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칸의 역사 / 마크 마조워 지음 / 이순호 옮김 / 을유문화사 펴냄, 2014년

[라포르시안] 지난달 발칸여행에 챙겨갔던 다섯 권의 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역사를 챙겨 읽는 것은 여행지를 이해하는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동서문명의 충돌현장을 돌아보는 저의 여행은 스페인에서 시작해서 터키를 거쳐 발칸에 이르렀습니다. 발칸을 여행하면서 가장 궁금했던 것은 발칸반도 혹은 발칸국가의 범위였습니다. 발칸은 ‘산’을 의미하는 터키어입니다. 오스만제국 지배시설 불가리아와 세르비아에 걸쳐있는 산맥을 발칸이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 19세기 이후 반도전체를 부르는 이름으로 차용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발칸 반도는 도나우강, 사바강, 쿠파강을 경계로 한 이남의 지역을 말합니다. 따라서 발칸반도에는 그리스,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불가리아, 알바니아의 영토 모두가 포함되고,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역시 일부를 제외하고는 발칸반도에 들어갑니다. 터키, 루마니아, 슬로베니아, 이탈리아의 일부도 발칸반도에 포함됩니다. 터키의 동부 트라키아 지방, 루마니아의 북도브루자 지방, 슬로베니아의 프로모르스카 지방,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와 고리치아 등입니다. 하지만 이들을 발칸국가라고 하지는 않습니다.(위키백과, ‘발칸반도’를 참조함)

발칸반도를 ‘유럽의 화약고’라고 부른 것은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지금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페르디난트황태자가 암살당한 것이 계기가 되어 제1차 세계대전이 촉발되었기 때문입니다. 현대에 들어서도 1991년부터 1999년까지 구 유고슬라비아연방의 영토에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등의 분리독립 전쟁과 크로아티아-보스니아 전쟁, 코소보 전쟁 등이 이어져 화약고라는 용어를 실감나게 했습니다. 결국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해체되어 마케도니아 공화국,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스릅스카 공화국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 브르치고 행정구로 갈라졌습니다), 세르비아(코소보가 독립을 선포한 상태), 몬테네그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등이 독립했습니다.(위키백과, ‘유고슬라비아 전쟁’을 참조함)

지역적으로는 일단 발칸을 정리하였습니다만,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살아온 역사를 정리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20세기를 통하여 이 지역을 혼란스럽게 만든 민족적 종교적 요소들이 정리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지역의 국가들이 이합집산이 복잡한 것도 원인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발칸사의 권위자이며 미국 컬럼비아대학 역사학과에 재직 중인 마크 마조워교수가 쓴 <발칸의 역사>는 복잡하기만한 발칸지역의 역사를 정리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자는 먼저 발칸이라는 명칭과 발칸이라는 지역에 대한 유럽 사람들의 편견이 어떻게 자리잡아왔는지 줄거리를 정리하였습니다. 발칸지역의 혼란은 인종적 다양성과 오랜 세월에 걸친 종교 및 문화적 갈등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는 유럽의 영토와 정신을 7세기에서 17세기에 이르도록 1,000년 이상이나 복잡하게 엮어 넣은 기독교와 이슬람세력이 서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데 기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무슬림국가들이 비(非) 이슬람교도들을 백성으로 받아들인 것과는 달리 기독교국가들은 무슬림은 물론 유대인에 이르기까지 이교도들을 위협적인 존재로 간주하고 추방하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기독교도와 무슬림 사이의 종교적 대립이 꾸준하게 이어졌지만 근세에 이르러 오스만제국이 세력을 잃을 때까지도 유럽 사람들은 오스만제국을 두려워하고 또 존경했습니다. 무질서하고 나약하기까지 한 기독교 국가들과는 비교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17세기 영국의 설교가 토머스 풀러는 “(술탄의 제국은) 지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굳건한 나라이며, 바다와 육지를 통틀어 (…) 세계의 중심에 위치해 있는 나라”라고 했답니다(25쪽). 1683년 오스만제국의 두 번째 빈공략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오스트리아는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등지를 점령하고 기독교인들을 이주시켜 발칸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기 시작했고, 반면 오스만제국의 지배력은 약해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유럽 사람들은 발칸을 깍아내리기에 급급하게 되었는데, 다분히 오스만제국을 겨냥한 것이었습니다.

▲ 1550년경 오스만제국 판도. 이미지 출처: '발칸의 역사' 중에서

오스만제국은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발칸반도의 전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지만, 1829년 그리스가 독립한 뒤로는 발칸 국가들의 자치나 독립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1908년 오스만제국의 청년 튀르크당이 혁명을 일으키면서 내세운 튀르크 민족주의에 발칸국가들의 우려가 팽배하게 되었습니다.

오스만제국이 발칸의 실지를 찾으려 할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1911년 모로코에 대한 영향력 증대를 목표로 한 이탈리아가 오스만제국에 전쟁을 선포하여 승세를 얻으면서 발칸국가들은 오스만제국에 대항하게 됩니다. 불가리아왕국, 그리스왕국, 세르비아왕국, 몬테네그로왕국 등이 러시아의 지원 아래 오스만제국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시작된 제1차 발칸전쟁에서 오스만제국이 패전합니다. 제1차 발칸전쟁에서 패전한 오스만제국은 이스탄불 주변을 제외한 발칸반도의 대부분 지역을 잃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오스만제국으로부터의 독립으로 발칸국가들은 새로운 문제를 안게 되었습니다. 즉 독자적인 힘을 토대로 독립을 이룬 것이 아니라 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의 힘에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강대국의 정책변화에 따라 운명이 좌우되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바다로 향하는 유일한 통로인 보스포루스해협을 장악하려는 야심을 가진 러시아로서는 오스만제국에 대한 회유와 공세를 반복해왔고, 오스만제국의 몰락이 가져올 러시아의 부상도 달갑지 않은 유럽으로서도 곤혹스러웠을 것 같습니다.

투르크족의 노예로 있을 때 그리스의 모습은 애처로워 보였다. 그런데 독립을 하고 나니 그 모습은 한마디로 끔찍스러웠다. 그리스인들의 삶은 절도와 폭행의 연속이었고, 방화와 암살은 그들의 취미가 되었다.(34쪽)”라고 적은 프랑스여행가도 있습니다. 발칸반도에 전해오는 민담 혹은 전설에는 오스만제국의 지배가 끔찍했다는 내용보다는 오히려 평범한 주민들을 못살게 하는 산적들에 관한 이야기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물론 오스만에 대항한 군사적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분위기가 아니어서 당혹스럽기도 합니다(요르단 욥코프 지음, 발칸의 전설, 문학과 지성사, 2006년).

저자는 복잡하기만한 발칸의 역사를 1. 발칸의 영토와 주민들, 2. 국가 성립 이전의 발칸, 3. 동방문제, 4. 국가 건설 등의 순서로 정리하였습니다. 국가의 3요소 가운데 중요한 국민과 영토를 설명하고, 마지막 요소인 주권을 얻는 과정을 역사적 배경으로부터 정리한 것입니다. 이번 여행에서는 일부만 보았을 뿐입니다만, 발칸의 지형이 아주 험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19세기 여행작가 아서 에번스는 “이 산맥의 기묘한 형상이 힘겹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물은 구경조차 할 수 없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나지막한 산맥, 풍화된 석회암 덩어리만 있을 뿐 풀 한 포기 없는 게…황량한 풍경(45쪽)”라고 헤르체고비나의 카르스트 지형을 묘사했다고 합니다. 제가 아드리아해안에 있는 코르츨라 섬에 가던 날은 폭우로 흠씬 젖고 말았습니다만, 일부 지역은 대체로 강수량도 많고 온화한 기후이지만 대부분의 지역은 산이 험하고 비그늘효과로 인하여 비가 별로 내리지 않은 척박한 탓에 사람들이 살기 어려운 환경이라고 합니다. 발칸반도는 지형적 특성으로 남북방향의 이동은 어렵지만 동서 방향의 이동은 그리 어렵지 않아 동쪽으로부터는 슬라브족들이 이주해왔고 서쪽에서는 아드리아해의 해안과 바다를 통하여 이탈리아, 특히 베네치아사람들이 이주해왔습니다. 앞서 발칸의 민담에서 터키관헌에 대한 주민들의 인상이 그리 나쁜 것 같지 않아 보였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오스만제국은 농민들은 호의적으로 대하고 지방관리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18세기 오스만제국의 관리를 지낸 사리 메메드 파샤의 글입니다. “지방관리들로 하여금 가난한 레아(농민)를 억압하지 못하게 할 것이며, 농민들이 매년 내는 것으로 알고 있는 세금 외 별도의 세금을 요구하여 그들을 괴롭히지도 말아야 한다.(63쪽)”

비잔틴제국에서 오스만 제국으로 지배구조가 넘어갔을 때도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민족이나 종교가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비잔틴제국 시절에는 정교회가 중심이 되었고, 오스만제국은 어느 민족이나 술탄의 신민이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오스만제국은 이교도에 대하여 군인으로 동원하는 대신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였습니다. 이교도의 충성심을 믿지 못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세금원이 되는 이교도를 박해하여 이탈하는 것이 오히려 손해라는 점도 있었을 것입니다. 심지어는 오스만 말기에는 개종을 불허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발칸반도에 눈독을 들이면서 이 지역에서는 종교와 민족을 매개로 한 세력의 집결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유럽 열강들은 여기에 편승하여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강대국의 도움을 받아 독립을 얻은 신생국가들은 영토확장에 열을 올렸습니다. 1912년 제1차 발칸전쟁의 패배로 오스만제국이 발칸반도에서 물러난 이후, 이번에는 발칸동맹에 참여한 국가들 사이에 갈등이 생겨 제2차 발칸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불가리아, 세르비아, 그리스는 마케도니아를 분할했는데 불가리아가 대부분을 차지한 것에 세르비아가 반발한 것입니다. 마케도니아를 모두 차지하려는 야심을 품은 불가리아가 1913년 6월 29일 세르비아와 그리스에 선전포고를 해서 제2차 발칸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이 전쟁에서 루마니아, 오스만제국, 몬테네그로 등이 세르비아와 그리스 동맹에 가담했고 결국 불가리아가 패전하게 됩니다. 발칸반도에서 벌어진 일련의 갈등은 결국 제1차 세계대전으로 번지게 됩니다.

앞서 소개한 사라예보사건은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청년이 저질렀지만 불똥은 세르비아로 튀었습니다. 세르비아가 러시아제국을 등에 업고 벌이는 남슬라브운동을 위태롭다고 본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와 전쟁을 결심한 것입니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였고, 러시아는 총동원령을 내립니다. 오스트리아와 동맹관계에 있던 독일도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였습니다. 이때 오스만제국 역시 독일과의 관계 때문에 동맹국에 참가하였다가 패전의 멍에를 쓰게 됩니다.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이유궁전에서 연합군과 독일 사이에 종전을 위한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때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이 탄생하게 됩니다. 이탈리아가 아드리아해안의 달마치아에 대한 영토를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재편된 발칸의 국경은 복잡한 민족구성을 반영하지 않은 측면이 있었습니다. 영토가 확장된 루마니아의 경우 독일인, 우크라이나인, 유대인들이 전체 인구의 28%에 달했고,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의 경우는 15%, 불가리아도 20%가 이민족이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별도로 전쟁을 치룬 그리스와 터키는 대규모로 주민을 교환한 바 있지만, 발칸국가에서는 이보다는 소수민족을 보호하기 위한 협약을 체결하는 방식을 적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민족들은 체계적으로 억압을 받았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치 독일이 발칸지역을 점령하면서 발칸지역의 인종들 사이의 갈등이 한층 고조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도 인종 간 충돌로 대량학살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발칸지역이 공산화되면서 수면 아래로 내려갔던 인종갈등이 공산세력이 무너지면서 다시 현실화되면서 특히 다민족으로 구성되었던 유고연방에서 폭발하게 된 것입니다.

저자는 ‘폭력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에필로그에서 발칸에서 벌어진 야만성과 폭력은 서구의 책임이 적지 않으며, 서구의 잣대로 판단한 것이라고 잘라 말합니다. 발칸의 역사를 돌아보면 발칸이 번영할 수 있는 묘책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빠트리지 않습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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