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Book소리
[Book소리] 기억하려는 자와 잊으려는 자의 투쟁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 하윤숙 옮김 / 시공사 펴냄, 2015년

[라포르시안] 요즈음 조기 치매를 주제로 한 드라마 <기억>을 즐겨 시청하고 있습니다. 전공 분야이기도 하지만, 저 역시 피할 수 있을지 의문인지라 관심을 쏟고 있기도 합니다. 치매의 증상과 경과가 다양하기 때문에 정형화된 치료나 간병이 어렵다고 합니다. 드라마의 주인공은 잘 나가는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데다가, 수임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치매증상으로 치료받고 있는 환자의 병력을 이용했던 적이 있어서 충격이 더 했던 모양입니다. 드라마의 특성상 경과를 압축해서 빠르게 진행시키고 있어 치매에 대한 사람들의 두려움을 키우는 것 같아 걱정스럽습니다. 하지만 드라마는 기억단절, 방향감각 상실, 분노조절 장애 등 치매환자가 보이는 증상 들을 잘 녹여내고 있습니다.

기억상실에 관한 드라마를 시청하고 있는 인연 때문인지 마침 기억상실에 관한 소설을 소개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일본계 영국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파묻힌 거인>입니다. 이시구로는 1954년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1960년 영국으로 이주했습니다. 켄트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이스트앵글리아 대학에서 문예 창작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82년에 발표한 첫 작품 <창백한 언덕 풍경>은 일본을 배경으로 전후의 상처와 현재를 절묘하게 엮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1989년에 발표한 세 번째 소설 <남아 있는 나날>이 부커상을 받으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작가가 등단 후 35년 동안 여섯 편의 장편과 한 편의 단편집만을 발표해 온 것은 완벽을 추구하는 그의 성향 때문이라고 합니다. 작품 마다 독특한 주제를 다룬 이시구로는 <더 타임스>가 선정한 1945년 이후 가장 위대한 영국작가 50인에 선정될 만큼 현대 영미문학에서 중요한 작가로 꼽히고 있습니다.

<파묻힌 거인>의 무대는 고대 잉글랜드이며 시대적 배경은 5-6세기경 브리튼족과 색슨족 사이에 벌어진 정복전쟁이 끝난 뒤라고 저자는 각주에서 설명하였습니다. 판타지적 요소가 강하기 때문에 굳이 잉글랜드의 역사와 연계하여 이해하려 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참고로 브리튼족은 픽트족과 함께 브리튼섬에 살던 켈트족 원주민입니다. 픽트족은 아직까지도 기원이 모호하다고 합니다. 기원후 43년 로마의 점령 이후 브리타니아라는 이름의 로마속주가 되었습니다. 5세기 무렵 앵글로색슨족의 침공으로 지배를 받다가 프랑스의 브르타뉴지역으로 이주해나가기도 했습니다. 현재의 영국 사람들은 5세기 무렵 영국으로 이주한 고대 게르만족의 일파인 앵글로색슨족의 후예라고 합니다만, 앵글족과 색슨족에 더하여 주트족까지 포함된다고 합니다.

앵글족(Angle)은 발틱해 인접 지역에 등장하여 4~5세기 무렵에는 덴마크 제도와 독일 북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로 이동하여 살다가, 영국의 동쪽 중부로 이주해왔다고 합니다. 색슨족(Saxon)은 독일의 니더작센과 베스트팔렌 지역에 살았던 종족으로 영국 동쪽 남부로 이주해왔던 것입니다. 주트족(Jutes)은 스칸디나비아의 데인족, 스베아족과 유사한 게르만계 민족으로 덴마크 제도 북부에 살았는데, 5세기 영국 최남부 색슨 왕국 아래쪽으로 이주해왔습니다.(위키백과, 브리튼인, 앵글로색슨족 참고)

소설을 소개할 때 줄거리의 수위를 정하는 것이 가장 곤혹스러운 점입니다. 때로는 스포일러가 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해서입니다. 그래서 저는 출판사에서 공식적으로 정리하고 있는 줄거리를 인용하곤 합니다. <파묻힌 거인>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고대 잉글랜드의 안개 낀 평원, 노부부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토끼 굴 언덕 마을에 살면서 동족인 브리튼족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 이들 부부는 서로를 깊이 사랑하며 온 마음을 다해 보살피지만 자신들의 과거에 대해서는 기억하는 것이 없다. 마을을 뒤덮은 망각의 안개가 이들 부부뿐 아니라 마을 사람 모두의 기억을 앗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안개는 사람들에게서 좋은 기억도, 나쁜 기억도, 잃어버린 아이에 대한 기억도, 오랜 원한과 상처에 대한 기억도 모두 가져가버렸다.

어느 날, 안개로 자욱한 기억 저편에서 비어트리스는 문득 자신들에게 다 큰 아들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 아들을 찾아 떠나기로 결심한다. 길을 떠난 노부부는 하룻밤 묵어가기 위한 마을에서 용감한 젊은 색슨족 전사 위스턴이 도깨비들에게 납치된 소년 에드윈을 구해내는 장면을 보게 된다. 액슬은 위스턴을 보면서 자신 역시 아마도 한창 나이 때는 위스턴과 같은 전사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린다. 한편 도깨비에게 물린 상처로 인해 마을에서 쫓겨나게 된 소년은 전사와 함께 마을을 떠나 노부부의 여정에 동참하고, 이들은 곧 낡은 갑옷을 입은 늙은 기사 가웨인 경을 만난다. 액슬을 알아보는 듯한 가웨인 경은 그러나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고 비밀스러운 임무를 숨긴 채 이들과 동행한다. 힘겹게 찾아간 수도원에서는 수상한 의식이 행해지는 가운데 이들의 목숨이 위협받고, 흔들리는 바구니에 몸을 싣고 강물 위를 떠내려가다 도깨비에게 공격을 당하는가 하면, 독을 품은 염소를 끌고 산을 오르는 일도 있다.

그리고 이 위험 가득한 여행길에서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서로를 향한 사랑 깊숙한 곳에 자리한, 그동안 잊혔던 어두운 상처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 소설을 읽다보면 기억과 망각의 역할에 대하여 생각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의 과거 기억을 한 번에 통제할 수 있는 기전으로 ‘망각의 안개’를 이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안개가 많은 영국의 기후적 특성에 착안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시사철 안개로 뒤덮여만 있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안개가 없을 때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안개가 걷힐 때는 잊혀진 기억이 되살아나지 않을까요? 액슬과 비어트리스가 예전에 아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안개에 특별한 무엇이 있다고 한다면 오랜 과거의 기억 뿐 아니라 최근의 기억마저도 망각의 저편으로 보내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최근의 기억까지도 망각하게 된다면 사회적 관계는 성립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시 작가는 ‘과거의 일-설령 아주 최근 일이라도-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 마을 사람들 머릿속에 들어있지 않았다.(17쪽)’라고 설명합니다. 안개가 사람들의 기억을 지우는 역할을 한다면 왜 안개의 효과를 차단하는 물질을 찾아내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까요?

참, 액슬과 비어트리스가 살고 있는 토끼굴이라는 거주형태도 마음에 걸립니다. 작가 또한 이점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세계 다른 지역에서는 웅장한 문명들이 번성하고 있던 시대에 우리는 이곳에서 철기 시대를 간신히 벗어난 정도의 삶을 살았다는 인상을 주고 싶은 마음도 없다. (…) 사정이 그러니 어쩔 수 없다.(13쪽)” 판타지소설이라는 점을 감안해달라는 주문 같습니다.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아들을 찾아가는 길에 색슨족 마을에 들어서게 됩니다. 색슨족 사람들은 토끼굴에 사는 브리튼족 사람들과는 달리 제대로 된 마을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과거를 잊고 살아가는 이유를 알게 됩니다. 케리그라는 이름의 암용이 내뿜는 입김이 안개처럼 땅을 뒤덮고 사람들의 기억을 빼앗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케리그라는 암용을 죽이게 되면 사람들의 기억이 되돌아올 것인데, 색슨족 마을 인근의 산 위에 있는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케리그를 보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수도원에서 만난 조너스신부는 비어트리스에게 안개의 진실을 전하면서 안개에서 벗어나는 것이 반드시 좋은 일만은 아닐 수 있다고 말합니다. 안개는 좋은 기억 뿐 아니라 나쁜 기억까지 모두 덮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점에 대하여 비어트리스는 나쁜 기억 때문에 눈물을 흘리거나 분노로 몸을 떨 수도 있겠지만, 삶이 어떤 것이었더라도 함께 기억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기억이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긴 여행 끝에 등장인물들은 암용이 머물고 있는 장소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각자의 역할이 드러나게 됩니다. 늙은 기사 가웨인경은 아서왕의 조카로 암용을 보호하는 일을 맡아왔던 것이고, 위스턴은 암용을 죽이라는 색슨족왕의 밀명을 받았던 것입니다. 아서왕이 마법사 멀린으로 하여금 암용의 입김으로 망각의 안개를 만들어내도록 한 것은 망각의 힘을 빌어 끝나지 않을 전쟁을 마감하고 평화를 이끌어냈던 것입니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기억이라는 재능을 주어 만물의 영장이 되도록 했을 뿐 아니라, 망각이라는 커다란 선물을 주어 살아남을 수 있도록 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보고 들은 모든 것을 기억하게 된다면 그 기억들의 충돌로 오는 스트레스로 오래 살지 못할 것입니다.

반면 색슨족왕이 케리그를 죽이려는 목적은 다가올 정복전쟁의 길을 닦기 위함이었습니다. 케리그가 죽게 되면 묻혀있던 거인이 깨어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원한과 증오를 담은 기억이라는 거인이겠지요. 브리튼족과 색슨족은 또 다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러야 하고, 무고한 부녀자와 노약자까지도 죽음으로 몰리게 될 것입니다. 가웨인경과의 결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노쇠하여 힘을 쓰지 못하는 케리그를 죽인 위스턴이지만 오랜 세월을 브리튼족과 어울려 살아왔기 때문인지 결코 환호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브리튼족인 액슬과 비어트리스에게 멀리 떠나라고 말합니다.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아들을 찾아 토끼굴을 떠났을 때 작은 만에서 만났던 뱃사공으로부터 바다 건너 있는 특별한 섬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복잡한 세상을 떠나 조용한 삶을 보내려는 사람들이 선택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섬에 들어간 사람들은 많아도 절대로 다른 영혼을 보지 못한 채 홀로 풀밭과 나무 사이를 거닐거나 한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만이 유일한 거주자인 것처럼 행동한답니다. 부부가 그 섬에 들어가 같이 살려면 특별한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 강한 사랑의 유대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공은 그것을 확인해야만 한답니다.

사공은 가장 소중한 기억이 무엇인지를 부부로부터 따로 묻는데, 사람들은 가장 소중한 기억을 이야기할 때는 진실을 숨기는 게 힘들다고 합니다. 부부가 사랑으로 이어져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에도 사공의 눈에는 분노나 화, 심지어 증오가 보일 때도 있고, 더러는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 다른 아무것도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이 보이기도 한답니다. 진정 오랫동안 이어져온 지속적인 사랑을 보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합니다. 이렇듯 진정한 사랑을 확인하게 되면 사공은 두 사람을 배에 태워 섬으로 간다고 합니다. 이 대목에서는 책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아내 혹은 연인과의 관계를 깊이 생각해보게 될 것 같습니다.

위스턴의 조언을 들은 두 사람은 그 섬을 떠올렸던 것입니다. 그 작은 만으로 가서 뱃사공을 만났습니다. 뱃사공은 두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기억을 물었고, 두 사람의 대답은 일치했습니다. 이제는 같이 섬으로 들어가는 일만 남았는데, 암용이 죽고 안개가 걷힌 다음에 사라졌던 옛 기억이 두 사람에게 돌아오고 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그리고 두 사람은 같이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기억과 망각의 상보적 역할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보는 작품입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라포르시안  webmaster@rapportian.com

<저작권자 © 라포르시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라포르시안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