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료기술 의료기기 허가·평가 통합 추진…“안전성 확보 안 된 의료기기 빨리 사용토록 하면 국민에 피해”

▲ 박근혜 대통령이 17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제9차 무역투자진흥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 출처: 청와대 홈페이지

[라포르시안] 그 이유를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새로운 의료기술이 적용된 의료기기가 임상현장에서 환자 치료에 사용되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한다.

개발이 끝난 후 먼저 식품의약품안전처로로부터 의료기기 허가를 받고, 보건복지부(한국보건의료연구원)로부터 신의료기술평가 대상인지 확인을 받아야 한다. 기존과 다른 새로운 의료기술로 확인되면 보건의료연구원(NECA)을 통해 안전성과 유효성을 검증받는 절차를 통과해야만 급여, 혹은 비급여로 실제 의료현장에서 사용될 수 있게 된다.

정부가 규제 완화 차원에서 기존에 없던 새 의료기술이 적용된 의료기기가 시장에 진입하는 기간을 크게 단축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지금까지 따로따로 진행하던 의료기기 허가와 신의료기술평가를 동시에 추진하는 '패스트 트랙'(Fast track) 방식으로 제품 개발 이후 허가를 받고 시장에 진입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대폭 줄이기 위해서다.

작년 11월 발표한 제4차 규제개혁장관회의에서 다뤄졌던 ‘신의료기술평가 간소화·신속화’의 후속조치로 추진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의료기술이 적용된 의료기기의 시장진입이 빨라지는 효과만큼 기존 기술과 비교했을 때 비용대비 효과 검증이나 안전성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임상에 적용돼 환자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이런 식의 신의료기술평가 간소화와 신속화가 당장은 의료기기 시장진입을 촉진하는 효과를 낼지 몰라도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국내 의료산업 발전과 해외시장 진출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 헬스케어산업을 육성하자고 공정한 과정과 안전비용을 무시하는 '압축성장' 식의 정부 주도 육성정책이 추진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가면 한국경제가 60년대 이후 산업화를 통한 고도의 압축성장을 달성한 이후 겪게 되는 온갖 부작용이 의료산업 분야에서 재현될 가능성이 높다. <관련기사: 의약품·의료기기 ‘패스트 트랙’,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복지부 "신의료기술 의료기기 허가기간 1년에서 5개월로 단축"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이달 22일부터 의료기기 허가와 신의료기술평가 통합운영 시범사업이 실시된다.   이 시범사업은 시장 진입을 위해 허가와 신의료기술평가가 모두 필요한 의료기기를 대상으로 한다. 업체가 식품의약품안전처에 통합 신청서를 제출하면 의료기기 허가와 복지부의 신의료기술평가가 동시에 시작된다.  신청서 제출 이후 한국보건의료연구원이 식약처에 의료기술에 대한 자료를 제공하고, 식약처는 신의료기술평가위원회에 참석해 의료기기에 대해 설명하는 등 상호 의견 교환을 통해 검토내용을 조율한 후 하나로 도출된 최종결과를 식약처가 업체에 회신한다.  통합운영이 이뤄지면 의료기기 허가 후에 신의료기술평가가 순차적으로 실시되던 기존 방식과 비교해 허가 및 평가를 거쳐 시장진입까지 총 80~140일이 소요된다. 기존 절차에 따라 소요되는 기간(총 1년)과 비교하면 최대 9개월이 단축된다고 한다.

 

신의료기술평가 간소화·신속화 정책의 가장 큰 문제는 신의료기기의 조기 시장진입이란 목적을 위해 복지부 스스로 신의료기술평가에 기반한 근거중심의학 활성화에 역행하는 정책을 추진한다는 점이다.

복지부는 의료제도나 건강보험 정책의 결정과정에서 근거중심의학 기반의 정책 결정을 강조해 왔고, 신의료기술평가제도 역시 그런 맥락에서 도입됐다. 

신의료기술평가제도를 도입한 가장 큰 목적은 의학적으로 안전성과 유효성이 검증되지 않은 의료기술로부터 국민의 건강권을 보호하고 신의료기술의 발전을 촉진하는 데 있다. 

하지만 복지부는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보건의료산업 투자활성화를 명분으로 신약이나 신의료기술이 적용된 의료기기의 신속한 시장진입을 위해 안전성과 유효성 검증절차를 간소화 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지난 2014년 8월 발표한 6차 투자활성화 대책을 통해▲상업 임상 1상을 면제할 수 있는 연구자 임상 인정범위를 모든 줄기세포 치료제로 확대 ▲유전자 치료제 연구 허용 기준 완화 등을 제시해 의료윤리마저 저버린 정책이란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번에 발표한 신의료기술평가 간소화·신속화 정책 역시 국민 건강보다 의료기기 관련 업계의 이익에만 초점이 맞춰졌다. 그래서 이번 조치로 심사 기간이 단축되면서 안정성 검증에 소홀해질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게다가 복지부는 오는 7월부터는 의료기기업체가 의료기기 허가시에만 사용하던 임상시험 자료를 신의료기술평가에도 활용할 수 있도록 추진할 방침이다.

이 방안은 신의료기술평가 도입 취지에 크게 어긋난다. 신의료기술평가는 체계적인 방법론을 사용해 수행된 출판된 임상연구문헌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의료기술의 안전성과 유효성을 검증하는 것이다. 업체가 의료기기제품 허가를 위해 식약처에 제출한 임상시험 결과를 신뢰할 수 있는지 다시 한번 평가한다는 의미도 갖고 있다.

이런 취지와 달리 의료기기제품 연구개발을 위한 임상시험 자료를 신의료기술평가에 활용한다는 것은 안전성과 유효성 검증의 신뢰를 떨어뜨릴 수 있다.      

▲ 2009년 3월 열린 한국보건의료연구원 개소식 모습.

"섣부른 신의료기술평가 간소화, 장기적 관점서 국산 의료기기 발전과 신뢰 떨어뜨려"무엇보다 안전성이 명확히 검증되지 않은 신의료기기를 임상현장에 적용할 경우 추후 환자안전이나 비용효과성이 떨어지는 문제가 제기되면 신의료기기의 시장 진입은 더 힘들어질 수도 있다.

안전성과 유효성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진료현장에서 오히려 사용을 꺼릴 수도 있고, 시장진입 이후 문제가 발생할 경우 추후 다른 신의료기기의 시장진입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보건의료원의 자료에 따르면 2011년부터 2013년까지 총 29건의 의료기기 관련 신의료기술평가 신청이 접수됐으며, 이 중에 신의료기술로 인정받은 경우는 45%인 13건에 불과하다.

안전성과 유효성 측면에서 검증이 안 된 의료기기가 35%인 10건에 달하고 환자치료에 있어서 안전성이 확보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보건의료연구원은 지난 2014년 국회에 제출한 서면답변을 통해 "신의료기술평가를 간소화 하는 것이 의료산업 발전 측면에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하지만 의료의 경우 공익적 성격이 강하여 철저한 검증 절차가 필요하다"며 "식약처의 의약품 및 의료기기 인허가 심사는 대부분 해당 제품의 인허가 목적 달성을 위한 제한적 범위 내에서의 안전성·유효성에 대한 검증이 이뤄지고 있어 보편적 임상적용이 가능한지 여부에 대한 판단기전이 필요하다"고 우려를 표시했다.

보의연은 "이를 위해 사후 신의료기술의 보편적 임상 적용을 위한 안전성·유효성 및 임상적 유용성을 평가하는 신의료기술평가를 반드시 수행해 국민건강을 보호하는 역할을 강화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며 "안전성이 확보되지 않은 의료기기를 빨리 사용토록 하면 그 부담은 전부 국민에게 전가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제도가 도입 취지에 맞게 실행되려면 보의연의 담당 인력이 증원돼야 한다. 그러나 신의료기술평가 사업이 보의연의 업무량 과다로 제대로 된 평가를 하기 힘들다는 지적이 제기된 바 있다.

지난해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보의연의 신의료기술평가 신청은 지난 2011년 174건에서 2014년 273건으로 1.4배가량 증가한데 반해 평가인원은 그대로다.

보의연은 연구인력 증원은 예산확보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에 증원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신의료기술평가 간소화와 신속화에 따른 시장진입 기간 단축이 부실한 평가 검증으로 이어질 우려도 배제할 수 없다.

대한의사협회 관계자는 "신의료기술평가 간소화 등의 정책은 무분별한 의료기기 허가로 국민들의 불필요한 의료비 지출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고, 의료기기업자들은 수익을 내지만 안전성이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의료기기로 인해 발생하는 소비자의 피해 역시 시장의 책임으로 돌릴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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