작하고 10여년 만에 겨우 자립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게 됐다.

초기의 환자운동에서 시민단체와 연대해서 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환자 중심이 아니라 한미FTA나 의료민영화 반대와 같은 이념적인 의제에 너무 경도되는 측면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환자단체를 비전문가 그룹으로 보고 보건의료 분야에서 전문성이 부족하다고 바라보는 듯한 인식도 느꼈다. 환자단체와의 관계에 있어서 동등한 위치에서 파트너십을 가지려는 인식이 부족하다는 아쉬움도 있었다. 보건의료 분야의 주요 아젠다마다 시민단체나 전문가집단에 의지해 이슈화 하던 것에서 벗어나 지금은 환자단체가 주체가 돼 환자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최종적으로 의사결정을 하는 단계까지 왔다.

환자단체의 역량이 여느 전문가단체 못지않은 수준으로 전문화가 이뤄졌지만 아직도 환자단체를 땡깡이나 부리는 '문 앞에 선 야만인'으로 보는 시각도 여전히 남아 있다. 지난 2010년 10월 시민단체를 제외하고 환자단체를 중심으로 한 한국환자단체연합회가 출범하게 됐다. 연합회가 출범하면서 개별질환이 아니라 전체 환자들과 연계한 이슈를 다루는 적극적인 활동을 펼쳐왔다. 실제로 연합회가 초기에 중점사업으로 제시했던 ▲암환자 산정특례제도 리콜(Recall) 청원운동 ▲보호자 없는 병원 만들기 운동 ▲호스피스 완화의료 환경조성 운동 ▲모든 병원비를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운동 ▲합리적 의료기관평가인증제도 도입운동 ▲의약품 복용 순응도 개선사업 등의 성과를 냈다.

환자단체가 잇따라 생겨나고 환자운동이 성과를 내면서 보건의료전문가 단체와 갈등 구조도 형성되고 있다. 환자단체와 보건의료전문가, 혹은 공급자단체와의 바람직한 관계 설정을 고민할 필요도 있을 거 같다.

= 의사협회나 한의사협회 등은 환자단체와 보건의료 정책이나 제도, 법률에 있어서 파트너십을 갖는데 소극적인 모습이다. 회원들의 눈치를 보기 때문인지 몰라도. 그러나 국회나 정부, 공공기관은 말할 것도 없고 약사회, 간호협회, 간조무사협회, 중소병원협회, 요양병원협회 등과는 다 파트너십을 갖고 있다. 제약 쪽도 물론이고. 환자단체와 자주 교류하며 의견도 전달하고 있다. 의협이나 한의협은 아직 파트너십을 형성하지 못해서 답답한 게 있다. 불법이나 편법을 쓰지 않고 환자에게 이익이 된다고 하면 누구하고도 파트너십을 갖고 함께 할 수 있다. 정부가 환자에게 이익이 되는 정책을 추진한다고 판단되면 정부에다가 힘을 실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단체라도 마찬가지다.

 

최근 수년간 환자단체와 의사단체가 갈등과 충돌이 잇따랐다. 그 과정에서 환자의 권리증진이 의료인의 권익과 상충하는 것처럼 비춰지기도 했다.   

= 우리나라 의사 수가 약 10만명인데 그 중 1%의 나쁜 의사와 그들의 주장에 동조하거나 혹은 그들의 주장으로 논란을 일으키려 하는 언론의 문제라고 본다. 물론 환자들 중에도 1%의 나쁜 환자가 있다. 의사한테 함부로 대하고, 의사 입장에서는 정말 인권침해를 당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 태도를 보이는 환자도 있다. 문제는 1%의 나쁜 의사와 1%의 나쁜 환자의 사례를 가지고 언론이 계속 기사화하면서 논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대부분의 환자는 의사를 존경한다. 의사들도 환자를 아끼고 성실하게 치료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고 1%에 불과한 나쁜의사, 나쁜 환자의 사례만 자꾸 부각시키기 때문에 마치 환자의 권리증진이 의료인의 권익을 침해하는 것처럼 왜곡하게 된다. 앞으로 환자단체연합회가 주최하는 환자샤우팅카페를 통해 환자에게 감동을 주고 존경을 받는 의사들의 소개하는 '환자 땡큐카페'를 열려고 한다.

환자운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뭔가.

= 외국의 환자단체는 거버넌스를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환자운동을 '거버넌스 운동'이라고 할 정도다. 환자의 의견이나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는 보건의료 제도나 정책은 말이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환자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통로가 바로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와 같은 보건복지부 소관 법정위원회이다. 이런 위원회를 통해서 적극적으로 환자의 목소리를 전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동안 이 부분에 대해서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현재 복지부와 산하 기관에서 운영하는 소관 위원회가 약 50여개 정도 되는데, 현재 환자단체가 참여하는 위원회는 4~5개에 불과하다. 의료급여심의위원회, 응급의료심의위원회에 이어 올해부터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도 환자단체가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약제급여평가위원회, 치료재료전문평가위원회, 건강보험공단의 재정운영위원회 등에는 참여하지 못하고 있어 아쉬움이 크다. 이런 거버넌스(위원회)에 참여하지 못하면 그곳에서 논의되는 내용을 우리가 알 수 없고, 환자들의 의견을 정책 방안이 결정되기 전에 수렴할 수도 없다. 지금은 이미 만들어진 안을 놓고 환자단체에 사후 의견조회를 하는 수준이다. 그러다 보니 환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보건의료정책이나 제도 변화에 적극 대응할 수 없는 상황이다.

최근에 만난 유럽의약품청(EMA) 관계자는 "우리는 모든 정책 결정에 있어서 환자단체를 참여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환자단체의 역량 강화를 위해 교육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서도 환자의 관점에서 환자경험과 의견을 관련 정책에 반영하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그런 의미에서 환자의 참여, 단순히 참여하는 게 아니라 '권한이 있는 참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환자운동의 방향성은.

= 환자운동이 추구할 방향성, 혹은 목표가 크게 세 가지 있다. 가장 먼저 더 많은 환자단체가 출범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이다. 현재 국내에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상에서1,400여개 정도의 개별 환우모임이 결성돼 있다. 이 중에서 환자단체의 모양을 갖추고 성장할 수 있는 곳이 100여개 정도라고 본다. 이 100개의 환자모임이 환자단체로 틀을 갖추고 활동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데 많은 노력을 쏟을 계획이다.

두 번째로 보건의료 정책과 건강보험 제도 개선이다. 지금까지 환자단체가 특정 질환을 가진 환자들의 투병을 지원하는 데 집중했다면 앞으로는 의료제도의 구조적인 문제를 개선하는 데 더 많은 힘을 쏟을 생각이다. 이를 위해서 환자단체연합회를 중심으로 오는 10월부터 환자포럼을 시작해 보건의료정책의 변화를 이끄는 아젠다를 환자단체가 선점할 수 있도록 추진할 계획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 환자단체연합회를 넘어서는 또다른 연대를 고민하고 있다. 의료환경의 구조적인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소비자단체와 시민사회단체, 의료공급자단체 등과 함께하는 더 큰 틀의 연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환자단체연합회를 더 크게 키우기보다는 개별 환자단체를 더 튼튼하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저작권자 © 라포르시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