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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축성장 신화’의 질곡에 빠진 한국 의료전달체계세계 최단기 전국민 건강보험 달성에 따른 심각한 부작용…강제적 병상수급 조절 정책 필요성 제기

[라포르시안] '빨리 빨리'로 상징되는 압축성장 문화는 한국 사회의 모든 분야에 걸쳐 피로와 부작용을 남겼다.

의료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경제가 60년대 이후 산업화를 통한 고도의 압축성장을 거친 이후 겪게 되는 온갖 부작용이 의료 분야에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다.

특히 속도전으로 추진된 의료보장 제도의 확립과 의료인프라 확충 과정에서 제대로 된 의료전달체계를 정립하지 못한 탓에 심각한 부작용을 겪고 있다. 

한국은 국민의 의료접근성을 가장 빠르게 개선한 국가로 꼽힌다. 1977년 의료보험제도가 도입된 이래 10여년 만에 전국민 건강보험제도를 완성했다. 어느 나라에서도 전례를 찾아보긴 힘든 기록이다.

20~30년의 짧은 기간에 의료기관과 의료인력 등의 핵심 의료자원을 압축적으로 확충했고, 지금은 과잉공급에 따른 부작용이 더는 방치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무엇보다 의료전달체계는 더는 손쓰기 어려울 만큼 엉망이다. 동네의원은 1차 의료기관으로서 게이트키퍼 역할을 상실한지 오래다. 짧은 시간에 많은 환자를 보는 '박리다매 진료'와 비만과 성형 등의 비급여 진료에 매달려야 생존할 수 있는 상태에 놓였다. 

서울시 전체 성형외과의원의 2/3 이상이, 피부과의원의 절반이 '강남 3구'에 몰려 있는 상황은 한국 일차의료의 피폐한 현실이다.

대학병원은 끊임없이 병상을 확충하면서 몸집을 부풀리는 식의 성장을 지속해 왔다.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진 몸집을 유지하기 위해 동네의원의 감기 환자까지 빼앗아오는 지경에 내몰렸다.

이제는 터무니없이 커진 병원 규모를 유지하기조차 힘든 상황이지만 생존을 위해서는 규모의 경쟁을 멈출 수 없는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병상의 과잉공급으로 인한 무한경쟁이 펼쳐지는 의료환경에 외형성장을 멈추는 순간 생존경쟁에서 도태되기 때문이다.  

동네의원과 대형병원으로 이어지는 의료전달체계의 허리 역할을 담당해야 할 중소병원은 그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다. 갈수록 줄어드는 환자와 그에 따른 경영난으로 의료인력 확보마저 힘들어졌다. 그런 상황이 지속되면서 경쟁력은 더욱 떨어지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졌고 급기야 폐업으로 내몰리고 있다.

100~200병상 중소형 병원이 '병상 공급과잉' 주도…"300병상 미만 신규 진입 금지" 

과잉공급 상태의 병상을 적정 수준으로 조절하고 붕괴된 의료전달체계를 재정립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지난 28일 국회에서 그 방법을 찾기 위한 자리가 마련됐다. 한국보건행정학회(회장 김창엽)와 더불어민주당 김용익 의원 공동주최로 '병상 공급의 관리와 의료전달체계'를 주제로 한 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토론회에서 나온 제시된 방안은 명확했다. 병상 공급 관리와 이를 통한 의료전달체계 확립을 더는 시장의 기능에 맡겨서는 안되며, 정부 차원에서 인위적인 병상수급 조절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방안으로 신규 의료기관 진입을 규제하고, 기존 의료기관의 퇴출 기전을 마련하는 정책을 제시했다.

토론회 주제발표를 맡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료관리학교실 이진석 교수는 90년대부터 최근까지 병상 공급 추이 분석결과를 바탕으로 병상자원 관리정책의 방향을 제시했다.

이 교수가 분석한 자료를 보면 국내 병상 공급 주조는 총량은 '과잉' 상태이지만 규모의 경쟁력을 갖춘 적정 규모 수준의 병원은 '부족'한 상태이다.

이 교수는 "통상 300~400병상 이상 규모를 갖춰야 병원이 규모의 경제를 충족하는 것으로 알려졌다"며 "그러나 전체 급성기 병상의 34%만이 300병상 이상 규모의 병원에서 공급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보건복지통계연보를 기반으로 병상공급 추이를 분석한 결과, 2000년부터 2014년까지 15년 동안 증가한 병상 18만,4272개 가운데 병원급의 병상 수가 13만1,266개로 약 71%를 차지했다.

눈에 띄는 대목은 지역별 병상 공급 추이에서 서울과 부산 등의 대도시보다 전남, 경북 등의 농촌 지역의 병상 증가율이 더 높았다는 점이다.

1990년 대비 2013년의 지역별 병상 공급 증가율은 서울과 부산은 각각 199%, 200%인 반면 전남은 428%, 경북은 324%에 달했다. 또 수도권(300%)보다 비수도권(317%)의 병상 증가율이 더 높았다. 이런 현상은 농촌이나 지방 시군단위 지역을 중심으로 중소형 병원의 신규 개설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100~200병상 규모의 중소형 병원이 급증하면서 과잉경쟁으로 내몰렸고, 병상을 채우기 위해 불필요한 과잉진료와 입원환자의 긴 재원기간, 이로 인한 의료의 질 하락이 초래됐다. 중소형 병원은 낮은 수익구조 탓에 의료인력 확충에 애를 먹고 시설 투자가 위축되면서 의료의 질이 떨어져 환자가 감소하는 악순환 구조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특히 지방과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중소형 병원이 급증하고 300병상 이상 종합병원은 오히려 부족한 상태가 되면서 의료이용은 증가했지만 응급실과 중환자실 등의 필수의료와 적정 진료 환경은 개선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런 문제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이 건강보험 빅데이터와 국토교통부의 공간정보 빅데이터를 융합해 구축하고 잇는 '환자의료이용지도(KNHI-Atlas)'를 통해서도 확인된 바 있다.

작년 12월 건보공단이 주최한 '의료이용지도 활용 방안' 모색을 위한 심포지엄에서 공개된 병상공급이 의료이용과 사망률에 미친 영향을 파악한 세부과제 결과를 보면 권역내에 '500병상 종합병원 병상 비율'에 따라서 의료이용량과 질에 큰 격차를 보였다.

즉, 500병상 종합병원 병상 비율이 20% 이하일 경우 20% 이상인 경우와 비교해 입원건수를 더 많이 증가시키는 것으로 나타났고, 사망률에 있어서도 큰 차이를 보였다.

▲ 이미지 출처: 의료이용지도 구축 관련 서울의대 의료관리학연구소 컨소시엄의 연구결과 발표자료 중에서.

이진석  교수는 "지방에서 이뤄진 병상 증가가 주로 중소형 병원 위주로 이뤄져 환자의 기대와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지방환자의 수도권 집중과 의료취약지 접근성 문제를 초래한다"며 "또한 중소형 병원이 동네의원과 외래환자를 놓고 경쟁을 벌이는 구조로 인해 의료전달체계 확립이 더욱 어려울 것"으로 전망했다.

이런 문제를 풀려면 300병상 미만 중소형 병원의 신규 진입을 억제시키고, 규모의 경쟁을 갖추지 못한 기존 병원은 퇴출할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이 교수는 "병상 과잉을 주도하는 중소형 병원의 신규 진입을 억제하고, 기존 중소형 병원은 규모의 경제를 충족하고 병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차원의 합리적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며 "이를 위해 중앙정부 차원에서 병상 수급 조정 기능을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지자체에서 제출한 지역병상수급계획이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을 경우 보건복지부 장관이 '조정을 권고할 수 있다'고 규정돼 있는 것을 '조정해야 한다'는 의무로 변경하고, 병상 공급 과잉 지역의 신규 병상이나 대형병원의 신증설은 중앙정부가 사전승인토록 하는 법개정 방안을 제시했다. 사실상 '병상총량관리제'를 강력하게 시행하자는 것이다.

특히 병원의 병상 기준을 '300병상 이상'으로 상향해 규묘의 경쟁을 갖추지 못한 중소형 병원의 신규 진입을 막고, 기존 300병상 미만 병원 간의 인수합병 허용과 중소형 비영리법인 병원의 청산 촉직을 위한 규제 완화를 한시적(5년)으로 시행할 것도 제안했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 박수경 연구원도 외국의 병상자원 공급관리 정책을 소개하면서 "우리나라의 경우 2000년대 중반부터 최근까지 300병상 미만의 병상 증가가 전체 병상수 증가를 주도했다"며 "외국처럼 병상총량제한제와 병상기준 재설정 등의 규제를 통한 병상수급 구조의 변경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 연구원은 "정보의 비대칭성과 '수요공급의 법칙'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특수성을 감안하면 외국의 사례처럼 병상자원과 공급 적정화를 위해 의료기관의 진입기준 강화와 퇴출기전 마련, 수가제도 개선 등 정부 차원의 거버넌스가 확립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복지부 "지금은 규제개혁 강조하는 시기라 신중해야"

의료계는 의료전달체계 확립을 위한 병상 규제 정책의 필요성은 공감하지만 방법에 있어서는 우려를 표명했다.

이날 토론회에서 참석한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최재욱 소장은 "의료전달체계 확립의 저해요인으로 제시된 문제점은 정부의 기본정책 부재로 인한 결과"라며 "한국의 의료공급체계와 의료비 지불제도를 고려할 경우 병상공급 관리를 비롯한 의료전달체계를 단기간에 정리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최 소장은 "병상자원 관리 정책은 병상을 운용하는 병원만을 대상으로 하는 정책이 아니라 의료공급체계 전반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며 "일차의료가 강화돼 정상적인 기능과 역할을 담당할 경우 병원으로 환자 집중과 재원일수의 증가를 억제할 수 있다"고 말했다.

병상 자원의 공급 적정화를 위해서는 지역별 병상총량제가 아니라 정부가 공공병원과 취약지 민간병원에 대한 투자와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대한병원협회 조한호 보험위원장은 "병상총량 관리를 통한 신증설 억제나 감축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현행 제도의 문제점으로 언급되는 자원의 중복투자 방지나 과잉진료가 개선될 것으로 예측하는 것은 타당성이 부족해 보인다"며 "의료자원 재분배와 의료취약지 문제를 제고하기 위해서는 지역의 공공의료 인프라 확대와 취약지에 민간병원이 들어올 수 있도록 대대적 지원책을 수립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조 위원장은 "300병상 미만 병원의 신규 진입 금지는 의료전달체계의 정립을 통한 효율적 의료제공을 보장하기보다 오히려 의료전달체계의 문제점을 양산하고 왜곡시킬 가능성도 내포하고있다"며 "환자의 의료이용 모습을 고려해 보면 중소형병원 진입 규제가 현재 병원 및 종합병원의 기능을 의원급 의원료기관에 이양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말했다.

복지부는 병상자원 공급관리 차원의 진입 규제에 대해서 난색을 표했다.

복지부 보건의료정책과 이형훈 과장은 "지금은 규제개혁을 강조하는 시기이다. (300병상 이상 병원만)신규 진입을 허용하는 것은 파격적인 규제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김상기 기자  bus19@rapport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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