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지음 / 이정미 옮김 / 리더북스 펴냄, 2014년

[라포르시안] 지난달 소천한 이탈리아 철학자이자 소설가 움베르토 에코는 ‘지적인 휴가를 보내는 방법’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여행 중에 여행에 관한 책을 읽는다는 건 매우 흥미가 넘치는 경험이 아닐 수 없다.”(움베르토 에코 지음, 연어와 함께 여행하기 45쪽, 열린책들, 1995년)라고 했습니다. 굳이 여행에 관한 책이 아니더라도 여행 중에 책을 읽는 것은 절대로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휴가뿐 아니라 출장길에도 책을 몇 권 들고 가는 이유는 비행기나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의 지루함을 덜 수 있을 뿐 아니라, 비행기나 버스를 타는 동안 특별하게 할 일이 없어 멍 때리는 시간을 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에코의 말을 조금 비틀어서 ‘휴가를 지적으로 보내는 방법’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주목적은 여행이고, ‘지적(知的)’으로 보완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부작용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점점 들고 가는 책이 많아지게 되고, 기왕 가지고 갔으니 모두 읽어야겠다는 사명감이 끓어오르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행보다도 책읽기에 매몰될 수도 있으니 적당한 수준으로 타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뚱딴지 같이 여행과 책읽기를 서두에 꺼내는 것은 지난 달 남미를 여행하면서 들고 갔던 <삶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들>을 드디어 소개하기 때문입니다.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삶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들>은 그가 남긴 <명상록>을 우리말로 옮긴 것입니다. 그리스어로 ‘자기 자신에게’라고 달았던 원제목의 뜻을 살린 제목으로 생각됩니다. 2천년에 가까운 옛날에 거대한 제국을 다스렸던 황제가 남긴 말들이 오늘날까지도 삶의 지표가 될 수 있는 것은 삶의 본질에 대하여 천착했던 그의 고민이 얼마나 깊은 것이었나를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하지만 그가 로마의 황제가 되는 과정은 그리 순탄치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철인황제(哲人皇帝)라고 부르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21-180)는 로마의 전성기라고 하는 오현제시대(AD96~AD180년)의 마지막 황제입니다. 로마제국은 황제가 다스렸지만 제국 이전의 정치형태였던 공화정의 정신이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통상적으로는 제국의 황제는 적통의 자식이 제위를 이어가는 방식을 취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 시절 로마제국은 황제가 자질이 있는 자를 아들로 입양하여 제위를 물려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식이 아니면서도 자식인 셈입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서기 121년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와 도미티아 루킬라의 아들로 로마에서 태어났습니다. 3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죽자 세 차례 집정관을 연임한 할아버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베루스에게 입양되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범상치 않은 싹을 보였던 그는 하드리아누스황제의 눈에 띌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집안이 플라비아누스 황제(69~96) 재위시절 황제를 중심으로 사회 및 정치권력이 집결되던 새로운 로마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몇몇 집안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제위를 계승하기로 정해져 있었지만 그가 어떻게 황제에 즉위하게 되었는가는 여전히 신비에 싸여 있다고 합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하드리아누스황제의 기획에 따라 오랫동안 황제가 되기 위한 공부를 했던 것으로, 이런 과정은 제위기간동안 통치에 반영되었던 것입니다. 서기 161년 그가 로마제국의 제16대 황제의 제위에 올랐을 때 황위 계승권을 나누고 있던 양제(養弟) 루키우스 베루스에게 강권하여 공동 황제로 즉위토록 하였습니다. 동등한 법률상 지위와 권력을 공식적으로 나누는 공동 황제가 로마제국 사상 최초로 탄생한 것입니다. 하지만 169년 질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루키우스 베루스가 공동 황제로서 한 역할은 두드러지지 않았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제위기간 로마 사회는 안팎으로 불안했습니다. 재위 첫해부터 본국과 주변에 기근과 홍수가 있었고, 제국의 동방으로 침입한 파르티아를 격퇴하러 출정한 1개 군단이 궤멸하는 바람에 아르메니아 왕국이 점령당했습니다. 하지만 2년 뒤에 반격에 나서 아르메니아 왕국을 탈환하였고 다시 3년 뒤에는 티그리스강을 건너 파르티아를 공격하여 격파하였습니다. 168년에는 게르만족과의 전쟁이 발발해서 진퇴를 반복하다가 6년이 지나서야 강화협상이 타결되었습니다. 게르만족과의 전쟁은 제국의 군사나 재정면에서 취약점을 드러냈지만, 이를 해결할 묘수가 없어 임시방편의 수단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제국이 쇠퇴기에 접어드는 신호였던 것입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앞선 황제들과는 달리 친아들 콤모두스를 후계자로 지목하였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금욕과 절제를 주장하여, 에픽스테토스, 세네카와 함께 스토아학파를 대표하는 철학자로 꼽힙니다. 인간의 욕망이 민낯으로 부딪히는 전장을 누비면서 인간과 인간의 삶에 대한 사유에 빠질 수밖에 없었을 철학자 황제는 사유를 통하여 정리된 것들을 12편의 <명상록>으로 남겼습니다.

그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 ‘학문의 목적은 무엇인가?’, ‘행복은 무엇인가?’, ‘죽음은 무엇이고, 그 대척점으로서 삶은 무엇인가?’, ‘삶에서 필연은 무엇이고, 우연은 무엇인가?’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주로 철학의 영역에서 답을 구하는 질문들입니다. 앞서 적은 것처럼 철학자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을 구하려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기록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배워온 과정을 적은 제1권은 ‘나는 할아버지 베루스에게서 훌륭한 품행과 노여움을 다스리는 법을 배웠다.915쪽)’라고 시작하는 것처럼 일인칭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인간의 보편적인 삶에 관한 것들을 적을 때는 이인칭을 주로 사용하였습니다. ‘나의 영혼이여, 그대는 자신에게 잘못을 저지르고 자신을 혹사시키는구나. 그러다가는 더 이상 자싱의 명예를 되찾을 은총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한 번밖에 살지 못하고 그 짧은 인생도 거의 끝나가지만, 그대의 영혼은 스스로를 존중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말에서 축복을 찾으려고 하다니!(34쪽)’

몇 쪽씩 할애하여 긴 호흡으로 읽어야 하는 내용도 있지만, 대부분의 생각들은 짧게 압축되어 있습니다. ‘기억하는 사람이든 기억되는 사람이든 모든 것은 연기처럼 흩어지고 사라진다.(71쪽)’라는 경구처럼 한 줄에 불과 한 것도 많고, 심지어는 ‘자연은 모두에게 유익한 것만을 제공한다(62쪽)’라는 말처럼  한줄도 채우지 못하는 것도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때로는 ‘얼마나 음흉하고 비겁하고 완고한 인간인가! 짐승이나 어린에처럼 우매하고 나태하고 변덕스럽고 야비하고 교활한 폭군.(69쪽)’이라고 적은 대목을 보면 황제에 대한 경구라고 보이기 때문에 <명상록> 자체가 황제를 위한 교과서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위에 적은 ‘폭군’은 아마도 네로를 말하는 것으로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명상록> 자체가 스스로를 다스려 바른 길로 이끌기 위한 자기 성찰을 적은 것이라고 한다면, 어쩌면 스스로가 폭군의 길로 접어들지 않도록 강하게 경고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편이 옳을 것 같습니다. ‘오만하고 불행한 자들의 의견을 수용하지 마라. 그들의 의견이 그대를 지배하지 않도록 삶을 참된 관점에서 바라보라(62쪽)’라는 대목이 좋은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삶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들>은 배움, 인생, 운명, 죽음, 인간 본성, 자연의 이치, 이성, 선과 악, 순응하는 삶, 사회적 존재, 영혼, 도덕적 삶 등을 주제로 하여 모두 12편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아마도 같은 주제를 두고 사유를 거듭하였을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생전에 황제가 남긴 명상록을 후대 사람들이 주제별로 구분하여 엮은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따라서 이 책을 처음부터 읽는 것도 좋겠습니다만, 관심이 가는 주제를 집중해서 읽는 것도 좋은 책읽기가 될 것 같습니다. 죽음에 관한 내용 가운데, ‘제단 위로 많은 유향 방울이 떨어진다. 어느 것은 먼저, 어느 것은 나중에 떨어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떨어지는 것 가체로는 별 다른 차이가 없다.(63쪽)’라고 적어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는 개념을 완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육체는 물론 영혼마저도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자리를 마련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사라지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영혼불멸을 강하게 부정하고 있어 종교로까지 승화시키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영혼불멸을 믿을 수 없었던 이유를 황제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만일 사후에도 영혼이 살아있다면 우리를 감싸는 대기는 태고 이래로 죽은 자들의 영혼을 수용할 공간을 어떻게 마련하겠는가?(65쪽)’ 그리고 질문에 대한 황제의 생각이 이어집니다. 책을 찾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죽음은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는 점을 이야기하면서 히포크라테스를 인용하기도 합니다만, 의사가 하는 일에 대하여 언급한 대목이 딱 하나 있습니다. ‘만일 선원들이 선장의 말을 따르지 않거나, 환자가 의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선장이 배에 탄 선원들의 안전을 어떻게 도모하고, 의사는 환자의 병을 어떻게 고칠 것인가?(123쪽)’ 과거와는 많이 달라진 의료현장의 분위기를 개탄하는 의료인들에게는 달콤하게 들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의사와 환자 사이의 신뢰관계란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를 따지는 문제가 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즉 환자의 신뢰를 얻기 위하여 무엇을 보여주었는지 자신을 되돌아보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요? ‘설득을 통해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려고 노력하라. 그대가 정의의 원칙을 준수하겠다면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는 행위라도 감행하라(122쪽)’라는 대목을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보니 드라마 <태양의 후예>의 장면들이 생각나게 됩니다.

독립된 주제로 구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명상록>에는 유독 죽음과 운명에 관한 기록이 많습니다. 옮긴이는 그 이유를 ‘(죽음은) 스토아 철학의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아우렐리우스를 비롯한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죽음이란 고통이나 종말이 아니라 해체와 소멸이라는 자연의 작용에 불과하다(270쪽)’라고 설명합니다. 생노병사로 이어지는 인간의 삶에서 죽음은 한 순간이지만 죽음은 어느 순간이라도 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삶의 전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따라서 죽음을 극복하는 순간 삶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요? <명상록>에 실려 있는 황제의 금과옥조와 같은 말씀도 물론 좋습니다. 하지만 말미에 붙인 옮긴이의 작품해설 속에 있는 한 구절이 바로 보석이라는 생각이 들어 옮겨봅니다. “우리를 행복이나 불행으로 인도하는 것은 운명이 아니라 운명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도다. 우주의 사건들은 일어나야 할 방식대로 일어난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요, 운명이다. 인간이 여기에 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다. 하지만 어떤 운명이 닥치든 초연하고 담담하게 대처할 수는 있다. 그것은 철학하기를 통해서다. 철학은 자기구원을 위한 수행인 셈이다.(271-272쪽)”

황제는 매일 밤 잠들기 전에 자신이 보낸 하루를 돌아보고 스스로 정한 원칙대로 행하였는지를 점검했을 것입니다. 전장을 누벼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힘들고, 언제까지 번영을 누릴 것만 같던 로마제국이 예전과는 다르다는 손에 잡히지 않는 위기감이 옥죄어 오는 가운데서도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하여 <명상록>을 꾸준하게 써내려갔던 것입니다. “마치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하루하루를 살아라. 절대로 격노하지 말고, 절대로 냉담하지 말고, 절대로 위선적인 행동을 하지 말라. 그것이 바로 도덕적인 인격을 완성하는 길이다.(148쪽)”라고 적은 것처럼 말입니다. 황제를 따라 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드시는 분이라면 황제가 남긴 <명상록>을 하루 한쪽씩 꼼꼼하게 읽고 잠자리에 드시는 것은 어떨까요?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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