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부터 흑자 행진, 건강보험 보장률은 4년째 계속 하락…누적적립금 17조 달해도 더 쌓아야 한다?

[라포르시안] #. 2015년 6월 24일 오전, 국민건강보험공단 내 한 사무실에서 임시이사회가 열렸다. 이날 회의 안건 중 하나로 '2015~2019년 중장기 재무관리계획안'이 상정됐다. 건보공단이 공개한 임시이사회 회의록에 적혀 있는 참석자들의 발언 요지는 이랬다.   

A이사 "재무관리계획 수립기준이 바뀌었는지?"B실장 "당초 적립금을 소진하는 방식으로 수립했다가 이번에는 적립금을 소진하지 않고 유지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C이사 "적립률이 다소 높은 것 같다. 국민부담을 덜어주는 차원에서 보험료율 인상에 대한 부분은 제고의 필요가 있다" D이사 "건강보험법상 1년치 급여비의 50%를 준비금으로 적립토록 되어 있다.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서 보장성 문제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해서 수가와 보험료율을 결정할 예정이다"

건강보험 재정의 누적수지(적립금)가 많이 쌓여 있는데 이를 보장성 확대 등으로 소진하지 않고 계속 유지하는 재무관리계획안에 대해서 이의가 제기된 거다.

실제로 건강보험 재정은 2011년 이후 5년째 당기흑자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흑자 행진이 이어지면서 건강보험 재정의 누적수지가 상당한 규모에 이른다.

보건복지부가 올해 초 공개한 '2014년 건강보험 재정현황' 자료에 따르면 2014년 말 기준으로 건강보험의 누적 적립금은 12조8,072억원에 달했다.

올해도 당기흑자 기조가 유지되면서 누적 적립금이 17조원에 육박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 정도 누적수지 규모는 건강보험제도가 운영된 이래 처음이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보험재정의 적립금을 계속 쌓아가는 것이 건강보험제도가 추구하는 목표에 비춰봤을 때 과연 타당한가 하는 점이다.

건강보험 재정은 당해연도 수입으로 당해연도 지출을 충당하는 대표적인 단기재정이다. 즉, 월별로 보험료를 거둬서 그 만큼을 보험급여비로 지출하는 운영 방식이다.

지난 2000년 직장과 지역의료보험 조직이 통합된 이후 수년 간 보험재정은 늘 위태위태하게 운영돼 왔다. 지난 2001년 건강보험 재정적자가 4조원을 넘어서면서 지급불능 사태가 우려되는 위기도 있었다.

단기재정의 특성상 다시 당기적자와 흑자를 번갈아 이어갔고, 특히 2011년 이후부터는 5년 연속 당기흑자를 지속하고 있다.

건강보험 재정의 당기흑자는 2011년 6,008억원, 2012년 3조157억원, 2013년 3조6,446억원, 2014년 4조5,869억원 규모에 달했다. 올해 들어서도 지난 8월까지 3조7,740억원의 흑자를 기록했고, 하반기 운영까지 감안할 때 4조원 가까운 흑자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된다.

게다가 지난 5월 말부터 3개월 가까이 이어진 메르스 사태로 국민들의 의료기관 이용이 급감하면서 건강보험 재정 절감액 규모가 상당할 것이란 분석도 나오고 있다.

건보공단은 지금과 같은 당기흑자 기조가 향후 5년간 지속될 것으로 전망했다.

공단이 지난 9월 작성한 '건강보험사업 2015∼2019년 자금수지 전망'에 따르면 건강보험 재정의 누적수지는 2015년 15조8,040억원에서 2016년 17조3,010억원, 2017년 18조3,962억원, 2018년 19조2,095억원, 2019년 20조428억원까지 늘어난다.

급여비 지출 증가세가 떨어진 이유?..."의료비 부담에 병원이용 자제한 결과"

지금과 같은 건강보험 재정의 흑자행진을 어떻게 봐야 할까.

우선 건강보험 재정이 당기흑자를 기록하는 이유부터 짚어볼 필요가 있다. 당기흑자 발생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건강보험 급여비 지출 증가세가 크게 둔화됐다는 점이다.

복지부와 건보공단에 따르면 2005~2011년 사이 건강보험 급여비 지출의 연평균 증가율은 12.0%에 달했지만 2012~2014년까지 3년간 연평균 급여비 증가율은 5.5%로 떨어졌다.

복지부와 건보공단은 급여비 증가율이 꺽인 이유로 건강검진 등을 통한 질병 예방과 조기발견 등 건강행태의 변화, 의료기술 발전, 환경요인 개선, 건강한 고령화 등을 꼽았다.

전반적으로 국민들의 건강의 질이 향상되면서 의료이용이 줄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과연 그럴까. 복지부의 해석은 곧장 비난을 샀다. 

급여비 지출 증가율이 둔화된 원인은 지속된 경기침체로 소득이 줄면서 아파도 병원 이용을 자제하는 식으로 의료비 지출을 줄였기 때문에 발생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건강권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은 "경제가 안 좋아지니, 국민들이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했다. 병원들의 의료상업화로 인해 가파르게 증가하던 의료비 증가율도 2012년부터 감소할 정도였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이 건강해져서 흑자가 생겼다고 자랑하는 정부의 언행은 정말 파렴치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건강보험 흑자 기조 속에서도 보장성 확대는 소극적이었다는 지적도 높다. 실제로 건강보험의 보장률은 2009년 65.0%에서 2010년 63.6%, 2011년 63.0%, 2012년 62.5%, 2013년 62.0%로 떨어졌다. 보장률의 하락세와 건강보험의 흑자 기조가 서로 반비례하는 꼴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년부터 입원환자 본인부담금을 인상하는 조치까지 취해진다. 최근 국무회의를 통과한 국민건강보험법 시행령 개정안은 입원기간 15일 이상 30일까지는 입원료 본인부담률을 25%로, 31일째부터는 30%로 인상토록 했다.

의료민영화저지와 무상의료실현을위한 운동본부 등의 시민단체는 "경제위기로 가뜩이나 입원을 꺼리는 서민들에게는 큰 부담 증가가 될 수 있다. 환자의 경제적 부담을 매개로 장기입원자를 줄이겠다는 생각은 국민들에 대한 현 정부의 인식을 보여준다"고 비난했다.

게다가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대선에서 약속한 ‘4대 중증질환 100% 국가책임’ 공약을 추진하면서  별도의 예산(국고 일반예산)으로 충당하는 게 아니라 국민이 낸 건강보험료로 생색을 내고 있다.

시민단체는 "막대한 건강보험 흑자가 남은 이유는 건강보험의 보장성이 턱없이 낮아 병원 이용을 자제한 결과"라며 "높아지는 비급여 진료비와 간병비 등으로 국민들의 병원 이용은 날로 어려워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양심이 있다면 최소한 국민들이 낸 보험료 흑자분은 보장성 강화에 전적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국민이 낸 보험료를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에 지출하는 데는 인색한 반면 정부가 추진하는 의료산업화 관련 정책에 지원하는 데는 적극적이다.

정부가 지난 8월 말 발표한 ‘임상시험 규제완화 계획’에 따르면 임상시험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을 확대하는 안이 포함돼 있다. 또한 안정성과 효용성이 입증되지 않은 의사-환자 간 원격의료에 건강보험 수가를 적용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이를 두고 건강보험료를 국민의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가 아니라 기업과 관련산업 활성화를 위해 투입한다는 비난이 거세다. 

건보공단, '건강보험재정 기금화 전환' 주장에는 단기재정 운운적립금으로 보장성 강화에는 '장기재정 전망' 들먹이며 모순된 주장

공단은 건강보험 재정의 적립금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로 국민건강보험법상의 법정준비금 조항을 제시한다.

건보법 제38조에 따르면 공단은 회계연도마다 결산상의 잉여금 중에서 그 연도의 보험급여에 든 비용의 100분의 5 이상에 상당하는 금액을 그 연도에 든 비용의 100분의 50에 이를 때까지 준비금으로 적립해야 한다.

지난해 보험급여비 총 지출액인 42조4,939억원인 점을 감안하면 공단이 건보법 규정에 따른 법정준비금을 적립할 경우 그 규모가 20조원을 넘어야 한다.

올해 말 누적수지가 17조원에 달하더라도 추가로 더 적립금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보험으로써 건강보험제도를 운영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고려하지 않고 관련 규정을 들먹이면서 누적적립금을 확보하는 데 열을 올리는 꼴이다.

이럴 바엔 차라리 건강보험재정을 기금으로 전화하는 걸 고려해야 한다. 국회를 통해서 건강보험사업 및 예산에 대한 심의를 받고 통제함으로써 재정운용의 투명성과 안정성을 확보하는 게 낫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전문가들이 건강보험재정 기금화에 반대하는 이유가 국회의 심의를 받게될 경우 국민건강 보장이라는 건강보험 본래의 목적 달성보다 보험재정 증가 억제에 우선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심지어 건보공단에서도 기금화 이야기가 나올 때만다 이런 논리를 펴면서 보험재정 운영과정에서 융통성과 유연성의 발휘가 요구된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하지만 최근의 누적적립금이 지나치게 쌓였고, 이를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자 '법정준비금' 규정을 끌어들이고 장기적인 재정 전망을 들먹이면서 모순된 주장을 펴고 있는 셈이다.

지난 9월 '건강보험 17조 원 흑자를 국민에게' 운동을 선포한 무상의료실현을 위한 운동본부는 "건강보험 흑자를 남겨두는 것 자체가 의료복지의 긴축정책이다. 건강보험은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매년 보험료와 서비스지출을 일치하는 구조로 가야 정상"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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