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포르시안]  정말로 지치지도 않는다. 이렇게 쉼없이 논쟁을 이어갈 수 있도록 만드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한의사의 현대의료기기 사용 허용을 둘러싼 의료계와 한의계 간 다툼을 지켜보면서 든 생각이다. 지난 12일에는 한의사 단체 수장이 공개적으로 골밀도측정기 시연을 하면서 "나부터 현대의료기기를 사용할테니 보건복지부는 나를 먼저 잡아가라"고 호기롭게 말했다.  그러자 의사단체에서는 "​엉터리 시연 후 당위성을 주장하는 막무가내식 한의협은 국민 앞에 석고대죄하라"고 맞받았다.

이런 상황이 하루이틀 일은 아니다. 의사와 한의사로 이원화된 면허체계 속에서 지난 수십년 간 의료계와 한의계, 의사와 한의사는이 문제를 놓고 다툼을 벌여왔다. 2014년 말 정부의 '규제 기요틴' 과제 발표가 양 측의 묵은 갈등에 불을 붙였다.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8개 경제단체의 건의로 현대의학에서 사용하는 의료기기 중 일부를 한의사가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자는 것이 규제 기요틴의 핵심이다. 정부는 한의사의 현대의료기기 사용을 허용할 경우 '한방산업 활성화 및 양한방 협진을 통해 의료서비스 품질이 제고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를 '경제적 효과'라고 주장했다. 한의사의 현대의료기기 사용을 허용하려는 저변에 경제적 효과에 대한 기대감이 깔려 있다는 의미다.

얼마나 큰 경제적 효과가 창출될 지 구체적으로 연구한 결과는 찾아보기 힘들다. 막연하고 모호한 기대감이다. 이를 건의한 경제단체의 노림수가 어디에 있는지 짐작은 간다. 이유야 어찌 됐든, 이를 계기로 작년부터 의료계와 한의계가 죽기 살기로 싸우고 있다. 양 단체의 수장이 단식을 하고, 정치권이 나서고, 급기야 협의체도 만들어졌지만 소용없었다. 양 쪽의 다툼 속에서 흥미로운 대목이 하나 있다. 한의사의 현대의료기기 허용을 주장하는 한의계나 이에 반대하는 의료계가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게 바로 '국민건강을 위해서'란 거다. 국민건강을 위해서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과 국민건강을 위해서 허용하면 안 된다는 주장이 맞붙었다. 이런 모순이 있을까 싶다. 혹시 서로 다른 국민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마저 든다.

어쨌든 나쁠 건 없다.경제적 효과와 국민건강 때문이라니. "보다 효율적이고 과학적인 진료를 위해 한의사가 진단기기를 활용하는 것은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기 위한 의료인으로서 당연한 의무이자 권리"라고 한의계는 말한다. 그래서 짚어봐야 한다. X레이와 초음파 진단기기 등의 현대의료기기를 현대의학과 학문체계가 다른 한의학 분야에서 환자 진단에 적용하는 게 의학적, 혹은 한의학적 근거나 타당성을 가질 수 있느냐는 점을 말이다.

역으로 짚어보자. '한방 의료기관에서는 왜 한의학적 원리를 적용해 개발한 한방진단기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는가' 하는 점을. 예전부터 한방의 과학화라는 목표 아래 한의학적 원리를 적용한 맥진기나 양도락기, 경락진단기 등이 개발됐다. 이런 장비를 두고 왜 하필 현대의료기기를 고집하는 걸까. 한의학적 원리를 적용해 개발한 한방진단기기에 대해서 한의사들이 어떤 인식을 갖고 있는지 살펴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한국한의학연구원과 한의과대학 등에서 연구한 바 있다. 20123년 3월 대한한의학회지에 게재된 '한방의료기기 사용 현황 및 개발 수요에 대한 조사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이 있다. 이 논문은 상지대학교 한의대 진단생기능의학교실 연구팀은 2012년 한의사협회 회원 1만3,957명(응답자 1,22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됐다. 논문에 따르면 현재 보유하고 있는 진단용 한방의료기기의 주요 불만사항에 대한 조사에서 '낮은 재현성 또는 낮은 신뢰도'라고 답한 경우가 25.1%, '불확실한 유효성'이라고 답한 경우가 16.3%로 나타났다. 많은 한의사들이 한방진단기기를 통해 측정한 결과의 정확성과 재현성을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음을 짐작게 한다. 

의료기기 구매시 가장 고려하는 요소에 대한 조사에서 '유효성이 검증된 바 있는지 유무'라고 답한 경우가 35%, '재현성이 검증된 바 있는지 유무'라는 응답이 20.2% 등이었다. 이런 결과는 지금까지 개발된 한방진단기기를 이용한 측정치의 정확성과 재현성에 대한 신뢰도가 낮음을 의미한다. 이보다 앞서 한국한의학연구원이 실시한 조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한의학연구원이 2004년 한방병의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방임상 사용 의료기기 성능평가 연구'에 따르면 응답기관의 53%가 진단기기에 불만족한다고 답했고 만족한다는 답변은 21%에 그쳤다. 불만족의 이유로는 한방진단기기의 결과를 임상에 그대로 적용하기 어려워서라는 답변이 98%에 달했다. 나머지 2%는 측정방법 및 결과에 신뢰성과 재현성이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재현성(reproducibility)은 과학의 가장 큰 특징이자 핵심 가치이다. 지금까지 개발된 한방진단기기가 한의사로부터 외면받은 이유의 핵심은 재현성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한의학적 이론을 임상에서 재현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한의사가 보다 정확한 진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현대의료기기를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한의계의 주장이 나온 배경이기도 하다. 한의사협회 김필건 회장은 지난 14일 기자회견에서 "한의사가 정확한 진단을 기반으로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기기 사용에 제한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심각한 '자가당착'에 빠질 수 있다. 엑스레이나 초음파진단기기 등은 개발 초기부터 임상시험을 거쳐 나오기까지 현대의학의 모든 경험과 정보가 녹아든 결집체다. 이런 의료기기를 이용하는 게 정말로 한의학의 현대화와 과학화인지, 혹은 한의학의 가치를 스스로 훼손하는 건 아닌지 의심해 볼 일이다. 그래서 한의학의 현대화·과학화가 현대의학의 학문체계와 수단을 통해서 구현돼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한의학 고유의 학문체계와 수단으로 구현할 건지 명확히 해야 한다. 한의계 스스로 현대화와 과학화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면 그건 한의학이 비과학적이라는 점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는 걸 경계하기 바란다. 무엇보다 한의학의 현대화와 과학화가 필요하다는 관점은 의료계가 한의학을 바라보는 시선이란 점을 잊지 말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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