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폐손상 ‘석면증’ 같은 지표질환으로 판단…“의학교과서에 실릴만한 사례”

[라포르시안]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에 대한 검찰의 조사가 진행 중인 가운데 피해자들의 중증폐질환 발생 원인이 가습기 살균제 성분에 의한 것이란 기존의 역학조사 결과가 더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의학 전문가 단체의 의견이 나왔다.

한국역학회(회장 최보율)는 지난달 11일 서울중앙지방검찰청으로부터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폐질환에 대한 역학조사’와 관련한 의견 요청을 받았다.

이 사건의 최대 가해기업인 옥시레킷벤키저의 법률대리인 측은 기존 역학조사 결과나 보건당국의 발표 내용만으로 가습기 살균제와 폐손상 건강피해 사이에 인과관계를 인정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검찰은 지난달 한국역학회 측에 가습기 살균제 제조사의 법률대리인 등이 주장하는 내용에 대해서 전문가 의견을 구하는 요청서를 보냈다.

검찰이 제시한 질문은 총 38개 항목이었고, 2011년 서울시내 한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내원한 산모들에서 보고된 원인미상 중증폐질환과 관련해 울산대의대 예방의학교실에서 수행한 '원인미상 폐손상 관련 병원기반 환자-대조군 조사' 보고서 내용에 관한 것이었다. 

병원기반 환자-대조군 조사는 2011년 5월 질병관리본부 중앙역학조사반의 의뢰로 수행했으며, 가습기 살균제와 원인미상 폐질환 발생이 강력한 역학적 인과관계를 갖는다는 점을 밝혀냈다. 2011년 8월 말 보건복지부는 이 역학조사 결과를 근거로 "가습기 살균제가 원인미상 폐질환의 위험요인으로 추정된다"고 공식 발표한 바 있다.

따라서 향후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의 검찰 조사나 법정 공방 과정에서도 병원기반 환자-대조군 조사 내용은 중요하게 인용될 수밖에 없다. 검찰 측에서도 이런 점을 고려해 역학회에 전문가 의견을 구한 것으로 보인다. 

검찰의 요청에 역학회는 가습기 살균제 연구와 관련해 이해상충이 없는 5명의 전문가로 임시위원회를 구성하고 관련 자료를 검토해 의견을 최종 정리한 후 지난 2일자로 답변서를 제출했다.

전문가 의견을 위한 임시위원회에는 아주대의대 예방의학교실 이순영 교수(위원장)를 비롯해 이화여대 의대 박혜숙 교수, 아주대 의대 신승수 교수, 단국대 의대 하미나 교수, 그리고 인하대 의대 황승식 교수가 참여했다.

"교차비 47.27은 가습기 살균제와 폐질환의 인과관계를 지지하는 강력한 근거"역학회는 검찰에 전달한 답변서를 통해 원인미상 폐질환의 역학적 인과관계를 규명하기 위한 환자-대조군 연구 설계가 적절했고, 폐질환의 원인이 가습기 살균제 성분에 의한 것이란 점을 더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검찰은 가장 먼저 '원인미상 폐손상 관련 병원기반 환자-대조군 조사'의 환자 정의 수립과정이 역학적 관점에서 올바르게 수립됐는지 여부를 물었다.

역학회는 "해당 역학조사에서는 질병의 진행 정도에 따라 나타날 수 있는 임상적, 영상의학적 소견을 환자의 정의에 포함함으로써 질병발생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생물학적 반응과 변화를 반영했고, 결과적으로 민감도와 특이도가 매우 높은 환자 정의를 내렸다고 판단한다"고 답변했다.

검찰은 해당 역학조사의 확정된 환자군 28명 중 24명이 여성이고, 증상 발생일이 주로 12~4월에 집중돼 있고 2011년에 갑자기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는 데 이러한 환자군 특성이 갖는 역학적 의미에 대해서도 물었다.

역학회는 "여성의 비율이 높았던 점은 여성과 남성에서의 차이를 나타낼 수 있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관여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며, 이러한 남녀의 차이는 생물학적 또는 생활환경적 노출의 차이에 따른 결과로 생각된다"며 "증상 발생일이 주로 12월에서 4월에 집중된 것은 해당 질병 발생에 계절과 절과 관련된 요인의 노출과 관련이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고 설명했다.

2011년에 갑자기 환자 발생이 증가 추세를 보인 것에 대해서는 "가습기 사용을 증가시킬만한 2011년 해당 시점의 계절적 특성이 전체 발생률을 증가시킬 수도 있고, 2011년 전후 장비의 추가 도입으로 호흡기질환 중환자의 집중치료가 가능하게 된 특정 병원에 원인미상 폐질환 환자가 전원 및 입원율이 증가하면서 각 병원에서 산발적으로 발생했으나 지나쳤던 원인미상 폐질환의 발견율이 증가했을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한국역학회가 지난 5월 2일 검찰에 전달한 답변서 내용 중 일부 갈무리.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한테 발생한 폐질환의 원인으로 ‘바이러스 또는 세균 감염’이 원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완전히 배제했다.

역학회는 "해당 역학조사에서 혈청학적, 호흡기 검체, 세포배양 등 임상적으로 가능한 모든 검사를 실시한 결과로 볼 때 환자들의 발병 원인으로 현재까지 알려진 바이러스 또는 세균 감염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있다고 판단된다"며 "해당 환자들에게서 여성이나 소아에 호발하는 알려진 바이러스 감염의 혈청학적 및 미생물학적 증거는 찾을 수 없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바이러스 폐질환 가능성에 대한 주장은 적절하지 않다"고 밝혔다.

역학조사 결과를 통해 가습기 살균제에 대한 교차비(OR)가 '47.27'로 나온 것은 환자들의 폐질환이 가습기 살균제와 상당히 높은 인과관계가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역학회는 "해당 역학조사에서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하면 사용하지 않은 사람에 비해 원인 미상 폐질환이 47.27배 발생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며 " 47.27배라는 교차비는 가습기 살균제와 폐질환의 관련성 강도가 매우 높다는 것을 의미하며, 가습기 살균제와 원인 미상 폐질환 발생 간의 인과관계를 지지하는 강력한 근거"라고 답변했다.

또한 원인미상 폐손상의 환자-대조군 조사 결과가 역학연구에서 인과관계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널리 통용되는 '힐 기준'(Hill's criteria)을 모두 충족한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앞서 담배소송에서도 흡연과 폐암의 상관관계에 관한 역학적 연구결과가 힐 기준을 모두 충족한다는 점을 근거로 흡연과 폐암 발생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한 판례가 있다.

역학회는 " 원인 미상 폐질환 환자군에서 대조군에 비해 가습기 살균제 노출의 교차비가 47.3으로 높게 산출돼 강한 관련성을 보였고, 원인 미상 폐질환은 가습기 살균제 이외의 다른 원인으로 설명되지 않는 등 관련성의 강도나 특이성, 일관성 등 힐의 기준 8가지를 모두 충족한다"고 판단했다.

한국역학회가 지난 5월 2일 검찰에 전달한 답변서 내용 중 일부 갈무리.

특히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에서 나타난 폐질환이 '석면증'과 같은 'signature disease(지표질환)'에 해당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원인미상의 폐질환이 석면증처럼 오로지 특정한 한 요인의 노출하고만 연관성이 있는 질환이라는 것이다.

이 질환이 발생했다는 것은 해당 요인에 노출됐음으로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만큼 강한 인과관계를 갖고 있다는 의미다.

역학회는 "해당 역학조사에서 원인 미상 폐질환으로 진단된 18명 중 17명이 가습기살균제에 노출됐고, 지금까지 확인된 적이 없는 특징적인 임상적 및 병리적 소견을 보였다"며 "(가습기 살균제가)판매 중지된 이후 원인 미상 폐질환이 발생한 적이 없으므로 정의상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signature disease'로 볼 수 있다"고 밝혔다.

역학회의 전문가 의견을 내기 위한 임시위원회에 참여한 한 전문가는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에서 나타난 폐질환 사례가 의학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전형적인 사례라는 의갼을 보였다.

황승식 인하대의대 교수(사회의학교실)는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에서 나타난 폐질환은 '가습기 살균제 성분에 의한 폐손상'이라고 질병 정의를 해야 할 수준이었다"며 "역학조사 결과의 인관과계에 대해서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고 말했다.

황 교수는 "더는 '원인 미상'이라는 용어 자체가 의미가 없다. 의학교과서에 실릴만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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