훔볼트의 대륙 / 울리 쿨케 지음 / 최윤영 옮김 / 을유문화사 펴냄, 2014년

[라포르시안] #훔볼트에 대한 기억 1벌써 10년이 훌쩍 넘어가는 모양입니다. 베를린에서 열린 국제회의 마지막 날 시내구경에 나선 적이 있습니다. 독일 분단과 통일의 상징 브란덴부르그 문을 지나 훔볼트대학에도 들어가 보았습니다. 헬름홀츠의 동상이 서 있는 건물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기념품매장에서 두 아이들을 위해서 대학 표시가 새겨진 후드티를 사왔는데, 두 아이들이 즐겨 입어서 다행입니다. 훔볼트대학에 들어가면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바꾸는 것이다(Die Philosophen haben die Welt nur verschieden interpretiert, es kommt darauf an, sie zu verandern)”라는 칼 마르크스가 한 말이 새겨있는데, 앞 문장보다는 뒤 문장에 무게를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1810년 프로이센의 황제 프리드리히 빌헬름3세의 칙령에 따라 교육부장관 빌헬름 폰 훔볼트가 세운 대학입니다. 처음 교명은 베를린대학교였는데 1828년 황제의 이름을 따서 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교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설립자의 동생 알렉산더 폰 훔볼트가 주도하여 규모를 확대하였습니다. 나치로부터 탄압을 받았으며 2차 대전 중에는 많은 건물이 파손되고, 교원들이 죽거나 실종되는 피해를 입어 종전 후에 문을 닫았다가 1946년 소련군정의 주도로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1949년에는 동독의 독일사회주의통일당이 훔볼트대학으로 교명을 바꾸었습니다.

이 대학의 졸업생이나 교수 출신 가운데 40명이 노벨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그리고 사회주의 철학자 칼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를 창시한 프리드리히 엥겔스, 사회학자 게오르크 짐멜,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 등이 이 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철학자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와 요한 고틀리브 피히테,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문화비평가 발터 벤야민, 법학자 헤르만 헬러 등이 교수를 지냈습니다.

#훔볼트에 대한 기억 2[북소리]에서도 소개한 바 있습니다만, 제가 좋아하는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에서도 훔볼트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출발, 동기, 풍경, 예술, 귀환 등 여행에 관한 다섯 가지의 주제를 중심으로 여행의 품격을 논하였는데 <여행의 기술>의 서술구조에는 독특한 점이 있습니다. 주제를 중심으로 하여 자신의 여행에 관한 이야기가 한 축을 이루고, 저자가 안내자로 지목한 사람의 여행 이야기가 또 다른 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하려는 알렉산더 훔볼트는 호기심이라는 주제를 담은 보통의 마드리드 여행을 안내합니다. 주마간산하듯 스쳐가는 여행이 아니라 꼼꼼하게 관찰하고 느끼는 여행을 하라는 메시지를 담기에 알렉산더 훔볼트가 제일 마땅한 안내자였던 것입니다.

알랭 드 보통은 훔볼트의 남미여행에 관한 기록을 이렇게 인용하였습니다. “훔볼트는 보통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쳤을 것들을 놓치지 않았다. ‘해발 5,076미터인데도 눈 위로 바위 이끼가 보였다. 이끼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800미터 정도 아래서였다. 봉플랑 씨[훔볼트의 동행자]는 해발 4,500미터에서 나비를 한 마리 잡았으며, 거기에서 500미터를 더 올라가서도 파리를 볼 수 있었다.’(알랭 드 보통 지음, 여행의 기술 153쪽, 청미래, 2011년)” 알렉산더 훔볼트는 5년에 걸쳐 남미를 여행하면서 채집한 자료를 토대로 <신대륙의 적도 지역 여행>이라는 제목으로 30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식물지리학 시론 및 열대지역의 자연도>가 번역 소개되어 있습니다.

미국의 평론가 랠프 월도 에머슨은 훔볼트를 이렇게 평했다고 합니다. “훔볼트는 아리스토텔레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크라이턴 제독과 마찬가지로 이따금 세상에 나타나서 인간 정신의 가능성, 재능의 힘과 범위를 보여주는 경이로운 인간, 즉 보편적 인간의 한 예이다.(알랭 드 보통 지음, 여행의 기술 137쪽, 청미래, 2011년)” 훔볼트만큼 위대한 이름도 흔치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의 이름을 딴 지명, 동물 및 식물 이름, 기관 등은 헤아릴 수 없어, 신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정도가 비교된다고 합니다. 독일에서는 훔볼트의 이름을 딴 거리는 셀 수 없을 정도이며, 미국에서도 훔볼트의 이름을 딴 도시가 여덟 곳, 카운티가 아홉 곳이며, 열아홉 종의 동물과 열다섯 종의 식물 역시 훔볼트의 이름을 땄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알고 있는 것은 페루의 앞바다를 흐르는 훔볼트해류 정도였던 것입니다.

마침 알렉산더 훔볼트의 남미여행 과정을 살펴본 책이 나왔기에 소개하려고 합니다. 독일의 저명한 일간지 벨트(WELT)의 기자로, 세계의 탐험여행을 집중적으로 취재하고 이에 대한 저서를 여러 권 출판한 바 있는 울리 쿨케가 쓴 <훔볼트의 대륙>입니다.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에서 소개한 훔볼트의 남미여행이 단편적이었던 아쉬움을 채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쿨케기자는 훔볼트의 성장배경으로부터 남미탐험 그리고 유럽으로 돌아와 저술활동을 통하여 남미에서 발견한 것들을 알리고 죽음을 맞기까지 훔볼트의 일생을 잘 요약하였습니다.

우리는 흔히 완벽함을 이야기할 때 천시(天時), 지리(地利), 인화(人和)의 삼박자가 맞아 떨어졌다고 합니다. 훔볼트야말로 재능과 노력 그리고 배경까지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이 완벽함 그 자체였던 것 같습니다. 가정적으로는 아버지 알렉산더 게오르크 폰 훔볼트는 프로이센의 대령으로 황태자의 근위관을 지내면서 황실과 돈독한 관계를 맺었고, 어머니는 부유한 위그노파 가문 출신으로 막대한 유산을 남겼던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배경이라면 굳이 험지에 직접 가지 않아도 그의 형 빌헬름 폰 훔볼트처럼 국내에서 명망가로서 성장할 수 있었을 터이지만, 알렉산더 훔볼트는 어려서부터 적도여행을 꿈꾸었다고 합니다. 특히 제임스 쿡 선장의 세계일주여행이 소년 알렉산더를 세계여행으로 이끌었다는 것입니다.

훔볼트는 그저 꿈만 꾸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세계여행에 필요한 지식들을 쌓아갔던 것입니다.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광산학을 공부하였고, 화산을 연구하기 위하여 이탈리아를 여행하기도 했으며, 동물학자, 식물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하여 다방면의 지식을 쌓았던 것입니다. 공부한 것들을 확인하기 위하여 드레스덴, 프라하, 빈, 잘츠부르크, 파리 등에 있는 대학, 천문대, 학자들을 찾아다녔으며, 탐험여행에 필요한 최신 장비들, 고도계, 나침반, 온도계, 기압계, 수중계, 크로노미터 등을 사들였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알파벳, 화살표, 상징 부호 등을 비롯하여 각종 분류에 사용할 약호 등을 정하는 등 치밀하게 준비를 해갔던 것입니다. 감나무 아래서 입을 벌리고 있다고 감이 똑 떨어지는 것이 아니듯 행운은 예비하고 있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법입니다.

나폴레온의 프랑스군에 합류하여 북아프리카로 가려던 계획은 좌절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식물학자 에메 봉플랑을 만나게 되었고, 봉플랑은 훔볼트의 남미탐험의 동반자가 되었으니 훔볼트의 파리행이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행운은 역시 훔볼트 편이었습니다. 남미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당시 남미를 지배하던 스페인의 허가를 받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작센공사의 도움으로 알현하게 된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4세는 훔볼트에게 여행허가증을 내주었던 것입니다.

이미지 출처: '훔볼트의 대륙' 중에서.

훔볼트와 봉플랑은 1799년 5월말 스페인의 북서쪽 갈라시아 지방의 라 코루냐의 항구에서 쿠바로 가는 배에 올랐습니다. 첫 번째 기착지 카나리아제도에서 해발 3,718m의 피코 데 테이데산을 등정하는 것을 시작으로 5년간에 걸쳐 훔볼트가 남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에 걸쳐 탐험한 거리는 대략 25,000km에서 30,000km에 달하였고, 6,200종의 식물을 수집하였으며, 700여 가지의 천문 관측실험을 수행했습니다. 훔볼트는 자신이 경험한 것과 측정한 것들을 모두 6만여 쪽의 기록으로 남겼다고 합니다.

자연과학자이면서도 인문주의적 성향을 가졌던 훔볼트는 남미에서 만난 인디오들이 선하다고 느꼈지만,  스페인 사람들이 노예를 매매하는 모습을 보고서 충격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후에 미국을 방문했을 때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에게 노예매매를 중지하라고 요청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스페인의 남미지배에 대하여 비판적 시각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현지의 스페인 사람들과는 우호적 관계를 이어갔습니다.

훔볼트는 오리노코강을 측량하기 위하여 내륙지방의 정글로 향했는데, 악어와 전기뱀장어가 득실거리는데다가 격류가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인디오들을 고용하여 노를 젓거나 폭포를 만나면 배를 매고 육로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새로운 세계에 발을 디딘다. 자연이 문명화된 해안가와 원시의, 그리고 미지의 내륙 사이에 만들어 놓은 빗장 뒤로 왔음을 느낀다(127쪽)”라고 적었습니다. 훔볼트의 탐사는 그때까지 아마존을 나누고 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잘 못 알고 있던 것들을 바로 잡는 역할을 했음이 분명합니다. 오리노코강과 네그루 강 사이에 엘도라도, 즉 황금의 땅이 있다는 소문이 잘못된 것이라는 점도 말입니다.

훔볼트는 남미를 탐험하면서 기회가 될 때마다 작성한 보고서를 유럽으로 보냈고, 그 보고서는 인기를 끌었습니다. 훔볼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유명인사가 되어가고 있었던 셈인데 보고서가 뜸하면 훔볼트가 탐험여행 중에 사망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이런 방식이 탐험여행에 결정적으로 도움이 된 사건도 있었습니다. 누에바 바르셀로나에서 쿠마나로 향하는 도중에 영국의 무장선박에 나포된 것입니다. 이미 신문을 통하여 훔볼트의 탐험기를 읽은 바 있던 영국의 선장이 존경하는 훔볼트를 석방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니치 천문대의 관측자료까지 제공하는 후의를 베풀어 훔볼트의 천문관측에 크게 도움이 되기도 했던 것입니다.

쿠마나에서 쿠바의 아바나로 향한 훔볼트는 오리노코강 탐험에서 얻은 자료들을 유럽으로 보냈고, 지금의 콜롬비아와 볼리비아를 거쳐 페루의 리마에 이르는 경로의 탐험에 나섰습니다. 그 여정에는 당시까지 세상에서 제일 높은 산으로 알려져 있던 볼리비아의 침보라소산 등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의 178쪽과 179쪽에 침보라소산의 탐험자료를 정리해놓은 것을 보면 훔볼트의 자료정리방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시 훔볼트와 봉풀랑이 등정한 높이는 5,881미터인데 이 기록은 그때까지 인간이 올라간 가장 높은 곳으로 향후 50년 동안 이어졌다고 합니다. 이들은 침보라소산의 정상까지 도달하지는 못했는데, 고산병의 증세가 시작되었고, 인디오들도 5,100미터에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훔볼트는 이때의 심정을 이렇게 기록하였다고 합니다. “암석들이 스스로 양극을 다 가져 자기 바늘에 영향을 주는 이 산에서 암석이 안 보이는 평원이나 혹은 자기장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산 위로 도구들을 400m 더 높이 가지고 간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180쪽)” 화산학에 관심이 많았던 훔볼트는 만년설로 덮여 있는 정상에 분화구가 있는지 확인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침보라소산에서 페루의 리마에 이르는 동안 훔볼트는 잉카인이 만들어놓은 유적들을 보고 경외감을 가졌으나, 리마를 차지한 유럽 사람들의 삶은 오히려 환멸에 가까운 것이었던 모양입니다. 리마의 항구 카야오에서 과야킬과 멕시코의 아카풀코로 향하면서 훔볼트는 차가운 바닷물이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향하고 있음을 발견했고, 이 조류가 남극에서 오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 해류를 오늘날 훔볼트해류 혹은 페루해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1837년 프로이센의 지리학자 하인리히 베르크하우스가 훔볼트해류라는 이름을 지었을 때, 정작 훔볼트는 ‘이것은 칠레부터 파이타까지, 뱃사람이라면 어린아이까지 누구나 다 아는 해류(202쪽)’라면서 이의를 제기해서 세인을 놀라게 했던 모양입니다.

요즈음 여행을 하면서 SNS를 통하여 실시간으로 독자를 만나는 여행가들도 많습니다만, 언론을 통하여 탐사여행과정을 중계했던 훔볼트야말로 미디어여행의 효시라고 할 만합니다. 유럽으로 돌아왔을 때 훔볼트는 이미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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