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윤희(영화감독, 산업의학 전문의)

인생에서 마음에 짐으로 남는 사건들이 다들 몇 개쯤 있을 것이다. 나는 그 많은 짐들 중 하나를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때는 2000년 여름, 한참 참의료 실천과 의권 쟁취를 위한 투쟁에 의대생들이 생전 처음 집회라는 것을 해보고, 의기투합되어 한 방향으로 돌진하고 있었던 때였다. 전 의대생이 모두 모여 있는 강의실에서 한 후배가 손을 들고 나와 조용하게 ‘이견’을 밝히기 시작했다.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나에겐 무척 인상적이었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저는 여기서 한번 외부인이 되어, 환자가 되어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고 싶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모습이 과연 모두가 100% 찬성하고 같이 나아갈 방향인지 고민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순간 강의실이 찬물을 끼얹듯 싸해졌고, 내 마음은 그 후배의 용기에, 그리고 그 말 속에서 느껴지는 진심에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분명 가운을 아직 입지 않은 예과생들과 어린 후배들 마음도 그랬을 것이란 짐작을 할 수 있었다. 정적의 몇 초 뒤 비대위원장 선배가 날선 질문을 했는데(질문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후배가 제대로 답을 못하고 어물어물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언행에서 허점이 보이기 시작하자, 얼어버린 정적을 풀려는 비수 같은 코웃음, 비웃음들이 여기저기서 나오기 시작했고, 급기야 후배는 불과 몇 초 사이에 비장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집회가 진행되는 내내 후배는 붉어진 얼굴로 힘없이 앉아 있었고 나는 그게 너무나 신경이 쓰였다. 분명 여기 모인 100여명 학생들 모두가 다 같은 생각은 아닐 텐데, 왜 그에게 지지 발언을 하는 이가 없을까. 아니 왜 나조차도 지지발언을 해주지 못 하는 걸까. 그러나 그런 고민이 무색해질 정도로 나는 소극적이었다. 집회 후 해산하는데, 어쩌다보니 그가 바로 내 앞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무리 중에 동떨어진 모습으로. 그의 어깨에 손 한번 올려주고 아무런 말없이 눈만 마주쳤더라도, 그는 덜 외로웠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마음의 짐이 앙금처럼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그를 홀로 내버려두고 말았다.

한 단체, 혹은 공동체에서 불편한 발언을 한 사람에게 되돌아가는 자연스러운 소외를 그냥 내버려두었던 것이다. 굳이 ‘우리’와 다른 입장을 취해서 불편하게 하는 이를 굳이 ‘내가’ 가까이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랬던 내가 <하얀 정글>이라는 의료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편향되게 환자의 입장, 특히 소외된 환자들의 입장을 고수하며 불편한 발언을 했다. 내 논지는 시스템을 탓하고 시장주의로 치닫는 의료 정책을 비판하지만, 콘텐츠 속에 드러나는 병원들의 실태와 인터뷰이들의 증언에 인상을 쓸 의사 선생님들이 꽤 있을 것 같다.

언론 역시 최종적인 감독의 메시지보다, 파편적인 에피소드들과 병원 고발에 치중한다. 그것이 더 대중들에게 솔깃하기 때문이다.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더 나은 지속가능한 의료체계를 만들어가는 데 발판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대중적인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그것을 공유하려면, 신문과 방송에서 소개하는 <하얀 정글>로 부족하고 때론 왜곡되기도 한다. 이 영화의 취지를 이해하려면 82분을 투자해야 할 것이다.

(의사들은) 영화를 보고나면 보기 전보다 훨씬 더 마음이 편할 것이다. 안 봐도 된다. 하지만 보지 않고 무작정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은 태도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일반인들 역시 무작정 ‘병원 도둑, 의사 장사꾼’ 하고 화풀이 대상으로 삼고 끝내는 것도 지양해야 할 것이다. 한미 FTA 국면을 맞은 지금, 가장 위기에 처할 의료에 대중적인 관심과 밑으로부터의 운동이 필요하다. 이는 의사, 환자, 일반인 너나 할 것 없는 모두의 실생활과 연관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얀 정글>은 초보 감독의 작품이다. 허접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로 논쟁만 하기에는 시간이 아깝다. 비판은 하되, 그걸 토대로 나아갈 대안을 모색해보자. 12월 1일 이 영화가 개봉한다. 그날 FTA 반대 집회가 있다면, 집회부터 가길 바란다. 

송윤희는?

2001년 독립영화워크숍 34기 수료2004년 아주대학교 의과대학 학사2008년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석사2009년 산업의학과 전문의2011년 다큐멘터리 하얀 정글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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