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호 대한의사협회 의무이사

보건복지부는 지난 22일 대한의사협회, 대한병원협회, 건강보험심사평가원, 국민건강보험공단 등 유관기관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진료실명제 추진 간담회를 열고 국민권익위원회 제도개선 권고 및 국정감사 지적에 따라 진료실명제를 도입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를 위해 건강보험법 시행규칙 제12조(요양급여비용의 청구 등) 및 요양급여비용 청구방법을 개정해 요양급여비용청구시 진료의사․치과의사․한의사의 성명, 면허종별, 면허번호를 요양급여비용명세서에 기입하도록 할 예정이다.

정부는 진료실명제 도입이 의료소비자 권리신장 및 공급자에 대한 신뢰도 제고, 의사의 책임진료 유도, 급여비용청구 투명성 제고에 기여할 것이라며 제도도입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진료실명제 도입이 소비자의 알 권리를 높이고 의사의 책임성을 높일 것이라고 밝히고 있으나 이 같은 기대효과를 얻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진료실명제가 도입될 경우 진료실명제로 구축된 정보가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슈퍼컴퓨터에 축적되어 다른 용도로 악용될 우려가 클 뿐만 아니라 의료기관에 과도한 행정부담을 지울 것은 명약관화하다.

진료실명제라는 명칭 자체도 의사, 의료기관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줄 개연성이 크며, 이는 행정력 부담에 대한 보상 없이 규제만 강화하는 격으로 제도도입에 따른 실익을 충분히 검토한 뒤 도입 여부를 논의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청구자료 분석을 통한 진료행태 개선은 의사의 진료권과 지적재산권을 침해하고 진료 규격화에 따른 질적 하락을 초래할 수 있다.

현재도 환자의 알권리 보장을 위해 환자가 진료기록 발급을 요청할 경우 진료기록부 사본을 교부할 수 있도록 의료법에 명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환자 알권리 보장을 위해서는 진료실명제 도입이 불가피 하다는 정부의 주장은 어불성설에 불과하다.

이렇듯 진료실명제는 자칫 의사와 환자간의 갈등의 골만 깊게 하는 무의미한 제도로 전락할 개연성이 크다.

따라서 진료보다는 오히려 조제와 복약지도 과정에서 환자가 소외되는 것이 더 큰 문제이기 때문에 진료실명제 도입에 앞서 조제실명제 도입을 먼저 검토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지난해 12월부터 처방전에 병용금기나 연령금기 의약품이 포함됐는지 실시간으로 점검해 부적절한 의약품 사용을 사전에 차단하는 DUR(의약품처방조제지원시스템) 시행에 들어갔다.

그동안 의료기관에서 처방과 조제를 점검한다는 DUR 시스템을 탑재했더라도 점검은 의무사항이 아니었으나, 민주당 이낙연 의원이 DUR 점검을 의무화 하는 약사법 개정안을 지난 10월 14일 대표 발의함으로서 법제화를 시도하려 하고 있다.

발의안은 의사, 치과의사 또는 약사는 처방, 조제 또는 판매하는 의약품의 병용금기․특정연령대 금기 의약품 등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확인한 후 처방, 조제 또는 판매하도록 했으며, 보건복지부장관은 의약품의 오․남용을 방지하고 안전한 처방과 조제 및 판매를 지원하기 위해 의약품처방조제지원시스템을 구축․운영할 수 있도록 했다.

환자가 여러 의사에게 진료를 받아 다수의 처방전이 발행되면 의사나 약사는 환자가 복용하는 약을 모두 알기 어렵고 현행 점검체계는 법적근거가 없으며, 의사나 치과의사가 처방전을 작성하거나 의약품을 조제하는 경우와 약사가 의약품을 조제하거나 판매하고자 할 때 해당의약품이 병용금기 또는 연령금기에 해당하는지 확인하도록 의무를 부과해 의약품의 부적절한 사용을 사전에 차단하고자 한다는 것이 법안을 발의한 이낙연 의원의 주장이다.

물론 의사․약사에게 의약품 안전확인에 대한 의무를 선언하는 것에만 그쳐서는 DUR의 실효성이 확보될 수 없기 때문에 의약품 안전확인을 강제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에는 동감한다.

하지만 DUR의 정책목표인 약제비 절감과 국민건강보호의 실효성 확보를 위해서는 법제화 이전에 DUR 시스템에 의해 제공되는 의약품 정보를 처방 및 조제시 의․약사가 얼마나 제대로 활용하는지가 관건이기 때문에 이를 활성화 할 수 있는 대책 마련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환자가 복용하고 있는 의약품에 대한 정확한 처방 및 조제내역을 확인함으로서 국민건강권을 수호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또한 마련되어야 한다.

아울러 DUR Review에 따른 의사 업무량, 소요시간 증가 등을 감안한 DUR Fee 신설에 대한 전향적인 검토가 필요할 것이며, 제도의 실효성 확보 차원에서 과태료 부과 조항에 대한 신중한 논의도 필요할 것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이 고시하는 금기의약품에 해당하는 약을 처방하더라도 불법행위는 아니지만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병용․연령․임부금기라는 용어를 병용․연령․임부주의로 변경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보인다.

DUR이 법제화 되더라도 환자들의 개인정보에 대한 부분이 법적으로 해결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개인정보 제공범위 등에 대한 보장책을 마련해 놓지 않을 경우 의사들이 잠재적인 범죄자가 될 우려가 있는 바 이에 대한 대책 마련 또한 시급한 실정이다.

새로운 제도를 도입함에 있어서 공급자와 수요자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고 정부의 성과주의와 명분쌓기로 귀결되는 정책이라면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무의미할 뿐이다.

공급자와 수요자가 서로 상생할 수 있는 제도 설계만이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고 관계당국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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